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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Feb 04. 2024

결산

작년 10월쯤, 23년을 결산하기 위한 몇 줄의 글을 쓰다가 방치해둔 것이 생각나 글을 다시 펼쳤다. 당시에 왜 쓰다 만 건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분명 나의 게으르니즘과 귀차니즘이 한몫했을 것이다. 이제 2024년도 2월에 접어들었으니, 쓰던 일기를 완성해도 될만한, 당시엔 좀 감상적이었으니까, 지금이라면 좀 더 이성적으로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들고, 들어서 이렇게 일기를 이어서 쓴다. 이하 23년 결산의 일부는 작년 10월에 쓰던 것이고, 나머지는 지금 올해, 그러니까 2024년 2월의 초입에 완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둔다.


 




일하다 말고 갑자기 2023년을 결산하기로 했다. 결산이라니, 이제 10월인데, 그리고 이곳에 글 몇 개나 썼다고... 하지만 문득 그럴 때가 있으니까. 그리고 가을이니까. 가을 타는 남자. 그래서 글이 길어질 거라고 서두에 못을 박아두자. 자주 글을 쓰지는 않지만 글을 쓰고자 한다면 오디세이아만큼은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새벽이다. 일하기 싫어서 이런다.


22년이 인생 최악의 해였음에도 불구하고, 23년에 희망의 빛이 그다지 보이지도 않았다. '시간이 필요해'라는 말처럼 허망한 것도 없으리라. 다만 나의 장점이랄까, 어쨌든 그런 생각을 말로 내뱉지는 않는다. 필요한 말만 하고 사는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언어에 잠식당하지 않는 방법은 여러 언어를 습득하든가 언어를 멀리하든가 둘 중 하나다. 나는 둘 다 못해서 말을 많이 하고 말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22년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겠다. 글이 너무 길어지니까. 나중에 다른 지면을 빌어 썰을 풀지도 모르겠지만, 안 푸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아니면 다른 언어를 익혔을 때 푸는 게 나을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좌우간 이런저런 연유로 22년엔 굵직한 일들이 있었고, 스스로를 좀 고립시킨 한 해였다. 23년 결산의 서두에 당시의 정황이 그랬었다는 것만 슬쩍 밝혀둔다.  


1월은 추웠다. 이 한 문장만을 1월의 결산으로 남기면 좋겠다. 이런 식이면 시 한 편 분량도 나오지 않겠지만 1월에 대한 기억은 접어둘까. 거의 12월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남기기 위해 몇 장의 사진을 첨부하자면,  






1월 1일에 찍은 이 사진을 보고 있자니 좋은 감정과 좋지 않은 감정이 동시에 든다. 






나는 이미지로 기억하는 게 더 편한 사람이다. 이미지를 기록하는 사람이라서 그런가 보다. 두 가지 감정 중에서 좋은 것들만 글로 남겨야겠다.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더라도 즐거운 일은 날마다 있을 수 있고 사람은 언제든 웃을 수 있다. 유머를 잃으면 다 잃는 거다. 유머를 버릴 순 없잖아? 






하지만 이 사진을 보자 또 금세 우울해지는 건 어쩔.

좋았던 감정이 나쁜 감정에 바로 직결될 때, 그 좋았던 감정을 떠올리는 순간 나쁜 감정에 잠식당해 버린다. 불가분의 관계다. 좋은 것만 기억하겠다는 건 다짐일 뿐이지 당위도 아니고 사실도 아니다. 마음대로 안 되는 걸 다 알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걸 또 다 알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일 뿐. 뭐, 다 아는 사실이지. 

좀 더 하드를 뒤져 보자. 






그나마 책을 샀던 기억은 떠올릴 때마다 뿌듯한 기분이 든다. 하루키의 저 책은 약간 불쏘시개 같은 느낌도 들지만 재밌게 읽었다. 나머지 셋은 이걸 왜 아직도 안 샀지?라는 기분으로 샀던 책들이다. 이 사진을 끝으로 1월은 끝. 

모든 기억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 돼버린다면 기억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사진이 다 무슨 소용인가. 또 기록이 무슨 소용인가. 요령부득. 인생의 요는 무엇이고 령은 무엇인가. 






