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꿈에 부풀었던 시간들
잊기엔 너무 아까웠던 순간들
다 비워내려했던 나의 모습을
무색하게 만든 책상위에 낡은 너의 엽서들
오 사랑은 변해간다지만
그대만은 그 자리에 서서 한치도 멀어지지 않았네
나 이제야 뒤돌아 그대 그림자를 안고서
여기에 있어주었음에 참 고맙다고
그대 내게 해주었던 말
몇 번이고 나의 머릿속을 맴돌다
얼어있던 나의 마음속을 깨우네
둘이지만 우리 하나 되는 꿈을 꾸고 있단 말
오 이별은 순간이라지만
그대만은 그 자리에 서서 한치도 멀어지지 않았네
천 걸음을 한 걸음같이 내게 와주었음에
나 깊이 그댈 바라보며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사랑은 그 단어 안에 의미가 온전히 들어있지 않다. 다만 '사랑'이라는 단서 또는 윤곽만 던져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랑'을 상상하게 하고 추종하게 하며 의심하게 한다. 사랑이라는 단어 안에 사랑의 모든 든 의미가 하나의 완결된 형태로 들어있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사랑을 쉽게 보거나 업신여기거나 함부로 대할지도 모른다. 증명되지 않지만 반드시 존재한다는 인류적 믿음의 기반 위에서 그것에 대해 잘 모를 때, 사람들은 궁금해하며 경외감을 느끼기도 하며, 배타적이기도 하며 환상을 품는다. 또한, 잘난 체하길 좋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단정 짓거나 속단하게 하기도 하며, 겸허한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수용하거나 헌신하게 하기도 하고, 나약한 사람들로 하여금 의심하거나 의존하게 하거나, 또한 뭇사람들로 하여금 남의 사랑을 훔쳐보게 한다. 그리하여 사랑은 너무 자주 언급되며, 너무 어렵게 풀이되기도 하며, 부유하거나 침잠한다. 하지만 백만 대군과 억만금을 가진들, 역사적 문화적 인간적 우주적 맥락에서, 사랑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여기서 '사랑하다'는 '사랑을 추구하다'로 치환된다. 결과값을 알 수 없는 맵핑의 과정이 인류의 존속에 크나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몇몇 작품에서 사랑에 관해 얘기한 것들을 무작위로 한 번 뽑아보았다. 물론 저들 또한 사랑을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다. 다만 수천, 수만 가지 사랑의 형태 중 한 가지를 제시할 뿐.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강렬한 감정만은 아니다. 이것은 결단이고 판단이고 약속이다. 만일 사랑이 감정일 뿐이라면, 영원히 서로 사랑할 것을 약속할 기반은 없을 것이다. 감정은 닥쳐왔다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나의 행위에 판단과 결단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내가 이 사랑이 영원하리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_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그 남자거나 그 여자 없이는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느낄 때의 빈사상태가 사랑을 규정한다.
바로 그런 남자, 그런 여자, 한 개인, 한 개체atomos, 분할할 수 없는 존재가 문제이지 집단이나 집단을 이루는 한 부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런 매혹은 준비될 수도, 훈련될 수도, 계발될 수도, 파기될 수도 없다.
*
귀결. 사랑과 결혼은, 사랑과 수태가 대립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립된다. 그것들의 관심사는, 한편으로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이나 다른 한편으로 동일자의 번식만큼이나 다양하다.
_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마리 브레몽에게.
사랑은 난폭한 자연의 철칙에 의해 오류에 빠진 비정상적 현상이라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소. 또한 역사란, 자연의 철칙을 끊임없이 거부하려 했으나 도로에 그친 우리 인간이 그 자연법칙을 점차적으로 의식한 것에 다름 아닙니다. 따라서 역사 자체도 하나의 비정상, 즉 생명체의 지속성과 물질의 무한성에 의해 오류에 빠진 우연한 일화일 따름입니다. 지속성과 무한성도 하나같이 단순한 자연의 철칙에 예속되어 있지요. 그러나 물질, 생명체, 철칙, 심지어 우연성 속에서도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 앞날을 향한 계획과 그 뒷날의 변명, 이 계획과 변명이라는 두 개의 비정상이 어우러진 내일 없는 완성 속에서 말이오. 그건 다름 아닌 사랑의 역사요. 이러한 생각은 당신과 쥘리 덕분에 갖게 되었소. 지금으로선 그밖에 다른 의미는 찾지 못하겠소. 내 처지와 내가 저지른 행위에 비춰본다면 나는 감히 사랑한다는 흉내도 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 때문에 나는 자연의 철칙이 지배하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내게 있어서 사랑이라는 부조리한 목적성은 마지막이란 단어에 다른 뜻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군요."
