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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Jun Feb 03. 2023

제5장: 우주와 삶 (26)

우주와 삶의 순환

이렇게 우주에게 필연적인 삶은 순환에 따라 순환의 가장 근본적이고 거대한 순환의 일부이자 순환 그 자체가 됩니다. 이는 삶 또한 4차원 시공간 순환파의 형태와 움직임을 갖는다는 것으로, 삶도 실체(빛 물질)와 확률(암흑 물질)의 순환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삶의 어떤 부분을 실체 또는, 확률이라고 할 수 있을 까요? 실체는 우주에서 지금 현재 직접 관찰함으로써 그 모습을 볼 수 있고 또, 직접적인 영향을 가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지금 이 순간 빛을 통해 서로를 인지하고 있는 모든 존재인 것으로서 삶에게 실체란 현재와 현재를 이루고 있는 공간이 됩니다. 


그리고 우주에서 확률이란 지금 당장 빛(실체)을 통해 그 존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고, 일방적으로 결정지을 수도 없지만 언제나 실체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금 당장 눈으로 그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언제나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서 삶에게 확률이란 과거와 미래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구분 지어질 수 있는 삶은 존재(시공간) 그 자체를 의미하는 우주에서 각각 실체와 확률을 의미하는 빛 물질과 암흑 물질의 형태와 움직임을 따를 것이며, 따를 때 비로소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는 삶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우주는 순환의 일부이자 모든 것을 초기화시키는 BigBang을 기점으로 빛(실체) 시공간과 암흑(확률) 시공간이 서로 끊임없이 상호작용함으로써 스스로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시공간 팽창과 수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때 서로에게 주고받는 상호작용은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반된 형태와 움직임을 가진 채로 서로의 존재를 끊임없이 증명하게 되고, 각각의 존재는 ‘하나’로서 최대/최소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시공간의 최대 팽창과 수축은 순환에 필연적인 요소이기에 우주는 상반된 모습/특징을 가진 빛과 암흑이 끊임없이 ‘하나’로서 순환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서로 완벽하게 상반된 형태와 움직임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순환/존재에게 애매한 중간 지점은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우주를 삶에 비춰본다면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생명의 탄생을 기점으로 자신을 포함한 다른 존재에게 일방적으로 결정되거나, 어떤 존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지속적으로 확실하게 알 수 없는 존재들과 상호작용하는 것이 삶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생명의) 삶이라는 존재가 반복적이고 수동적인 시간과 공간(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을 구성할 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으며, 이러한 점에서 고통스러워한다는 사실에 부합합니다. 또한, 실제로 모든 생명은 시공간이 제한될수록 그 시공간에 맞춰서 제한된 형태와 움직임을 갖게 된다는 점에도 부합됩니다. 즉, 삶이란 끊임없이 지금 당장 100%의 정보로 확신할 수 없는, 결정되어 있지 않은 무언가를 생각하고, 이행하고, 경험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삶은 결정되어 있는 상황을 주체적으로 인지하고 호기심을 통해 새로운 상황과 자극을 찾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삶(생명)은 보다 다양하고 새로운 경험을 통해 보다 성장하게 됩니다. 즉, 삶의 존재로 인해 결정된 시공간의 확률적 의의가 시공간의 존재로 인해 결정된 삶의 확률적 의의와 일치되는 것으로, 우주와 삶은 서로 ‘하나’의 확률을 순환으로 공유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삶의 존재로 인해 시공간의 최대/최소는 소수의 무한함과 함께 결정될 수 없으며 알 수도 없습니다. 분명 시공간이 갖는 질량의 한계가 있지만 그것을 물리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상대적 차이에 의해 어떤 존재도 결코 확인할 수 없기에 무한한 가능성으로 존재하게 되며 그 한계를 단정 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공간은 삶을 의미함으로써 ‘나’는 자신의 삶을 포함한 그 어떤 삶에 대한 한계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삶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 최소한 그 한계를 알 수 있으려면 그 삶의 입장에서 살아 있는 모든 순간들을 한 순간에 전부 볼 수 있어야 확인할 수 있을 텐데, 이는 빛의 상대적 특징으로 인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삶의 입장에서 모든 순간을 알게 되었다고 한들 모든 존재들의 관점인 객관적인 관점에서 그 삶의 한계(모습)가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삶은 우주와 함께 자기 자신을 통틀어 다른 삶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 결코 단정 지을 수 없으며 단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삶은 언제든지 더 큰 소수로서 더 오래, 크게, 밝게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끊임없이 더욱 팽창하거나 수축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우주와 마찬가지로 삶은 자신이 갖고 있는 상반된 모든 감정과 생각들을 ‘하나’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고통과 기쁨, 행복과 불행, 슬픔과 환희, 사랑과 이별, 성공과 실패 모두 서로에게 필연적인 존재인 만큼 하나의 순환으로 생각하면서 