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Asia Design Global Workshop
이 글은 2023년 8월, 일본 도쿄 시바우라 공업대학에서 진행한 Asia Design Global Workshop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good design'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 작성한 글입니다.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본 워크숍에서 첫째 날 팀원들에게 내가 던진 질문이다. 팀원들은 나를 제외하고 전부 학부생이었고, 심지어 디자인 전공이 아닌 학생들도 있었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들은 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답을 말해주었다.
"'좋은 디자인'은 '디자인'의 부분집합이다. 동시에, '좋은 것'과 '디자인'의 교집합이다. 하지만, '좋은 디자인'의 여집합(좋지 않은 디자인)이 '나쁜 디자인'과 동치라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본 워크숍은 '나쁜 디자인'을 선정하여 '좋은 디자인'으로 다시 디자인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지만, 엄밀하게는 '좋지 않은 디자인'을 선정하여 '좋은 디자인'으로 다시 디자인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목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수학적 논리 관점에서 접근한 나의 견해였다. 당장 우리 주변의 디자인 산물들을 둘러보면, 딱히 '나쁜 디자인'이라고 느껴질 만한 것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들 중 일부는 더 나은 디자인이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내가 첫째 날 던진 이 질문은 우리 팀이 도쿄 시내에서 '어떠한 디자인을 re-design 대상으로서 탐색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를 제시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2023년 8월에 내가 참여한 Asia Design Global Workshop(이하 ADGW)은 매년 열리는 워크숍으로, 한국과 일본, 태국, 타이완 4개국의 대학에서 디자인을 배우는 대학(원)생으로 구성한다. 한국에서는 울산과학기술원과 울산대학교가 참가해 왔다.
2023년 ADGW는 일본 도쿄의 시바우라 공업대학에서 8일 동안 진행되었으며, 우리 주변의 나쁜 디자인을 re-design 하는 것을 주제로 삼고 있었다. 우리는 전체 8일 중, 전반부 4일 동안은 도쿄 시내를 팀 단위로 돌아다니며 '나쁜 디자인'을 탐색하고 분석한 뒤, 후반부 4일 동안 분석한 내용을 바탕으로 '좋은 디자인'으로 re-design 하였다.
우리 팀 내의 일본인 팀원들의 도움으로, 도쿄 시내에서 디자인 제품들을 볼 수 있는 곳을 여러 곳 선정하여 3일 차까지의 일정을 수립하고 선정한 장소들을 방문하여 '나쁜 디자인(여기서부터는 '좋지 않은 디자인'으로 표현하겠다)'을 탐색했다.
시부야에 있는 히카리에(Hikarie) 백화점에서 제품들을 보고 백화점 내의 전시회를 둘러보기도 하였으며, 다른 날에는 긴자에 위치한 이토야(ITOYA)라는 대형 문구점을 방문하여 다양한 문구류를 관찰하는 등 사흘 간의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었다.
3일 차까지의 관찰 내용을 토대로, 4일 차에는 '좋은 디자인'으로 re-design 할 대상을 선정하기 위해, 시바우라 공업대학 내 공용 공간에서 회의를 하기로 했다.
4일 차, 우리는 각자가 선정한 '좋지 않은 디자인'들과 그 디자인들이 좋지 않다고 생각한 이유를 공유했다. 7명의 팀원이 관찰한 내용을 모두 공유하자, 중복된 것을 제하고서도 수십 가지에 이르는 '좋지 않은 디자인' 목록이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철할 수 있는 분량이 고정되어 있어 낭비되기 쉬운 바인더, 왼손잡이는 쓰기 어려운 치즈 스크래퍼, 발향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직관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디퓨저, 피부 유형에 따른 발색을 직관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화장품(블러셔, 파우더 등)이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여러 목록들 중, 우리는 '연필깎이'를 선정했다. 긴자의 어느 가게에서 본 연필깎이는 마치 장난감 로봇과 같은 외형을 가지고 있었는데, 과연 외형을 장난감처럼 만든다고 해서 사용자들의 관심을 유발할 수 있을지, 그로 인해 되려 사용성이 떨어지지는 않는지 등에 대해 팀 내부적으로 토의했다. 동시에, 샤프(자동 연필)와 같은 문방구들의 등장으로 인해, 연필을 깎는다는 행위가 굉장히 번거로운 행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연필깎이와 연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연필을 깎는 행위가 주는 이점 등 다양한 내용에 대한 자료 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우리는 연필깎이가 3가지 주요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고, 이 문제점들 때문에 어릴 때부터 연필보다는 샤프(전동 연필)를 쓰게 된다고 정리했다.
1) 크기와 외형이 단조롭고, 기구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다.
2) 연필을 깎고 난 뒤, 나무와 흑연 부스러기를 버리는 과정이 필수적으로 뒤따른다.
3) 연필을 자주 쓸수록 연필을 깎는 빈도도 증가하기 때문에, 2번의 요소와 함께 귀찮음과 같은 부정적 사용 경험을 배가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필깎이를 더 좋은 디자인으로 re-design 할 이유가 다음과 같다고 여겼다.