2월의 사진을 꺼내보니 좀 낫다. 모메꽃 책방에 들렀던 날이다. 나는 이위발 시인의 '지난밤 내가 읽은 문장은 사람이었다'라는 시집을 샀다. 이 책방은 이위발 시인 내외분이 운영하는 곳이다. 시를 쓰고 싶었던 적이 있는데, 예전엔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지만 요샌 그냥 말한다, 나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고, 하지만 노력이 일천하여 그러지 못했고, 사진을 찍는 사람이 되었다. 사진을 찍는 재능에 비하면 시를 쓰는 데엔 좀 더 많은 재능이 필요한 것 같다. 아니면 나한테 주어진 뮤즈가 나를 약간 착각하게 만들었던가. 나한테는 그렇다는 말이다. 

2월에 또 어떤 좋은 기억이 있을까.






흔히 마시멜로라고 부르는 사일러지 사진을 두고 가자. 겨울 들판은 그리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저 마시멜로는 정말 매력적인 피사체다. 이때 안동시와 미래문화재단에서 진행한 사업으로, 안동시를 비롯한 경상북도에서 숙박이 가능한 한옥을 망라하는 작업을 했었다. 100여 곳의 한옥 중에서 약 50여 곳의 한옥을 내가 찍었다. 특정 장소를 그렇게 후다닥 찍은 적은 없었기에 거의 모든 사진이 내 성에 차지 않았다. 하지만 일이었으니까, 뭐. 춥긴 추웠지만 몇백 년 된 고택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 작업은 나중에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어판으로 출간되었다.  






개중 몇몇 사진들은 제법 마음에 들어서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써먹을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안 올지도 모르겠다. 잊고 있던 10여 년 전의 사진이 문득 나에게로 다가와 심장을 쿡 쑤시는 경험을 숱하게 겪었다. 가끔은 사진이 어딘가에서 잊혀진 채 살아 숨 쉬다가 나를 찾아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을 느낀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걸 잊을 수 있다. 최소한 사진이 걸어오기 전까지는 그렇다는 말이다. 이 어찌할 수 없는 반추동물이여.






여긴 어디였더라. 굳이 찾아보지 않으면 구체적인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아니, 많지는 않다. 웬만하면 다 기억한다. 다만 기억을 모른척할 때가 있다. 오늘 왜 이렇게 솔직하니.






여긴 꽃숲이다. 






꽃이 숲을 이루다. 줄여서 꽃숲. 카페 이름 참 잘 지었다. 이승호 작가와 회의를 할 때 곧잘 찾는 곳 중에 하나다. 이게 2월 28일의 사진이다. 2월의 마지막. 당신 생각을 조금이라도 덜 할 수 있어서 2월이 좋다고 현택훈 시인은 시에 쓰기도 했다. 그의 첫 시집 '지구레코드'를 나는 무척 좋아한다. 






이승호 작가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저기 터널 끝에서 걸어오고 있는 사람이다. 판화를 전공하고 현대미술작가로 활동 중이다. 승호 작가님과는 21년도에 처음 만났다. 우리는 어찌어찌 얘기가 잘 통해서 몇몇 프로젝트를 같이 했다. 그는 일전에 가일서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11월에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 ACC에서 열리는 단체전을 준비 중이다. 좋은 작가이자, 좋은 사람이다. 또 다른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할 것 같다.






내가 살고 있는 의성이다. 내 고향이기도 하다. 인구 5만의 시골. 매년 인구소멸위기지역 1위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여름엔 매우 덥고, 겨울엔 매우 춥다. 이곳엔 14년도에 다시 들어왔다. 회귀본능 때문은 아니었고, 직장 다니지 않고 사진만 찍고 싶어서였다. 지갑이 가벼워질 때면 가끔씩 후회하기도 했다. 벌써 10년 가까이 살았군. 저기 멀리 우리 집도 보인다. 3월 20일의 사진이다. 






의성엔 성광성냥공업사가 있다. 대한민국 마지막 성냥공장. 공장 내 텅 빈 창고를 찍은 사진이다. 이곳은 13년도부터 모든 생산이 중지되었다. 지난 21년도에 이곳을 주제로 한 전시를 열었었다. 현재는 170여억 원을 들여 문화재생사업이 진행 중이다. 이곳에서 전시를 하기로 한 게 올 4월이었는데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최근 연락에 의하면 장마 이후 건물들이 너무 위험해서 내부에서 전시를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아무렴 어떤가. 

