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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단지살롱 Jun 21. 2024

타자기미니에세이

누구에게나 소설 일기_책방 세레나데_에세이소설

기계가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다 설명해도 안 된다. 광역시 이상의 상상력을 발휘하기 힘들어도, 억울한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또는 개인의 선택을 넘어 구조를 정의롭게 안전하게 구축하도록 공감을 넘어 상황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너와 나와 그 더 많은 반복된 관계의 틀을 훼손하지 않으려면. 어느 순간, 진실이라는 것을 넘어 그 이면 너머 다가가는 방법과 전문가적, 인간적 태도의 적정성을 상실하면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는 재주는 인간에겐 없다. 모든 것을 다 설명해도, 분명히 그것에 대해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을 다 담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다 담아낸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온전히 구에 가까운 다면체의 이해를 주고받기 어렵다. 제품도 설명서는 안 읽고 직관적으로 제품 사용을 이해하게 만들어야지 하며 그 자체를 이리저리 작동해 보는데 , 온갖 무드의 안개가 피어올라 형성되는 언어의/비언어의 의사소통이면서 비의사소통인 것이 당연한 도달 지점인 각자의 이야기/삶에 대해서 어떻게 전면적인 설명과 받아들임과 그 순환이 가능하겠는지. 기계와 인간이 인간 사회를 위해서 어느 정도의 비율로 배합했을 때, 보이는 것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하고 밀어붙일 수 있을까. 다 보이지만, 다 말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다. 진실의 퍼즐을 맞출 의지 이상의 것이 피어나기 시작할 땐, 이미 진실이 뭐가 중요한데라는 상태로 진입한다. 인위적인 인공 강우 같은 날씨 같은 진실이란 무엇일까? 현실, 삶에서 가장 참인 부분을 말할진대,  참인 부분의 조건은 무엇일까. 그 조건은 누구에게나 참일까. 어떤 상황에서도 참일 수 있을까.  진실이라는 것에는 품을 여지가 많은 것이다. 그런데, 진중하게 품지 않고 품만 펄럭거리면서  정한 진위를 따지는 진실을 가장한, 진정한 전문가는 진실을 구하는 게 아닐진대, 내가 퍼즐의 완성된 그림을 안다하더라도 그게 뭐가 중요한가. 네 명의 영주가 있다. 조금 가까운 범위 내의 사람들에게 옆에서 일하는지라 서로 힘들게 목 아프게 번 돈임을 아는데, 그 돈으로 생일케이크를 챙겨주는 웃는 영주. 웃는 얼굴의 영주 시대에 QA급 뻔한 소리급 독려라 하는 영주. 이모 고모도 다 따로 살고 공동체는 와해됨을 넘어 배타적이지 않음을 지향하는 공동체조차 이상하게 인식하기도 하는 시대에 매번 보고 사는 공동체가 필요할 것 같아서 알게 된 영주. 그리고, 내가 아는 영주 중에 또 영주가, 하다가 생각난 초등학교 시절  친구 사이에서 키도 크고, 얼굴이 선해 품이 달라 뭔가 다른 세계 표정 같은 영주. 네 명의 영주가 있었다. 있을 것이다. 있다. 그 네 명의 영주도 진실에 다가가는 방법에 대해서, 진실 자체에 대해서 고민해 보는 상황이나 삶을 살 것이다. 살았을 것이다. 산다. 네 명의 영주를  마치 커피 맛을 신맛, 고소한 맛으로 대중의 시시비비가 힘들어 흑백으로 구분한 것처럼 구분하자면, 포퓰리즘의 따뜻함/대중화된 또는 대중화되어 외면당하는 박스의 무미/어쩌면 자신도 소외되었는지 모르는 공명심의 따뜻함/아마 그 선함이 어디 먼 곳으로 향했을 선함처럼 네 가지 코드이다. 이 네 코드를 하나의 영주로 결합하려면, 힘들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방법 중에 가능한 방법이 한두 가지 정도는 있을 수 있다. 