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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떼아리 Aug 19. 2023

06. 조금 특별한 남매_part 1

쌍둥이는 아니거든요?





나는 남동생과 생일이 같다. 쌍둥이란 소리는 아니다.


무려 2년을 건너뛴 채 같은 생일에 태어난 남매.


부모님은 우스갯소리로 생일을 한 번에 치우니 좋다고 하시기도 한다. 그러나 원래 동생은 8월 말쯤 태어나야 했다.


예정일보다 한 달이나 앞서 태어난 구 삭 동이. 그런데도 인큐베이터에 넣기가 민망할 정도로 우량아였다고.


실제로 옛날 사진을 보면, 나보다 동생이 더 거대해 보인다. 아기가 그렇게 거대할 수 있다는 게 사진을 보면서도 신기했더랬다.


그렇다고 우리가 생일만 같은 건 아니다.


우리는 생긴 것도 똑같았었다. 어릴 때는 정말 쌍둥이라고 들어도 인정할 정도로. 심지어 동생의 변성기 전까지는 목소리마저 똑같아서 부모님이 매번 헷갈리셨다.


다 큰 지금은 외모도 아주 똑같지는 않고, 목소리는 완연한 차이가 나지만 우리는 여전히 많이 닮았다.






우리 남매는 무척 친하다. 주변에 남매를 가진 다른 사람들이 경악할 정도로.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동생과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이렇다.


우리는 둘 뿐이었다. 부모님이 자주 안 계셨기 때문에.


여름 방학에는 부모님 없이 둘만 시골 친할아버지 댁에 보내졌다.


나는 일곱 살쯤부터 동생과 단둘이 전철을 탔고, 초등학생이 되면서부터는 기차도 둘이서 탔다.


우리 엄마의 강하게 키운다는 교육 철학 때문이었다.


물론, 처음 둘이 전철을 태워 보낼 때는 몰래 뒤 따라오셨다고.


목적지는 우리 집에서 전철로 약 한 시간 정도 걸리던 외갓집.


무려 두 번의 환승까지 해야 했었지만, 동생 손을 꼭 잡은 나는 제법 똘똘하게 길을 잃지 않고 제대로 목적지까지 향했다고 한다.


나 역시 그 기억이 남아있다.


내 손을 꼭 붙든 동생을 잘 챙겨야 한다는 긴장감. 전철을 잘못 타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던 것. 결국 외갓집이 있는 역에 도착해 마중 나온 외할아버지를 보던 순간 확 풀어지던 긴장까지.


휴대폰도 없던 시절, 뭘 믿고 애들 둘을 그렇게 보냈냐고 우리 엄마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도 많았다. 여전히, 많고.


그런데 그때는 또 분위기가 지금처럼 삭막하지 않았다.


지금도 좋은 사람들이 많기는 하지만, 각자 스마트폰을 보느라 사실 주변에 크게 관심이 있않으니까.


그러나 그때는 스마트폰은커녕 휴대폰조차 보편화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길을 잃은 애들에게 길을 알려줄 수 있을 정도로 친절했던 때.


엄마는 아마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믿고 우리 둘을 보냈을 거다.


생각보다 당찬 자기 딸을 믿은 걸 수도 있고.


아무튼 동생과 나는 둘이서 참 많은 걸 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게 우리가 친한 첫 번째 이유일 거다.






또 하나의 이유라고 한다면, 가장 예민한 시절에 떨어져 있었다는 점.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우리는 조금씩 싸우기 시작해 중학교 때는 참담할 정도였다.


집안 물건이 부서지고, 옷이 찢어지고, 몸이 상하고.


그러다 내가 17살이 됐을 때 갑작스럽게 유학이 결정됐다.


당시 동생과 나의 상태도 어느 정도 소강상태가 되기는 했는데 갑작스레 이별한다고 하니 동생도 마음이 이상했을 거다.


그러니 친구들과 즐겁게 놀며 보낼 수 있는 여름방학을 포기하고 나를 따라왔겠지.


영어로 가득한 곳에, 우리 둘은 또다시 내던져졌다.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고, 그 대화 속에 마음이 오갔다. 끊을 수 없는 혈연이라는 걸 나는 그때 느꼈다. 우리는, 많은 게 변해도 여전히 남매일 거라고.


그 말에 동생이 확신을 담아 "누나는 항상 내 누나잖아."라고 말해줬을 때, 아마 우리 관계가 거의 완성된 게 아니었을까?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동생과 나의 재회는 그로부터 2년 뒤였다. 2년 만에 밟은 한국 땅, 짧았던 두 달. 동생은 한창 입시의 노예였고, 나는 오랜만에 본 가족이 어색했다.


여러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된통 아파 열이 펄펄 끓던 날, 병원에는 가지 않겠다고 우기다 약 기운에 잠들었었다.


그러나 너무 아파서 깊게 잠들진 못했는데 그 때문에 동생과 엄마의 대화를 들어버렸다.


내가 몹시 아파 보이자 걱정하시던 엄마. 다시 돌려보내지 말까, 걱정까지 하시던 목소리.


그런 엄마에게 "억지로 보낼 땐 언제고 인제 와서 애매하게?" 묻던 동생.


몹시 순화한 말이긴 한데, 그 말이 엄마에게는 상처였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참 따뜻했다. 아마 당시 유일한 내 편은 내 동생이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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