- 결국 예상보다 반 년이 지나 23년 11월에 전시를 하였다. 후술할 예정.






의성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돈키호테 읽기 독서모임에 가입하면 돈키호테 완역본을 준다고 해서 냉큼 가입했다. 책이 이렇게 예뻐도 되는 건가. 월1회 모임을 가졌는데, 미안하게도 개근하지는 못했다. 고의로 먹튀한 건 아니니 이해해 주시길. 책은 첫 모임 이후 끝까지 다 읽어버렸고, 몇 개월에 걸쳐 완독 계획을 잡은 다른 회원들과 속도를 맞춰 감상을 나누는 것이 좀 번거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미미커피의 미미. 모두에게 사랑받는 녀석이다. 이 녀석을 주인공으로 '미미와 미미'라는 책을 만들었다. 






학수네 책방에서 몇몇 회원들과의 파티. 즐거웠던 기억. 3월 31일이었다. 






역시 책을 사면 기분이 좋아진다. 대한항공 마일리지로 1만 포인트씩 할인받을 수가 있어서 이맘때 책을 제법 샀다.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이방인, 1984는 집에 있는데 왜때문에 또 샀다. 책이 예쁘잖아...






4월 1일. 만우절에 어울리는 사진을 찾았으나 마뜩한 게 없다. 찍는 걸 게을리했다는 것이다. 이날 구봉공원에서 벚꽃축제가 열렸다. 사진은 뜰채로 금붕어 잡는 놀이인데, 그곳에 온 모든 아이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5천 원을 내면 16온스짜리 카페용 컵과 뜰채를 주는데 거기다 원하는 만큼 금붕어를 담아서 가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컵의 용량에 한계가 있고 아이들이 아무리 많이 잡아도 부모가 말리기 마련. 어지간한 녀석들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었을 거라 생각된다. 어쨌건 간에 작은 풀장을 요리조리 쏘다니는 금붕어들은 예뻤다. 






 

4월 9일엔 의성군 걷기 대회가 열렸다. 추첨을 통해 엄청난 상품을 뿌렸는데 난 하나도 받지 못했다. 그럼 그렇지. 예전엔 걷는 걸 무척 좋아했다. 몇 번이고 했던 얘기지만, 부산진시장에서 남포동을 거쳐 태종대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해운대에 갔다가 대연동까지 걸어가서 찜질방에서 잔 적이 있다. 많이 걸을 땐 더러 그 정도로 걸었다. 카메라만 메고 있으면 길을 잃는 게 재밌었던 시절이다. 요즘은, 음... 3보 이상은 드라이빙이다. 






다들 알다시피 고양이는 연체동물이다. 






은점시문학회에서 진행한 시화전에 시를 두 편 제출했다. 조문국 사적지와 최치원 문학관 등 몇 곳에서 진행했다. 한데 현장에 가보니 내 시에 오타가 있었다. 두 편 다! 상심한 나는 집으로 돌아와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죽어버리고 마는데... 는 오버고 아무튼 원로시인 김은수 선생님께서 내 시의 약한 부분을 많이 짚어 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 여성대학발전회에서 발간한 계간지에도 세 편을 실었다. 실물은 아직 보지 못했다. 






봉양온누리터도서관이 새로 생겨서 들렀다. 색채에 관련된 몇몇 책을 훑어봤는데 심심풀이로 읽을만한 교양서적 같은 것들만 있었다. 의성도서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시골 도서관에서 너무 많은 걸 바랐나. 이후 색에 관련된 몇 권의 책을 샀다. 근데 아직 다 안 읽었네. 괴테도 색채론을 썼다는 사실.






4월 말. 문예회관의 지원으로 청소년 문화예술교육을 시작하기에 앞서 회의를 하는 모습이다. 이승호 작가와 나는 '아이템 원정대 ; 뜻밖의 예술'이라는 제목으로 청소년 대상의 문화예술교육을 기획했다. 미래의 고객을 양성하기 위한 포석이랄까. 예술에 눈 떠라 얘들아.






가일서가에서 대표님과 승호 작가님과 전시에 대한 사전협의를 하고 삼겹살을 구웠다. 4월 26일. 고기가 어떻게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지? 인생은 고기서 고기. 고기에 대한 얘길 하면 책 한 권 정도는 쓸 수 있다.






밤의 가일서가. 






불멍. 






4월의 놀이터. 