다만, 완벽한 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멈추어 서서 정형성에 빠진다면, 한두 가지 발견의 의미가 무색하다. 분명히 이 카페에는 다양한 촉감의, 맛의 커피원두가 마련되어 있고 , 주인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손님? 들의 지나친 언사로 같은 언어로도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것에 지쳐, 다들 신맛, 고소한 맛으로 아예 글씨를 써 붙이고, 그 아래 조그맣게 포기하지 못한 느낌에 호두맛이라든가, 과일, 꽃향, 초콜릿 등의 글씨가 따라붙는 것일 테다. 이를 테면, 언젠가 나도 롱블랙을 알고 있으면서, 원하는 것을 설명하다 보니, 나중에 커피를 받아 와서 테이블에 앉아보니 아, 내가 그런 진상손님이구나를 인지한 때 같은 경우, 그럴 거면 아메리카노를 주문해라와 같을지도 몰랐던 그때의 그 사람의 표정, 내내 짓던 열쇠 장면을 떠올린다. 그 장면들을 떠올릴 수 있는 능력은 계속 발휘되어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말로 설명해도 도리없이  산패가 일어나는 부분을  조립해서 약간의 상쇄는 되리라. 상쇄. 커피. 영주. 말. 비언어적 표현. 이미지. 열쇠. 소통이라는 단어로 구글링을 하니, 검색어를 고쳐보라는 메시지가 하나 뜨고 , 그와 관련성 웹 문서로 개인 블로그가 하나 링크돼 있어서 내용을 열어본다. 역시, 같은 영주, 다른 삶들, 비슷한 장면들을 잇지 못해 희미한 퍼즐의 형태로 조금씩 열쇠 장면들을 찾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태그를 심어 구글링을 해서, 동시대인이 동일한 상황에서 비슷하게 삶을 겪고 있다는 점에 사과가 된다. 불특정한 무엇에게 기도하듯이, 불특정한 사람에게 전하는 사과도 있으니까. 그리고 연결된 플레이스 정보로 링크해 지도 정보를 살펴보니, 현재도 간헐적으로 영업하는 가게안가게이다. 팝업을 하기도 하고, 여행을 가면 다른 주인이 팝업 아닌, 전체 운영을   하며  혼자 오는 손님이 주인이 되는 분위기로 운영된다는 방침은 일원화된 듯 보인다. 염화칼슘을 잔뜩 먹은 건지, 배기통을 날린 건지, 엔진이 진동 소리가 커졌지만, 오늘도 정비소는 패스하고 더 무거운 몸의 차를 끌고 가게안가게로 향한다. 실개천 옆에 위치하고, 옆에는 같은 동네에 계속 사는 듯하는 사람들의 주택과 가게가 집합된 골목이 사이사이 먼저 생겨 이후에 만든 도로 선에 있다. 마침, 운영요일이라 가게안가게는 예의 알려진 문손잡이에 노란 조명이 반짝 보인다. 내부에는 온라인 정보로 보이던 노란 불빛 대신, 하얀 조명이 대세 무드이다. 차를 떨어질 듯 실개천으로 바짝 세우곤, 책 하나와 사용하는 신용카드만 들고, 태블릿과 핸드폰은 차에 두었다. 한 시간은 로그아웃. 너무 적다. 왼쪽으로 미세요 문손잡이 레터링과 왼쪽으로 밀어야 하는 문손잡이 내력이 짧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문장으로 적혀 있다. 가게가 가게 주인이 바뀔 때마다, 문에 위치해 잘 자라는 나무를 키우고 키우다가, 여닫이문을 미닫이문으로 바꾸고, 그 여는 방향 또한 바꿨다는 문. 문을 살면서 왼쪽으로 밀려는 찰나, 가게안가게의 이벤트테이블로 들어갔다. 살짝 더운 날이 가시는 가을 색에 어울리는 치즈 고양이가 이벤트테이블을 이벤트 한다. 꼬리는 살짝 타자기의 타자발에 올라가서 요리조리 미세하게 털이 움직이는 것처럼 움직인다. 고양이와 타자기란 부제로  고양이엽서와 타자기 타이핑된 문구를 보석상에서 보는 유리 상자 아래 진열했다. 그중에 하나의 문장을 외워서 타자기로 타이핑해 보세요라는 미션을 제시하는 유리박스.  이벤트테이블의 메쉬 오프너를 밀고 나와, 가게안가게로 들어간다.  하얀 조명이 노란 조명과 함께 키오스크와, 육중한 책방메뉴판과, 태블릿으로 동선을 가리킨다. 키오스크에서, 크루아상과 온돌커피를 주문하고, 육중한 느낌의 옛날 레스토랑에서 쓰는 메뉴판에 책방의 이용 방법과 다양한 제안 사항을 받는다는 것 이외의 내용까지 촘촘하게 볼 수 있다. 