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머리를 쓰는 사람
2007년부터 지금까지, 가장 좋아하는 연예인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 소녀시대다. 그 중에서도 한 명만 뽑으라면, 태연이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냐는 물음에 태연이라고 자신 있게 답한 시기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전까지는 그녀의 노래에서 감성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영석이 데뷔 3년 차인 태연을 두고 "이혼 일곱 번 한 사람이나 녹여낼 수 있을 법한 감성을 지녔다."라고 말한 걸 보면, 그녀가 감성을 녹여내지 못했기 때문이라 치부하기는 어렵다. 나의 EQ 발달이 다소 느린 탓도 있을 것이다.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의 느린 박자에 서린 감정을 20대의 끝자락에 와서야 음미하기 시작했을 정도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최근 발표한 곡들에게서 감성을 만끽할 수 있는 지금도, 과거의 곡들에서는 '이혼 일곱 번 한 사람의 감성'을 느낄 수 없다. 무엇이 달라졌는지 비교해보니, 좀 더 섬세해졌다. 유영석 같은 전문가뿐만 아니라 나처럼 무딘 사람에게도 마음이 쉬이 전달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술을 다듬어 온 것이다.
한때 머리를 쓰는 사람보다는 마음을 쓰는 사람이 좋다는 말을 하고 다녔더랬다. 그런 나를 사람들이 어여쁘고 가여쁜 시선으로 보았을 것을 생각하면 부끄럽다. 그 말은, 살면서 한 번도 마음만 쓰는 사람을 경험한 적 없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는 머리를 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너무나도 영악하기 짝이 없어서, 서로가 그 영악함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초래될 것임을 뼈저리게 알기에 정공법만 썼던 사람들. 나는 운 좋게도 그러한 힘의 균형에 노출된, 천진난만하게 웃고 떠들어대던 어린 아이였다.
내가 마음을 쓴다고 착각했던 사람들은, 마음을 쓰기 위해 머리를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들이 머리를 쓰고 있음을 전혀 몰랐던 건 아니다. 저만큼 쓰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도 이처럼 행복한데, 저보다 덜 쓰는 사람하고는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꿈을 품었던 걸 보면.
행복은 머리를 쓰는 과정에서 훼손되거나 작아진다고 착각했다. 머리를 쓴다는 건 그들의 마음을 나에게 전달하기 위한 방법을 궁리한다는 신호였고, 이는 너와 내가 분리된 존재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너와 내가 하나되지 않음을 자각하는 순간이 싫었다. 그것이 나의 행복을 제약하는 것이라 믿었으니까.
근래에 와서 '머리보다는 마음을 쓴다'는 명제에 근접한 사람들을 다수 만났다. 기함할 만한 사건들을 수 차례 마주하고,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전락되고, 내 세계가 와장창 깨진 끝에 깨달았다. 말 그대로 깨우쳐 다달았다. 선한 의도를 품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선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음을. 선한 의도를 바르게 옮길 방법이 수반되지 않으면, 그러한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그것은 악으로 발현되기 쉽다.
어려서부터 우리나라 일류 회사에 발탁되고, 그 안에서도 1등을 도맡아 하던 사람조차 십수 년에 걸쳐 머리를 쓰고 있다. ‘감성 보컬리스트’ 수식어의 바탕에 있는 무수한 표현기법들은 그녀의 마음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게 아니다. 마음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머리를 써온 결과다. 머리의 산물이다. 마음을 표현하는 게 업인 사람조차 그러한데, 하물며 보통 사람은 어떠할까.
여전히 너와 내가 하나되는 환상을 그려본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더 이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