몇몇 사진을 뒤적거리다가, 그래 그냥 놀이터에서 4월을 마무리하자,라고 생각한다. 생략과 망각을 통해, 망각을 위한 생략을 통해 무수히 많은 말들이 버려진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글을 줄이다 보면 생각 또한 덜 하게 된다는 사실. 






5월 첫날에도 아이템 원정대를 위한 회의를 한다. 일주일에 2~3회씩 만나 몇 시간에 걸쳐 회의를 한다. 원대한 포부와... 큰 꿈을 안고... 회의비도 따로 없는데. 물론 이 프로그램 제목은 '반지의 제왕'에서 따왔다. 이 제목으로 하고는 둘 다 낄낄거렸다. 재밌잖아?






5월부터 경북문화재단에서 주관하는 경북예술로 사업에 참여하였다. 5월 3일, 오리엔테이션 하던 날. 경북예술로 사업은 예술인의 사회적 가치를 확장하고, 다양한 예술직무영역 개발을 통해 기업, 기관이 가진 이슈를 예술적 협업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사업이다...라는 설명이 나온다. 와, 거창하군. 이런저런 배경과 이런저런 목표를 위해 이런저런 예술인들이 기관/기업과 협력하는 사업이란 말이다. 생활비 벌려고 지원했다. 21년도부터 인연이 있었던 안동성좌원과 매칭되길 원했고,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의 예술가들이 성좌원과 협업을 하게 됐다. 








월 5회, 15시간 이상의 협업과... 뭔가 복잡한 규칙이 여럿 있었는데 벌써 다 까먹었다. 왼쪽부터, 나, 김주권(성악), 천병열(성악), 권대일(성악), 이정은(현대미술). 결론적으로 다들 열심히 참여하고 양보하고 애썼다. 예술가 다섯 명이나 모여서 별 탈 없이 진행되었음에 감사드린다. 






이쯤 되면 나도 지루하고, 보는 사람도 지겨울 테니 핵심 요약만 하면서 넘어가자. 과거에 대한 결산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 이래놓고 또 주절주절할 게 뻔한데...






5월 23일. 396커피컴퍼니에서. 

안동 가면 이곳에 들르시라. 






안동의 낙동강변에서.

모르는 사람처럼 연출하려고 했는데 누가 봐도 나인 줄 알 듯.






6월로 점프. 

아이템 원정대 ; 뜻밖의 예술 첫 시간이다. 초등반과 중등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시작했다. 아이들은 즐겁다. 일단 간식을 팍팍 준다.






6월 9일. 가일서가에서 열린 이정은 작가의 전시. 

일상의 사소함을 세련되게 표현하며 무한한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재주가 있다.






6월 14일. 수봉쌤과 이승호 작가와 함께 제주도 해비치 페스티벌에서 열린 문화예술 교육사업 통합워크숍에 참여했다. 역시 남의 돈으로 가는 여행이 제일 재밌다. 알찬 2박3일을 보내고 왔다. 대체로 인간은 스무살 이후 이런 호사는 다시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순간이 있는데, 실제로 그런 호사는 다시 오지 않는다. 지금 좀 편안하거나 즐거운 마음이 든다면 깊이깊이 이 순간을 즐기시라. 어차피 내일은 또 힘들다.   






6월 27일. 서울서 천영술 작가가 와서 하룻밤 묵고 갔다. 사진에 대한 것, 촬영, 현상, 인화, 그리고 책에 대한 것, 음악에 대한 것, 영화에 대한 것, 커피에 대한 것 등등, 다방면의 재밌는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다. 그리고 11월과 12월에 있을 전시에 대해 많은 아이디어를 주고 가셨다. 






7월 1일. 아이템 원정대는 순항 중이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재밌게 예술을 알려줄까. 아이들은 즐겁다. 

이틀에 걸쳐 결산을 하고 있는데, 지난 사진들을 볼 때마다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타이핑이 더뎌지곤 한다. 기억을 돼새기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다. 어쩌다 이 글을 브런치에 쓰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 되고 있는 듯하다. 창밖으로 시선을 잠깐 돌려서, 지금 2024년 2월 2일, 웨이브아트페어 부산에 참여하여 파크하얏트 호텔 1310호에서 글을 쓰는 중이다. 경치가 정말 끝내준다. 저녁을 먹고 바닷가를 한참 거닐다가 왔다. 춥고, 기분이 무척 좋았다. 자, 계속하자. 