태블릿은 전하고 싶은 내용을 누구나 송출하는 도구로, 주인이나, 손님이 핸드폰과 연결해 송출할 수 있고, 손님의 경우에는 관리자 확정 후 송출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불법적인 것만 아니면, 개인, 업장, 오늘의 일상의 요약 한 마디, 멋진 일상 사진 등을 태블릿에 송출해 원한다면 매거진처럼  경험할 수 있다. 치즈 고양이는 바깥에 한 마리가 있고, 가게안가게에는 유리통로로 고양이 두 마리가 대각선으로 끝 지점에서 따로 누워있었다. 아주 편안하게 사람도 저런 통로를 안 만들어주나 싶게. 누군가의 배고픔도 잊게 해 줄 것 같다는 갈색 공기 소파의 이미지가 그 태블릿으로 마침 송출되어, 그 갈색 공기 소파에 앉는데, 온돌커피와 크루아상이 테이블에 놓였다. 그 옆으로는 한칸책장으로 책이 3권 꽂혀있고, 옆에는 턴테이블과 타자기 테이블이 의자에 앉으면 부채모양으로 펼쳐진다. 온돌커피는 가게안가게의 시그니처제품으로  키오스크에서 초콜릿맛이 주로 느껴지는 신맛 위주로 골랐다. 온돌 티코스터는 마시는 30여분은 따뜻할 거라는 내용과 제품을 만든 시행착오의 과정과 제품이 하는 역할에 대한 작은 푯말이 하얀 쟁반에 함께 담겼다. 사용해 보고 나갈 때, 몇 개 구매해야겠군 생각하고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크루아상을 먹으려는데, 유리통로 고양이 두 마리가 턴테이블 아래, 타자기 테이블 아래 한 마리씩 두 마리가 테이블 다리 워머 마냥 딱 붙어 앉았다. 크루아상이 츄르가 아닐진대, 왜 하다가, 크루아상을 다 먹을 즘 고양이는 일어나서 내 옆에 눈이 마주치는 높이의 라탄 테이블에 올라가 앞발을 죽 뻗어 머리는 가게문을 몸은 나를 향해 앉아? 뻗어 있다. 고양이와 키오스크, 상호 송출되는 태블릿, 육중한 책방메뉴판, 고양이 유리통로, 문손잡이의 조명, 때에 맞는 운영, 일관된 운영 기본 방침, 세심하고 간결한 작은 푯말까지 보았는데, 설명을 다 들은 기분은 다음에도 이곳을 찾을 거라고 알려주는 신호이다. 웬만한 지구상 카페는 점심시간부터 북적이는데, 가게안가게는 혼자가는책방의 기능을 운영기본방침으로, 보장된 개인 영역과 보장된 조용함과 상호소통의 선택지가 펼쳐진다. 좀 더 정보를 찾아보고 싶지만, 이번엔 여기까지. 연속적인 삶에서의 질문에 누구에게만 달달한 정.답.을 제시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고 꼬일 수 있는 올은 하나하나 천천히 풀어놓은 것으로 충분하니까.  다음엔 바테이블에서 대면하는 시간과 바테이블의 뒤쪽 갤러리 테이블에 앉아 마련해 둔 그날의 텍스트키트를 체험해야지.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하고 일어나 설명을 하는 설명이 되지 않는 진실을 구하지 않는 진위를 구하고픈 곳으로 간다. 애니메이션 크루즈패밀리를 좋아한다. 사피엔스가 협력을 해서, 옷을 지어 입어서, 이야기를 좋아해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전 그전에는 동굴 안에서 자신의 혈족 이외에는 다른 종족을 보고도 공격받을까 우선 대치했다. 생각해 볼 일이다.


말을 잃은 적이 있다. 목소리를 갖고 있어도 말을 할 수 없었다. 말하고 싶은 마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내게서 말을 훔쳐간 것은 슬픔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되찾아올 힘이 내겐 없었다.

​그때 나는 마르셀 마르소를 만났다.

​무언극 배우인 마르소는 60년간 비언어로 이야기를 전달했다....... 긴 시차와 공간의 폭을 두고 살아가는 나도 마르소에게 기댈 수 있었다. 그가 지어내는 몸짓을 따라가다 보면, 말을 않고 지내는 시간도 덜 무서워졌다. 나의 슬픔도 모험 같은 것이라 느끼며, 하여튼 계속  걸었다

 

책, 시와 산책. 한 정원



'타자기미니에세이'는 과거 현재 미래에 그, 이, 저 '책방에 대한 세레나데'로 '에세이소설', '소설일기' 즘으로 지난 기억과  지금과 미래의 계획과 상상을 어떤 정서나 어느 인물 어떤 상황 속에서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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