우리(실체)들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존재(=암흑, 감정, 생각)와 함께 생명으로써 최대의 성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어려움, 슬픔 등에 의해 무너질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그 모든 생각과 감정은 결국 성공과 행복, 기쁨과 사랑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정해지지 않은 확률로써 열려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BigBang과 같은 탄생 이후 무수히 다양한 우주의 모습처럼 삶은 결정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애당초 모든 존재는 확률과 실체의 중첩으로써 ‘하나’의 상태로 결정되어 있지 않기에 삶의 정의 내릴 수 있는 모든 상태는 이미 지금 이 순간 모두 중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모든 상태(확률)는 지금의 나(실체)를 기준으로 얽혀 있는 것으로, 삶을 정의 내리는 기준이 존재하지 않은 상태에서 삶은 오로지 나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나’의 삶이 어디까지 왔는지, 어떤 상태인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기준과 정보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나’는 삶을 언제든지 마음대로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원형의 4차원 시공간 순환파에서 지금의 모습과도 같은데 순환파는 모든 시간에 따른 공간이 원형으로 존재하는 만큼 지금이라는 찰나의 순간은 크기를 갖지 못합니다. 과거와 미래를 구분 짓는 선과 같이 존재함은 분명하지만 그 크기는 결코 알 수 없고 정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반대로 생각하면 지금이라는 존재는 모든 형태와 움직임을 가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과거와 미래의 형태와 움직임을 지금의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으로 미래에 더 큰 영향을 받을지, 과거에 더 큰 영향을 받을지, 아니면 지금의 주어진 상황에 집중할지 선택하면서 삶을 정의하는 순환의 형태와 움직임을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주체적인 생각과 결정으로 만들어진 모습에 따라 삶이 변화되고 정의되는 것이며, 이는 우주와 자연의 섭리에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삶은 언제 어디서든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새롭게 정의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상태로 결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주와 순환은 삶이 결코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순환과정을 보면 BigBang 직후 기본적인 입자에서 서로 뭉쳐지고 분열되면서 두 개 이상의 은하가 존재할 때, 암흑의 척력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암흑의 척력은 시공간을 최대로 팽창시키는 요인으로서 순환에 필연적이므로 두 개 이상의 은하이자 시공간은 우주에게 있어서 필연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암흑의 척력과 함께 시공간은 순환을 이루게 되고 무한한 가능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주의 모습은 생명의 탄생에 부합됩니다. 지금 존재하는 모든 생명 또한, 초기 단세포 생물에서 시작하여 분열과 결합을 끊임없이 이루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이루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들은 주어진 환경에 영향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무한한 가능성(지속가능한/순환가능한 가능성)을 가진 변화를 시도해 온 것입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삶의 다양성과 개체를 효과적으로 늘릴 수 있었으며 우주의 BigBang 이후 모습과 같이 삶은 단순한 존재에서 다양하고 수많은 존재로 변화되어 온 것입니다. 이는 우주와 마찬가지로 삶에게 있어서 다른 삶이란 필연적이며, 이들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할 때 삶은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삶은 은하로서 ‘하나’의 우주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수많은 우주이므로 각각의 삶은 분명히 다른 수로서 서로 필연적인 관계에서 다르지만 하나의 수 체계를 공유한 채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모두가 같은 블랙홀, 즉 빛과 암흑의 순환을 갖고 있으면서 기준(원점)이 다를 뿐이며, 그 원점은 결정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서 끊임없이 다른 원점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는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는 자신의 삶과는 다르게 다른 생명의 삶은 내가 결정지을 수 없다는 것과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것에 부합됩니다. 동시에 이러한 상황과 존재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변화되는 삶에도 부합됩니다. 지금 나의 선택과 행동으로 인해 다른 삶들의 형태와 움직임이 어떻게 변화되는지는 전혀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분명 영향을 주고받아 변화한다는 사실에서, 나의 삶에게 타인의 삶은 나의 삶이라는 우주 안에 존재하는 은하이자 완전히 기준이 분리된 다른 우주이기도 한 것입니다. 즉, 나의 삶(우주)은 지금 분명히 존재하는 실체로서 갖고 있는 수많은 은하를 통해 타인의 삶과 필연적으로 공존하면서 그들의 삶과 상호작용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 은하이자 삶은 온전히 타인의 삶 그 자체를 이루고 있지 않은 것으로 엄연히 타인과 나의 삶은 각자의 우주를 이룬 채 불확실한 존재로서 구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의 삶을 무수히 다양한 다른 삶과 함께 결정하면서 확률과 실체의 순환적 상호작용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림 146