_미셀 리오 , 불확정성의 원리 <실족>
모든 열정적 사랑의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말하듯이, 못하게 막는 것이 있어야 비로소 영원한 사랑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투쟁 없는 사랑의 정열은 없다. 그와 같은 사랑은 오직 죽음이라는 궁극적인 모순 속에서만 그 끝을 발견한다. 베르테르가 되느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느냐 양자택일뿐이다. 여기서도 또한 여러 가지 자살 방법이 있을 수 있겠는데, 그중 하나는 전적인 자기 몸바침과 몰아(沒我)다. 그 누구 못지않게 돈 후안도 이것이 감동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아는 소수의 사람 중 하나이다. 그는 또한 위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인생을 등진 사람들은 스스로 풍성해질지 모르되 그들이 사랑의 대상으로 택한 사람들을 필경 가난하게 만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_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K씨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19)
"만약 당신이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을 K씨는 받았다. "난 그에 대한 구상Entwurf을 하겠소. 그리고 그가 그것과 비슷해지도록 보살피겠소."라고 K씨는 대답했다. "누가요? 그 구상이 말입니까?" "아니오. 그 사람이 말입니다"라고 K씨는 말했다.
19) [누구에 대한 사랑인가?]와 [누가 누구를 안단 말인가?]에서도 역시 작가의 사랑에 대한 규정이 나타나 있다. 그는 소유하고자 하는 사랑의 방식을 거부하고, 상호 간의 계속되는 행위, 혹은 교환적인 태도를 중요시한다. 그래서 역할, 성격 및 연인의 태도가 고정되어 있는 형상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_브레톨트 브레히트, 즐거운 비판
중국의 선비가 한 기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기녀는 선비에게 "선비님께서 만약 제 집 정원 창문 아래서 의자에 앉아 백일 밤을 기다리며 지세운다면, 그때 저는 선비님 사람이 되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흔 아홉 번째 되던 날 밤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팔에 끼고 그곳을 떠났다.
_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마르트와 마르탱은 43년간 결혼 생활을 했다. 스물한 살에 결혼했으니까, 지금 그들은 예순네 살이다. 그들은 사회적 규정에 따라 이미 은퇴했거나 은퇴할 시점에 있다. 흔히 말하듯 그들은 함께 인생을 마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확실히 완전한 <커플>, 어떠한 사회적 접촉과도 구별되는 <커플>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 의견으로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하게 된다.
사랑이라는 개념은 그 존재론적인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힘의 속성들을 가져왔고, 또 지금도 가지고 있다. 급히 만들어지긴 했지만, 이 개념은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오늘날 역시 의도적으로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사랑의 승리야말로, 인간의 본성을 구성하고 있는 욕구와의 신비스러운 조응을 보여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이 분석가는 쓸데없는 소리들로부터 벗어난다. 나는 전술한 욕구, 즉 인간의 본성에 대한 가장 간략한 가정을 공식화하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다. 사랑의 결과들을 관찰할 수 있으니, 어쨌든 사랑이란 존재한다. 이 문장은 클로드 베르나르에게 헌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장이다. 난공불락의 학자여! 당신이 처음에 제시했던 냉정한 관찰들이, 당신 후광의 위풍당당한 빛 아래에서, 마치 포동포동한 메추라기들처럼 보기 좋게 하나하나 정리되기 시작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확실히 그는 엄청난 힘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_미셸 우엘벡, 투쟁영역의 확장
모든 사랑에 있어서 자기 마음을 인정하느라 보내는 최초의 시간들은 축복을 받는 법이다. 특히 자기 감정을 분석하는 데 별로 익숙지 못한 존재들에게 있어서는.