또 7월 1일. 수업을 급히 끝내고 부산 영도에 달려왔다. 영도구에서 진행하는 '내일의 항해'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한 달을 이곳에서 보냈다. 첫날은 주차 자리를 찾지 못해서 고생을 많이 했다. 어쨌거나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임팩트가 강한 한 달을 보냈다. 처음에 작업 아이디어가 정리가 잘 안 되어 고생했으나, 마침 발터 벤야민의 책을 읽다가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의 작업은 다른 지면을 빌려 기록할 날이 올 것이다. 






28일을 마지막으로 의성에 돌아왔다. 주말을 보내고 오고 싶었으나 아이템 원정대가 날 기다리고 있으므로. 






8월 13일. 가일서가 주최로 초정서예연구원에서 진행한 '점, 선, 면으로 말해요' 행사에 참여했다. 초정 권창륜 선생님께서 참여자들에게 지도를 해주셨다. 청와대 인수문과 춘추관, 운현궁 현판 글씨를 쓴 서예가로 알려졌다. 지난달, 그러니까 24년 1월 27일 타계하셨다. 불과 일주일 전이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8월 21일. 겨울에 전시할 서궁갤러리에 들렀다가 천영술 작가가 운영하는 백투블랙에 방문했다.(지금은 문을 닫았다. 아쉽.) 맛있는 중국집에서 배불리 먹고 동작대교를 걸었다. 천영술 작가에게 말했다. "서울은 차를 갖고 오면 불편하고, 차를 안 갖고 오면 졸라 불편해요." 






복숭아 시즌. 

나는 농부의 아들이구나. 올해 냉해로 인해 작황이 좋지 않아 거의 모든 과일값이 겁나 비쌌다.






8월 25일. 성좌원 어르신들의 초상사진을 찍으며 많이 울컥했다. 한센병에 대해서 따로 포스팅할 날이 있을 것이다. 이 사진들이 그냥 묻히지 않길 바란다. 






9월 1일. 가일서가에서 이승호 작가의 '이승호 되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한 달 동안 매주 일요일에 참여자들과 만나 그림을 그리고 전시까지 하는 프로그램. 덩달아 나도 하나 그려서 전시했다.






아이템 원정대 아이들과 제주도 서귀포 퐁낭작은도서관 아이들과의 펜팔을 진행했다. 매년 꾸준히 하면 좋을 것 같다. 그러다가 기회가 되면 아이들끼리 의성에도 와보고 제주도에도 가보고... 뭐 그런 그림을 기대한다. 






9월 16일. 아이템 원정대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성과공유회를 열었다. 이날 원정대 아이들과 손님으로 온 아이들에게 탕후루를 선사했더니 다들 신났다. 나는 너무 달아서 하나를 다 못 먹었다.






같은 날, 성과공유회를 마치고 의성군청소년문화의집에서 진행한 청소년 뮤지컬 감상 프로그램으로 대구 달서아트센터에 '아이소포스의 네 번째 열쇠'를 관람하러 갔다. 공연이 끝난 후 배우들과 얘기도 나누고 사진도 찍었다. 나는 주최자로 간 게 아니고 사진 찍어주러 따라감. 우측에 이 수업을 진행하는 곽혜령 성악가의 모습이 보인다. 






9월 17일. 예술로 사업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성악가 김주권 쌤의 카바리움에 들렀다. 국내 1호 카바레티스트. 카바레의 역사에 대해 한 시간 정도 강의를 들었다. 처음 카바레는 지하 선술집에서 시작되었다. 시인들이 예술과 사회를 시로 풍자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아리스티드 브뤼옹이 노래를 하기 시작하면서 최초의 카바레티스트가 되었다. 이후 카바레에서 물랑루즈가 파생되고, 독일로 넘어가면서 사이코드라마가 되었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스탠딩 코미디가 되었고, 영국에서는 노래와 춤을 곁들여 뮤지컬이 되었다. 주권쌤은 유럽에서 한국인 최초의 카바레티스트로 활동했다. 중간에 내가 안 끊었으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얘기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 분 재밌다.

이렇게 기록을 하다 보면 내가 정말 액티비티하게 사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기록되는 날 이외에는 쥐 죽은 듯이 지냄.






대구서 지우를 만나 현빈을 만나러 창원에 갔던 날. 

