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여왕 오월은 싱그런 초록 융단을 밟으며 떠나고, 온통 빨간 장미로 넝쿨을 이룬 유월은 장미 향과 붉은 분을 덧칠하며 담장을 타고 화사하게 내려앉았다.
37년 전 장미의 계절 유월에 난 화사한 신부로 수줍게 피어났다.
요즘 우리 부부는 은퇴자의 삶을 살고 있다. 젊어서는 은퇴라는 단어도 까마득하게 생각되었었는데, 어느새 나이가 들어, 은퇴하게 되었고 이젠 글을 쓰며 인생 제2막을 살고 있다.
집 뒤쪽으로 초, 중, 고, 4개의 학교가 직렬로 이어져 있어, 학교 앞길은 좋은 산책로가 되기도 한다. 특히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릴 때도 물 빠짐이 좋고, 깔끔하고 정돈된 보도블록과 적당히 밝은 가로등이 늘 안정감을 주어, 비 오는 날 우산 쓰고 걷기엔 최적이다. 늦은 밤에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가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땐, 아파트 정원을 한 바퀴 돌아서, 학교 앞길을 몇 번 왕복하여 걷고 와도 충분한 산책과 운동이 된다. 빨간 장미로 뒤덮인 학교 울타리는 향기를 뿜어내며 살아 숨 쉬는 예술품 같다.
여고 1년 때 그리도 되고 싶었던 화가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육 남매 중 여동생, 남동생을 둔 중간에 낀 내가 미대에 간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란 걸 깨달은 것이다. 순박하고 성실하기만 한 농부였던 부모님의 경제 사정을 헤아려, 내려야만 했던 마음 아픈 결정이었다. 미술 선생님을 피해 다니다가, 고3이 되어 대학 시험을 칠 때는 졸업 후 취업이 가장 잘 된다는 간호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전공과목은 어렵고 공부하기도 힘들었지만, 간호사가 되어 국내 최고의 병원이라는 S 대병원에서 근무할 때는 뿌듯함이 있었고, 바쁘고 힘들어도 즐겁고 보람차게 근무하였다.
결혼 후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 병원을 퇴직했다. 살림하고 두 딸을 키우다가, 작은딸이 고 2가 되자 보건교사를 시작하여 다시 커리어우먼이 되었는데, 그 일이 15년간 계속되었다. 재취업을 하기 전에는 아이들 키우며 성당 봉사활동도 하고 꾸준히 운동도 했으나, 문학 서적을 읽는 것이 늘 부족하다고 느꼈고, 어렴풋이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일기는 쓰다 만 적이 너무 많고, 한 권을 꽉 채워 완성한 것이 거의 없어 늘 아쉬움이 컸었다.
은퇴를 얼마 앞두고 공문을 보다가 우연히 SJCU 문예창작학과 편입학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졸업 때까지 배움터 장학금 혜택도 있어서 3학년에 편입했다. 은퇴하면 생활이 느슨해지고 무계획적으로 흘러갈까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글쓰기에 재미를 붙인 남편과 함께 글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활이라 느껴졌다. 나이 들어 공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살아오면서 글 쓰는 일에 큰 두려움은 없었기에, 좀 더 체계 있게 공부하면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또한 공부하면서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들을 많이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맘에 들었다.
2021년도에 편입해서 타이트하게 공부했다면 올해 졸업했을 텐데, 손주가 태어나 딸과 손주를 돌봐줘야 하는 변수가 생겼다. 학업의 열정을 약간 낮춰서 수강과목을 줄여 쉬엄쉬엄 천천히 가기로 했다.
딸과 사위는 맞벌이여서 어린 손주들을 돌봐주러 우리 부부는 종종 딸네 집으로 간다. 작은 손주는 이제 10개월이 되었고, 뭔가를 붙잡고 걸음마 발을 떼기 시작했으며, 이유식과 분유를 번갈아 먹는다. 큰손주도 2년 6개월 된 아직 어린 아기이며, 같은 어린이집에 보내고 있다.
내가 책을 읽고 글을 계속 써나가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어린 손주들과 함께 성장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손주들과 같이 책을 읽고, 글도 쓰고, 생각을 나누고 공유하기 위해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속 공부도 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손주들이 조금 더 자라면 함께 인근에 있는 어린이도서관도 가고, 곧 개관할 세계 문자박물관에도 가서 다양한 학습도 하고, 많은 경험을 같이 쌓아가고 싶다.
글쓰기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암보다도 무섭다는 치매 예방을 위해서다. 이미 독일 *‘가톨릭 수녀 연구’에서 실험을 통해서 통계가 나온 자료를 보면 독서와 글쓰기가 치매 예방에 아주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이미 인지능력이 떨어져 있더라도 지속적인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서 지적 능력이 더 떨어지지 않고 유지가 되며 치매 예방효과가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정신적 운동인 글쓰기는 신체적 운동과 마찬가지로 죽을 때까지 늘 해야 한다.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움직여야 하듯이 건강관리도 꾸준히 해야 한다. 많이 읽고 쓰고, 산책도 많이 하려고 한다. 같은 방향을 보며 가자고 서로에게 다짐한 우리 부부는 오전에는 헬스장에서 각자 운동하고, 점심 먹은 후엔 독서하고 글도 쓰며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저녁에는 식사 후 가까운 달빛공원이나 센트럴파크 공원으로 나간다. 둘이 함께 손을 잡고 달빛 속을 걷는다. 세상사와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가톨릭 수녀 연구(The Nun Study): 독일. 글쓰기와 건강, 장수의 상관성에 관한 연구.
그중 메리 수녀 이야기(Sister Mary)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큼. [박민근 교수, <문학치료>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