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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탱구 Sep 03. 2022

낯선 곳에서는 사랑하는 것들을 만들곤 했다

의미 부여의 순기능

낯선 곳에서는 사랑할 만한 것들을 만들어보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학창 시절, 3월을 가장 두려워했습니다. '새로움'에 빠르게 적응하는 편이 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학기는 작년 교실을 그리워했습니다.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을 보면 한동안 보지 못했던 소꿉친구를 만난 듯 기뻤습니다. 옛것에 집착하는 만큼, 새로운 교실, 새로운 친구들에게 마음을 줄 여유는 사라졌습니다. 낯선 것이 어느새 익숙한 것이 되어 마음에 자리 잡을 즈음에는, 다시 이별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1년을 쳇바퀴처럼 돌고 돌았던 어느 날,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살아보고자 시작했던 게 지금 이 순간, 저의 주변을 채우고 있는 것들의 긍정적인 모습을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야말로 가장 좋은 대상이었습니다. 매일 친구들의 장점을 하나씩, 둘씩 발견했습니다. 매일 친구들이 건넨 사소한 배려를 되새겼습니다. 친구들의 좋은 점을 알아가려는 노력이 그저 '현재가 과거에 비해 나쁘지 않다'를 넘어 그들을, 현재를 사랑하기 위한 노력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유홍준의 저서 <안목>의 한 구절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림의 묘미는 잘 안다는 데 있으며 알게 되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나니 그때 수장한 것은 한갓 쌓아두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대학생이 되면서 '원하지 않는' 새로움은 굳이 겪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주어졌습니다. 입대할 즈음에는 낯섦에 적응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조차 잊어버렸습니다. 대부분의 '입영 장정'들이 그럴 테지만, 저 역시 입대 직후 상당한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26년간 그려왔던 군대에 대한 최악의 시나리오가 눈 앞에 펼쳐질 것만 같았습니다.​


의외로 신병교육대대에서의 생활은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제가 소속된 생활관을 훈육하셨던 조교님은 단지 조교와 훈련병이라는 수직관계를 넘어 군대 생활 전반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서 저희를 품어주셨습니다. 함께했던 생활관 동기들과는 헤어지는 순간 눈물을 쏟을 정도로 정이 들었습니다. 전입 시점에 와서 신교대는 학창시절, 1학기 때 그토록 그리워하던 '작년'이 되었습니다.

일상에서 점차 지워져 가던 습관이 등장한 시기는 자대 전입 직후였습니다. 이 습관을 상기시켜준 것은 바로 '감사 나눔 운동'이었습니다. 포상휴가를 얻기 위해 1,000 감사 노트를 작성해야 했고, 저녁점호 때마다 돌아가며 '2 칭찬 3 감사'를 발표해야 했습니다. '성가신' 이 운동을 통해 간부님, 선임병들의 장점을 찾아야 했고, 그분들이 저를 존중하고 배려해주셨던 모습을 되짚어보아야 했습니다.

감사 나눔 운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존중이고 배려인지도 모른 채 지나갔을 사소한 것들이 제 의미를 찾아갔고, 찰나에 그쳤을 감사함의 온도가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우리' 부대원들에게, 우리 공간에, 각자가 우리로 묶여 있는 이 순간에 정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감사 나눔 운동은 부대 분위기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온 것 같습니다. 전역한 친구들에게 들었던 군대 이야기와 달리, 제가 선임병으로부터 받은 것은 '내리 갈굼'이 아니라 '솔선수범'이었으니 말입니다.


전입 이후 접했던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입대 직전, 대학 동기가 힘내라며 보내준 한 격언이 떠올랐습니다.


한 시절의 인연은 다음 시절을 인도하는 매개체이다.


병사들에게 군대라는 시절은 원치 않은 시기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절이 삶에 어떤 조각으로 작용할지는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을 것입니다. 먼 훗날, 이곳이 저에게 갖는 의미가 무엇이었다, 하고 정의할 때 되짚어볼 것은 어떤 업무를 수행했는지, 어떤 훈련을 받았는지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했는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곳에서의 시간이 1년 남짓 남은 만큼, 앞으로도 이곳에서 다양한 인연을 만날 것입니다. 그 인연들이 모두 '좋은 사람'일 것이라고 확신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들과 함께한 이 시절이 전역 후 펼쳐질 수많은 시절에 있어서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조각인지를 결정짓는 건, 그들이 어떠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제가 그들을 바라보는 태도에 달려 있을 것이라고, 운동에 참여하면서 생각하게 됩니다.


2020년 여름 어느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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