많이 웃고 많이 먹었다. 창원 참 살기 좋구먼.







밤안개. 

사실 이야기가 재밌으려면 이쯤에서 극적인 사건이 하나쯤 터져야 한다. 누가 죽는다던가 사고가 난다던가, 사랑에 빠진다던가, 전쟁이 나던가, 로또에 당첨이 되던가...

하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다. 삶은 지루함의 연속이고, 외로움은 벗어날 수 없다. 두통과 불면은 끊임없이 찾아오고, 한 가지 걱정이 지나가면 다른 걱정이 온다. 다만 새벽에 조용히, 커피 한 잔 옆에 두고, 끄적끄적 끊임없이 사진을 만지고, 글을 만지고, 자신의 속을 만지는 일이 인생이다. 






10월 13일. '예술로 움직임'이라는 타이틀로 지난 6개월 동안의 경북예술로 사업 성과공유회 행사를 치렀다. 뿌듯하고 보람찬 기분. 함께해 주신 안동성좌원 분들과 안동주민들, 그리고 참여한 예술가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10월 23일. 서울서 천영술 작가님이 내려와 함께 영덕에 다녀왔다. 

폰카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는 마음에 드는 사진이다. 바다를 보면 좋다가도, 또 언젠가는 그저 집 앞의 마당을 바라보는 것마냥 시큰둥할 때도 있다. 그게 그거지. 자연은 자연이고, 지구는 지구고, 꽃은 꽃이고, 나는 나일 뿐이지. 뭐 그런 시니컬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비교대상이 없는 확고한 존재감이 바로 고독이란 거신가봉가. 






대구사진비엔날레의 포토북 페스티벌. 

온갖 종류의 사진출판물이 망라되어 있어서 온종일 있고 싶었다. 저 가비 로랑의 'falling' 사진집은 언젠가 제주도에서 보고 반해서 집으로 돌아와 구매했던 기억이 있다. 사진이란 매체는 무엇보다 책으로 만들어졌을 때 그 감동과 효과가 배가되는 것 같다. 텍스트가 하나도 없는 사진집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름도 안 넣어야 하는데 아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족적을 남기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란... 작가로서, 하나의 개체로서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그저 무명인으로서 인류의 소산으로 남는 것 또한 재밌지 않겠는가. 시간이 흘러 천 년쯤 후에 연대와 장소를 알 수 없는 다량의 사진집이 발견되고 수많은 예술사학자들이 연구했으나 끝내 비밀이 밝혀지지 않고 박물관 수장고에... 그게 바로 나야 나. 21세기 초에 활동한 이재라는 사진가였다고. 이 문장이 또 천 년쯤 후에 인터넷 어디선가 발견되어 결국 사진집의 비밀이 밝혀지고야 마는... 이건 너무 희망찬 드라마로군. 실상은 어느 집 다락에서 발견된 다량의 사진집이 그 집 아이들과 친구들이 딱지치기로 사용하고 분리수거 되어 영원히 사라진다. 결코 회자되지 않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처럼. 이야기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들이 아무리 수많은 소설과 영화와 음악을 만든다 하더라도 잊혀진 이야기에 비하면 티끌에 불과할 것이다. 시간의 거대한 침묵에 견주어 인류의 역사는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경북예술로 최종성과공유회 참석차 경북 봉화의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 들렀다. 

해금 연주자 고윤진의 연주에 맞춰 춤을 추는 발레리나 천소연의 모습. 세상의 모든 움직임 중에서 인간의 율동이 단연코 가장 아름다울 수 있다. 반면에 이 '춤'이란 것은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직조된 동작으로 어떤 경우엔 인간의 몸에 대한 강력한 물리적 가해를 무릅써야만 한다는 관점도 유효하다. 브레이크댄스 같은 과격한 춤을 볼 때마다 와, 저 고관절! 그런 관점에서 안무가 이윤정이 풀어내는 현대무용 퍼포먼스를 보았을 때 나에겐 색다른 충격과 감동이었다. 







이윤정(Yunjung Lee) 〈점과 척추 사이(Between Spot and Spine)〉 (2019)

실로 감탄을 자아내는 퍼포먼스. 몸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몸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뇌와 신경과 근육을 연결하는 흐름에 대해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사진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10월 27일. 가일서가에서 열린 나의 개인전 <시시각각> 

이 전시가 끝나고 '잭과 재'라는 책을 만들었다. 잭과 재는 전시의 표제시다. 




