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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탱구 Aug 15. 2023

운명이라 믿었던 그 모든 순간이 샛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동창이 징역을 살았음을 유튜브를 통해 알게 되었다. 놀랐다. 연락이 끊긴 지 오래 되었지만, 인연이 닿았던 사람들 중에 범죄자가 있다는 사실이 낯설다. 함께 공부하던 다른 친구들은 그런 이들을 잡고 사실을 까발리고 형을 내리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 그 느낌을 가중시킨다. 그리고 이 사소한 소식이, 갈팡질팡했던 나의 이십대 후반을 정리하는 하나의 사건임을 직감했다.

지인 중에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본인의 할아버지가 안암의 모 대학을 나오셨고 집안을 일으키셔서 지금의 부를 일구셨다는 얘기를 했던 사람이 있다. 그 친구에게 혈연 상 유래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나는 그 말을 학력에 대한 열등감의 발로로서 해석했다. 왜냐하면 내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학력이 없거나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도전하던 장기간의 수험 생활동안, 나에게 결핍된 그것을 채웠던 것은 관계적 자아였다. 나는 어느 학교를 나온 누구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하지만 이 인적 환경이 나를 구성하는 객관적 사실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나는 분명 어느 대학을 나온 누구의 손자이고 자녀이며 조카이고 사촌이지만, 내가 나온 학교는 오로지 정릉에 있는 모 대학이다. 내가 내 발로 누리며 나의 시간을 채운 곳은 오로지 그 학교뿐이다.


​그렇다면 모교가 나를 구성하는 객관적 사실이 되는가 하면, 이도 애매모호하다. 모교의 위상이 달라져 나를 포장하는 종이가 갑자기 금으로 치솟거나 흙으로 부서진다고 한들 내가 그곳에서 쌓은 내용물에는 변함이 없다. 더 나아가서 재학 시기가 나와 같았던 이들이 모두 출세하여 부와 명예를 거머쥐게 된다고 한들, 그 사실이 “그러므로 나 또한 성공했다.”라는 문장으로 귀결될 수는 없다. 그들이 걷기로 결정한 선택지와 써 내려간 이야기들이 나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한 개인을 이루는 조건들과 각종 사건 사고들이 그 개인을 대변해줄 수 없다. 분명 주어진 맥락이 한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삶을 결정 짓지는 못한다. 운은 단지 어떠한 흐름일 뿐, 그 흐름을 활용하여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주체는 오롯이 그 개인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얼마나 가꾸어 왔으며, 그리하여 나와 마주하고 있는 지금, 어떠한 선택을 하고 어떻게 풀어내는지만이 그를 설명할 수 있는 단서이다.


신은 그저 질문하는 자일 뿐, 운명은 내가 던지는 질문이다. 답은 그대들이 찾아라.

김은숙,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 중에서

그러므로 어떤 이의 그름을 향한 한 걸음을 두고 그의 가정사나 어린 시절 비극에 따른 결핍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이라 헤아릴 필요가 없다. 누군가 비극을 경험한다면, 그 개인의 의사와 무관한 일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경험을 자기 자신과 통합하여 약자를 배려할 것인지, 혹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배척하여 약자를 짓밟을지 여부는 전적으로 그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 선택은 결코 불가피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 누구도 요구하지 않았던 이러한 헤아림을 역지사지하여 나의 부족함을 수용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정신과 의사가 아니고서야 나와 관계한 사람과 기관, 그 상황 속에서 경험한 각종 사건 사고들을 모두 헤아리면서까지 나를 이해할 의무가 없다. 그리고, 그러한 헤아림 없이도, 나를 이루는 맥락을 배제하고서도, 나는 내 선택과 행위만으로 내 가치를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운명이라 믿었던 이십대 후반은 마지막 반년을 제하고는 모두 샛길이었다. 그럼에도 이 방황이 가치 없었다고 결론 짓지 않을 것이다. 나를 하늘로 데려다 줄 거라 굳게 믿었던 논술이 당장의 입시에는 전혀 쓸모 없었지만, 이후 삶의 궤적에 여러 기회와 성취, 도락과 쾌적함을 안겨주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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