시대예보: 호명사회
24년에 핵개인의 시대를 말하던 송길영이 25년엔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이름이 불릴 수 있는 자만이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는 이렇게 불안에 가득찬 개구리처럼 말한건 아니겠다.)
핵개인의 시대를 극히 최근에 읽었다. 머가 이렇게 줄줄 이어지는거야 싶었는데, 25년을 앞둔 시대예보도 독특한 화법으로 다가온다. 간지를 내 기준에서 보면 지극히 아무데나 넣은 느낌도 그렇고, 트렌드를 알려주겠노라고 하는 자들은 보통 분절된 카테고리와 예시를 들고 오던데, 송길영은 원테이크로 가보겠다는 각오로 촘촘히 각본을 짜고 소품을 준비한 느낌이다. 내용이 내용인지라 마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1년간의 살인사건 뉴스를 3살짜리 아가의 잠든 머리맡에서 나긋나긋 소리내어 읽어주는 것만 같지만.
또한 전편과 마찬가지로 50대 메이저 아저씨가 이렇게 공감능력 가득한 글을 쓸 수 있구나 놀라게 한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지시와 반영의 반복은 지시를 받은 이의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예보로 보지 않을 것이다. 이미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를 공감가게 썼다고나 할까.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우리는 위험을 과대 인지하며 불안에 떨고 있다. 시뮬레이션은 지나치게 부정적이라, 공식대로 살지 못하는 선배의 삶을 살기도 어렵고, 아무리 머릿속에 엑셀을 굴려봤자 소용이 없다. 기준은 날카롭게 벼려졌고, 개인들은 타인에게도 나에게도 너그러움을 잃었다.
‘공정한 평가’에 대한 요청이 거세어질 때 평가는 정량화될 수밖에 없고. 계량화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의 가치는 관심밖으로 내몰린다. 다같이 하나를 보고 달리니 경쟁 인플레이션이 심해지고, 그나마 우리가 차별화할 수 있었던 열정마저도 가치가 폭락했다.
에라 이럴 바엔 월급루팡이나 되자 하지만 50대 퇴직을 맞이하려고 보니 할 줄 아는게 없는 물경력이다. 반대로 성공에의 부귀영화에의 욕망을 따르고 싶어도, 그마저도 현대의 속도를 따를 수 없다. 의지마저도 탈진한 번아웃이 일상화된 사회, “사회적 정신보건의 위기”다. 이거 원래 하는 말인가? 아주 끝내주는 표현이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스스로 찾은 진정한 선택이 배제된 최적화가 우리를 ‘그곳’에 데려갈 수 있을까. 그는 호오에서 답을 찾으라고 한다.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것, 그 일로 평가받는 것을 경험해보라고 한다. 결국 모든 프로세스를 장인의 마음으로 ‘혼자’ 만들 수 있는 이는 대체될 수 없다고, 그렇게 근근이 먹고 살라고. 이것은 도망이 아니라 깊어지는 거라고, Everything has someone이 있고, 이 안에서 우리는 연대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동반자적 삶을 모색해볼 수 있지 않겠냐고.
그러면서도 본진을 강조한다. 결국 너의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수없이 많은 N잡들도 코어없는 볏집처럼 쉽게 무너져내릴거다. 너의 정체성을 무엇이며,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나. 부가가치를 위해 더 나아가야할 곳은 어디인가. 호오를 시작으로 무언가 시도하면서 우리가 해야할 것은 질문이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출발선에 섰을까. 아 부질없구나의 깨달음을 기준으로 한다면 출발선에 선 것은 맞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