_앙드레 드 리쇼, 고통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슈퍼마켓에 가고, 영화를 보고, 세탁소에 옷을 맡기러 가고, 책을 읽고, 원고를 손보기도 하면서 전과 다름없이 생활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끔찍스럽게 노력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상마저 내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내가 완전히 넋을 잃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나 문장, 웃음조차도 내 생각이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 입 속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듯했다. 게다가 나는 내가 한 행동, 내가 본 영화, 내가 만난 사람들을 또렷이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나의 모든 행동이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내 의지나 욕망, 그리고 지적 능력이 개입되어 있는 행동(예측하고, 찬성하고 반대하고, 결과를 짐작하는)은 오로지 그 남자와 관련된 것뿐이었다.
- 신문에서 그 사람의 나라에 관한 기사를 읽는다.(그 사람은 외국인이었다.)
-옷과 화장품을 고른다.
-그에게 편지를 쓴다.
-침대 시트를 갈고 방에 꽃을 꽂아놓는다.
-다음 만남을 위해 그에게 잊지 않고 말해야 할 것과 그의 관심을 끌 만한 이야기들을 메모해둔다.
-함께 보낼 저녁을 위해 위스키와 과일, 각종 음식을 사둔다.
-그 사람이 오면 어느 방에서 사랑을 나눌 것인지 상상한다.
_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단순한 열정' - 이 책이 아니었다면 그녀를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 을 다시 읽은 뒤부터 질투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그녀의 텍스트와 맺게 될 깊은 관계를 곧 감지했다. 그때까지 막연하고 불분명하던 A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글을 통해 내게 생생하게 느껴진 것이다.
나의 질투심은 처음에는 시도 때도 없이 툭툭 불거졌다. 그녀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 행동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책을 다시 읽은 뒤에 야기된 고통이 되살아났다. [단순한 열정]에 묘사된 것과 똑같은 것들을 그녀가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방에 꽃을 꽂아놓는 것.
-내가 오면 어느 방에서 사랑을 나눌 것인지 상상하는 것.
-내 정액을 간직하기 위해 다음날까지 씻지 않는 것.
-내게 해야 할 말, 나의 관심을 끌 만한 이야기를 잊지 않기 위해 메모하는 것.
-함께 보낼 저녁을 위해 위스키, 과일, 각종 음식을 사두는 것.
-우리의 그날의 운세를 읽는 것.
-우리의 이야기를 닮은 영화라는 확신이 서면 지체하지 않고 극장에 가는 것.
-지하철에 앉아 있는 거지들에게 적선을 하고 소원을 비는 것.
예전에 내가 각별한 배려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과거의 욕망에 의해 조정된 다른 행위들의 반복, 우리 사랑 이전에 있던 다른 장면들의 재연에 불과했으며, 그 속에는 그녀의 삶과 글쓰기에 의해 연장된 책 사이에서 공명하는 메아리처럼 A의 분신이 끼여있었다.
_필립 빌랭, 포옹
자신을 제치고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녀석은 그 한 사람을 위해서 다른 모든 사람을 버릴 수 있는 놈들뿐이다.
_야마다 에이미, 공주님
나는 절벽 가장자리에서 뛰어내렸지만 떨어져 죽기 직전에 뭔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떨어져 내리는 두려움이 줄어들지는 않았더라도 그 두려움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새로운 조망을 얻은 것이었다. 나는 가장자리에서 뛰어내렸지만 마지막 순간에 뭔가가 팔을 뻗쳐 나를 허공에 걸린 나를 붙잡아 주었다. 나는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믿는다. 사랑이야말로 추락을 멈출 수 있는, 중력의 법칙을 부정할 만큼 강력한 단 한 가지 것이다.
_폴 오스터, 달의 궁전
그이가 말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대답했다.
집어쳐요, 그딴 말
생각하지 않고 사랑할 순 없어요?
그러자 그는 심각해졌다.
방금 그 말, 생각해 볼 문제야!
_장정일, 내 애인 데카르트
이유가 뭐지? 왜 나를 엿보았지?
- 당신을 사랑해. 진심으로 사랑해요.
그럼 뭘 원하는 거지?
- 몰라요.
나랑 키스하고 싶니?
- 아뇨.
나랑 같이 자기를 원하니?
- 아니에요.
그럼 함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거니? 마주르 지방이나 부다페스트로?
- 아뇨.
그럼 뭘 원해?
- 아무것도.
아무것도?
- 아무것도.
_크쥐쉬토프 키에슬롭스키, A Short Film About 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