*위의 그림처럼 나의 삶과 다른 삶은 우주/다중우주를 통해 확률과 실체의 순환을 이루고 있다. 형태와 움직임에 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서로의 존재를 끊임없이 증명하는 것이다. 각자가 서로에게 실체와 확률이 되어서 온전한 순환을 이루는 것으로 다중우주와 우주의 존재는 타인과 내가 서로에게 엄연히 분리된 존재이면서도 하나로 순환할 때 온전히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즉, 삶(우주)에게 있어 정해지지 않은 확률로서 존재하는 무수한 타인의 삶(우주)들은 모든 것이 결정된 순환과 함께 함으로써 우주의 형태와 움직임을 담아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히 다양한 삶은 삶이라는 존재 그 자체에 필연적이며 하나의 삶이 모든 삶을 순환으로서 정의할 수 있을 때 그 삶은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결정한 나의 삶이 타인의 삶을 순환으로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 삶은 결코 온전히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타인과 함께 확률적이니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주체적으로 ‘하나’로서 결정할 때, 그리고 이 삶이 다른 삶을 증명할 수 있을 때 나는 순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삶은 우주가 BigBang에서 유일한 블랙홀(모든 존재의 구분점이 모호한 존재)로 변화되듯이 탄생 이후에는 빠르게 변화되지만 시간이 흘러 황혼이 도래하게 되면 점점 변화의 속도는 줄어들고, 보다 정적인 상태에서 독립적으로 마무리됩니다. 유일한 블랙홀과 같이 삶은 자체적인 죽음을 통해 다른 존재와 구별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다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으로, 삶은 순환으로써 끊임없이 무한한 가능성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삶이란 시공간과 함께 ‘하나’의 순환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 우주에서 삶이란 순환에 따라 불확실한 확률을 가진 채(다른 삶과 함께) 스스로를 계속해서 결정하여 변화시킬 때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존재하게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삶은 지금의 나로부터 분명하게 결정되고 불확실한 타인과 함께 과거와 미래가 확률로서 존재할 때 온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내가 결정짓기 전까지는 타인과 과거, 미래의 영향은 실체가 아닌 확률적인 것으로 그것을 나의 삶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선택과 결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순환으로서 존재하기에 끊임없이 ‘하나’의 상태를 갖지 않으며 끊임없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는 타인을 포함해 자신의 삶을 ‘하나’의 상태로 단정 짓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함께 (생물로서) 성장을 위한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러한 나의 삶이 타인의 삶을 정의할 수 있어야 하므로 삶은 개인의 행복만이 아닌 타인과 함께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고 같이 변화/성장할 수 있을 때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삶이란 그 한계를 단정 짓는 것이 아니라 정해지지 않은 확률로서 타인과 자신의 상태를 정의하면서 끊임없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여지를 찾고 시도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런 삶에서 만이 한정된 시간 속에서도 무한한 삶의 가능성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삶과 시공간은 하나의 순환을 이루면서 한정된(유한한) 실체와 한정되지 않은(무한한) 확률이 모순 없이 하나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증명 조건을 충족시키는 삶일 때 ‘나’는 비로소 행복을 느끼고 그렇지 않을 때 불행을 느끼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이러한 사실을 무시한 채 단순히 주관적인 생각으로 순환에 어긋나는 삶(자신의 삶의 존재를 부정하는 삶)을 살 경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알 수 없게 되어, 분명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모순 속으로 불행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자연경관을 보면서 느낀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은 너무나도 완벽한 존재에 대한, 너무나도 닮고 싶은 사람에 대한 존경심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본 그 존재들은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삶의 본질적인 정의는 항상 지금 당장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고 확신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나의 삶을 찾고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내 주변에 있는 사실과 존재에 관심을 갖고 끊임없이 상호작용할 때 비로소 삶을 온전히 알게 되고 증명가능한 즉,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내 주변에 존재하는 완벽하고 아름다운 순환적 조화/존재들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알고, 이들과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삶의 존재 이유를 잃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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