잭과 재  



콩나무가 자라면 

날렵한 나의 장면은 시작되지


잠자는 거인의 콧털은 

철창 너머 존재할 뿐인 현재의 진행형  


어제 또는 오늘이 섭섭한 관계로 

벽을 타는 놀이는 내일의 약속 


나는 너무 자랐고

세 아이의 아빠고

그는 이미 수염을 깎고 잉글랜드보다 먼

풍요의 제국으로 떠난 지 오래  


사나운 계절엔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비의 기억을 되새길 때마다

사라진 거위는 타향에서 황금알을 낳겠지


다만 지금은 소매를 걷고

낡은 사다리의 설계를 바꿔야 할 때 

인생의 장르를 결정하는 것은 눈물의 무게였으므로


그렇다면 잠깐, 

이 이야기 어디선가 많이 듣지 않았어?






10월 말, 한욱과 동민과 함께 철원에 갔다. 제2땅굴에 들렀고, 평화전망대에도 들러 북한땅을 보았다. 2005년에 2박3일로 금강산에 다녀온 이후 처음으로 북한땅을 실제로 본 날이다. 






11월. '의성성냥공장 열리는 날' 축제에 맞춰 진행한 사진전 <불립문>. 성광성냥공업사 구내식당 건물에 전시장을 마련했다.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치른 뜻깊은 전시다. 이 전시가 아마 성광성냥에 대한 마지막 추억이 될 것 같다. 축제 프로그램으로 승호 작가님과 토크쇼도 진행했다. 

그나저나 벌써 11월이네. 






11월 18일. 의성군청소년문화의집 공연장에서 열린 '제1회 US청소년 창작뮤지컬 <친구니까>'

진주백 작곡가의 지도하에 7개월 동안의 긴 연습 끝에 무대에 오른 아이들. 실로 감동적인 무대였다. 2024년에 2회 뮤지컬 프로그램이 계속 진행될 예정이다.






11월 25일. 스페이스 거북이에서 열린 '오후에 만난 성아'의 공연. 보컬 성지와는 20년이 다 돼가는 인연이다. 스페이스 거북이는 가야금 연주가 정민아 씨가 운영하는 공간이다. 성지의 소개로 잠깐 인사를 나눴다. 나는 10여 년 전부터 정민아 씨의 노래를 좋아했다. 역시 사람 인연이란...






12월 4일. 종로구 서궁갤러리카페에서 내 사진전 DEJA VU ISLAND PART I이 시작되었다. 

전시 설치를 위해 승호 작가님과 영술 작가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도와주셨다. 아니었으면 하루 만에 못 끝낼 뻔했다. 전시는 2024년 2월 18일까지다. 지금 전시 중.






12월 16일. <오후에 만난 성아 in the DEJA VU ISLAND> 공연. 

"성지야, 나 서울서 전시 잡혔어."

"와, 오빠, 잘됐다. 이참에 우리 같이 뭐 해보자."

선뜻 제안해 준 성지에게 무척 고마웠다. 갑작스런 제안이었을 텐데 흔쾌히 수락해 준 현호 씨와 성아 씨한테도 무한 감사! 

이날 공연 덕에 오래 못 만났던 친구도 만나고 반가운 분들도 많이 만났다. 다들 너무 감사했다. 






짬을 내어 영술 작가님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구본창의 항해> 사진전을 보러 갔다. 구본창 작가님을 만나 잠시 얘길 나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유와 내공이 느껴지는 말씀들.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전시는 그야말로 무척 재밌었다. 디지털 작업하는 젊은 작가들로 여기시던데, 우리 둘 다 필름유저예요! 






12월 31일. 얼음. 

연말연시 며칠 동안은 집에서 조용히 혼자 보냈다. 





이렇게 마무리를 하겠다. 기록하지 못한 것들이 많다. 기록하지 않았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1월 1일은 단지 12월 31일의 다음날이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기약하기에도 뭐 다잡을 마음은 이미 다 다잡았다. 일상을 견디고, 즐거움을 찾아 또 하루씩 보내는 거다. 쓴 말보다 쓰지 않은 말이 더 많으므로, 많은 말들을 삼켰다고 느낀다. 이 사소하고 거대한 침묵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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