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이 지나간 자리
처갓집양념치킨을 처음으로 주문했다. 우리 아파트 단지에 홍보 차 가끔 오던 걸 얼마 전에 한 번 사 먹은 적이 있는데, 맛이 기가 막히더라. 그 맛을 생각하면서 방문포장을 해 왔다. 기대에 조금 못 미쳤다. 그 말을 입밖으로 꺼내려는데, 어느 장면이 스치듯 지나갔다. 아주머니라기보다는 할머니에 가까운 두 분이 서로 깔깔 웃으시면서 일하시던 모습. 내가 말을 내뱉는 것이 마치 그 장면이 담긴 도화지를 찟어버리는 짓이라도 되는 것마냥 멈칫하다가 침묵을 이어갔다.
요즘 자주 읽는 글이 있다. 어느 한 분의 일기 한 편이다. 평소에도 취미 삼아 다른 사람들의 글을 반복해서 읽곤 하지만, 이번에는 한 구절이, 단어 하나까지 깊이 공감되어서 그곳에 머무르고 있다. 마치 그 구절이 며칠 전까지 겪었던 소용돌이의 자질구레한 찌꺼기까지 완전히 소화한 후 쓰기에 적합한, 아니 써야 마땅한 내용인 것 같달까. 우연인지 필연인지, 오늘은 그 아래 구절까지 읽었다. 나도 남이 아니라 나에게 집중해보겠다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리려고 하는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더라. 그나마 떠올릴 만한 건, 남의 글을 읽거나 뜬구름 잡는 소리를 써대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동안 시험이니 날씨니 온갖 핑계를 대서 미루었던 의식을, 며칠 전부터 다시 시작했다. 내 사주팔자는 내 성격만큼이나 애매해서 경계시에 애매하게 걸쳐 있다. 애매함의 한편에는 세상을 휘어잡을 서슬퍼런 장군감이, 다른 한편에는 꽃 보고 풀 보며 세상은 아름답다는 헛소리나 해대는 곱디고운 소년감이 자리하고 있다. 내가 다시 시작한 의식이라는 건, 막장 드라마 오프닝 BGM을 틀어놓고 나를 전자라고 각성하며 산책하는 따위의 것이었다.
내가 저리 순해서 어쩌나 걱정했던, 나보다 다섯 살 어린 친구가, 다름 아닌 나를 위해 거칠어져 가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사건을 치르면서 무의식적으로는 내가 후자일 가능성이 농후함을 직감했으면서도, 의식적으로는 친구의 변화가 내 계략의 결과라고 소설을 쓰며 스스로 정치질에 소질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요 근래 치른 폭풍이 다른 이들에게는 기껏해야 소나기밖에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회피할 수 없게 되자, 나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냉혈한이 아니라 친구 자취방 이불 색깔에서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이끌어낼 수 있을 만큼 대가리 꽃밭인 사람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막장 드라마 오프닝 BGM을 끄고, 아무 노래나 틀었다. 그때부터 산책길에 흘러나왔던 노래들은, 아마 장군감이 아니라 소년감들에게 어울리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 BGM'이었던 것 같다. 좀 더 평화로워졌다.
새로 개척한 산책길 끝에는 광명역이 있다. 새벽 같은 동네다. 재개발되어 판교신도시가 떠오를 법한 외양을 하고 있지만, 아직 활성화되지 않아 여유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카페에 들어갔다. 이 부근 가장 유명한, 특색 있는 카페가 아니라 볕 잘 드는 곳, 사람 오가는 걸 구경할 수 있는 곳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킨 뒤, 통유리 벽 바로 옆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멍 때렸다. 찾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무용지용. 한량 같은 일을 좋아했다. 이전 시절하고도, 다음 시절하고도 이어지지 않고 분절된 시절, 자그마한 사회. 그곳에서 주간 앞 근무자를 위해 5분 일찍 근무에 들어가는 순간이 좋았고, 주간에 고생해서 피곤할 야간 뒷 근무자를 위해 조금 더 근무를 서는 순간이 좋았다. 매점에 가서 사무실 짝꿍과 나눠먹을 간식거리를 고르는 순간이 좋았고, 야근하는 친구들에게 선물할 야식거리를 고르는 순간이 좋았다. 보급된 부식을 친구들이 먹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사무실 한쪽에 진열해두는 순간이 좋았고, 일명 '삼겹살 파티'를 앞두고 상사를 따라 장 보러 가서 친구들과 같이 먹을 반찬거리를 고르는 순간이 좋았다.
사람을 이해하는 일. 관찰하고, 점(點)들을, 좋은 점이나 나쁜 점이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을 이루는 점들을 하나하나 발견하고, 어쩌다 지금까지 이르게 된 유래를 알게 되고, 그 유래에 따라 점들을 이어서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보는 일. 며칠동안 마치 한 친구만을 두고서 그런 일을 했던 것마냥 말했지만, 사람 좋아하는 내가 과연 한 사람만 가지고 그랬겠는가. 그 친구가 지금 대단해진 건, 고작 말 한 마디로 인해서였다. 인정하지 않았지만, 고작 말 한 마디에 한 사람이 매일을 차지할 만큼, 그 사건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알고 보면 사소했으나 굳이 에필로그를 써 보겠다고 바람을 불어넣어 풍선처럼 커져버린 새로운 사건은, 훼손된 지난 날의 풍경을 복구하기 위한 발악의 결과였다. 말 한 마디 잘못 내뱉어 새 사건의 당사자가 된, 아니 그 전에 막을 내린 본 사건의 당사자마냥 되어버린 친구에게 진정으로 바랐던 건, 망쳐버린 그림을 고쳐달라는 게 아니었을까. 그 친구가 뭘 할 수 있겠나. 그림을 그린 이도, 망친 이도 본인이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망친 이들이 돌아와 용을 쓴다한들, 그림을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복구할 수 있을까. 그러니 당시 내 손을 잡아준 친구들을 회상하고, 그 이전과 이후의 복된 인연들을 거론하고,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자랑하는 유치한 방식으로 망친 이들을 향해 칼을 겨누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이제서야 그들을 위로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니라, 그저 소란했던 시절에 함께 있었던 당사자로서. 그리고 한때 아름다웠던 그림 한켠에 자리해주어 나의 기쁨이었음에, 진심으로 감사를 보낸다.
소란했던 시절을
뒤로 하고,
결이 다른 시절로
나아가고픈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