연필을 깎고 연필을 사용하여 글을 쓰는 행위는 샤프(전동 연필)이나 키보드 타이핑에 비해 아이들의 손 미세 근육(fine motor)을 발달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연필을 통한 글쓰기 연습을 한 아이들은 성인이 된 이후까지도 좋은 글씨체를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앞에서 정리한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는 현재의 연필깎이를 re-design 하기 위한 방향성을 수립하기 위한 ideation 과정을 거치기로 했다. 그래서 5일 차에 나는 무작위 키워드를 통한 rapid idea generation을 제안했다. 이 방법은 진행자가 사전에 고지하지 않은 무작위 키워드를 참가자들에게 제시하고, 주어진 시간 안에 참가자들은 포스트잇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을 하나씩 기록하여 모으는 ideation 방법이다. 나는 진행자(moderator)를 맡아 '선물', '청소', '놀이공원' 등 총 8가지의 무작위 키워드를 제시했고, 각 키워드마다 5분씩 시간을 주어 6명의 팀원들이 가능한 한 모든 생각들을 쏟아 넣을 수 있도록 안내했다.
Ideation 과정을 끝낸 뒤, 팀원들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나는 모든 아이디어들을 키워드 별로 정리하고, 키워드 내에서 비슷한 결을 가진 아이디어들을 다시 분류하는 일종의 affinity diagram 작성과 유사한 과정을 진행했다. 그리고 분류한 아이디어들을 팀원들에게 공유한 뒤, 연필깎이 re-design에 적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을 다시 추출하여, 우리 팀의 re-design 최종 콘셉트를 완성했다.
우리는 모듈형 문구 정리 키트로 연필깎이를 re-design 하기로 결정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연필깎이에 대한 긍정적 사용 경험을 제공하는 것은 곧 연필에 대한 긍정적 사용 경험으로 연결된다.
연필에 대한 긍정적 사용 경험의 충분조건에는 연필깎이 외에도 지우개 등 다양한 문구류의 사용 경험이 포함된다.
나이가 어릴수록 연필깎이와 같은 문구류의 실제 구매자는 아이들 본인이 아니라 부모들이다. 즉, 이 디자인은 실제 구매자인 부모들에게도 매력적인 요소를 포함해야 한다.
부모와 어린아이들이 겪는 여러 갈등 중 하나는 책상 정리이다. '질서'에 대한 부모와 아이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아이는 책상을 정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에게는 '혼란스러운 상태'로 보일 수 있다.
부모의 강압적인 명령보다는 아이와의 소통을 통해 서로의 역할을 인지시키고 아이로 하여금 self-regulation을 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러 가지 테마를 가진 모듈형 문구세트를 통해, 아이에게는 연필과 관련된 문구류 사용과 더불어 자기만의 기준으로 책상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한다. 부모에게는 아이가 정리한 책상의 상태가 상대적으로 '덜 혼란스러운 상태'로 보이게 만든다.
이러한 흐름을 통해, 우리는 "New world on the child's desk!"라는 주제를 바탕으로 시제품 제작을 하였다.
이 문구 정리 키트는 아이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초기 콘셉트에서는 다양한 테마에 대한 바리에이션이 있었으나, 워크숍의 전체 기간 및 재료비 여건 상 '놀이공원'이라는 테마에 해당하는 시제품만 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우리는 놀이공원을 테마로 한 문구 정리 키트를 크게 4가지 구역으로 나누었다.
연필깎이
책꽂이
지우개 거치대
포스트잇 거치대
이 문구 정리 키트는 같은 모듈을 가지고 있더라도 사용자에 따라서 다양한 배치로 정리될 수 있도록 디자인했기 때문에, 시제품 제작에서는 폼보드를 메인 플랫폼으로 하여, 각 모듈의 바닥면에 목봉을 일정 간격으로 부착하여 폼보드의 구멍에 맞춰 마치 레고처럼 다양한 조립이 가능하게 설계하였다.
재료는 폼보드 외에도 하드보드지, 마분지 등의 지류(紙類)를 이용하였으며, 연필깎이는 MUJI 社의 소형 연필깎이 모듈을 구매하여 이를 목공 조립 키트에 내장하였다. 그 외 놀이공원을 상징하는 모듈들은 3D 프린팅을 통해 제작하였다. 시제품 제작 과정 일부와 완성된 시제품의 형상은 아래 사진과 같다.
완성한 시제품은 포스터와 함께 팀에 배정된 전시대에 배치되었으며, 워크숍 마지막 날인 8일 차에 모든 팀이 각자의 시제품을 전시하였다. 본 워크숍은 대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특별한 상은 없었으며, 참가자 전원에게 수료증이 발급되었다.
2023년은 스스로의 디자인 실무 능력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한 해였다. 디자인 연구를 배우는 학생으로서 내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나, 디자인이라는 분야는 기획 단계에서 그치지 않고 결국 실무까지 연결되는 일련의 과정을 다루기 때문에 스스로의 실무 능력이 곧 기획 및 연구에도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고민의 과정에서 지원하고 참가하게 된 Asia Design Global Workshop이었다.
본 워크숍은 좋은 디자인과 나쁜 디자인(본인은 여전히 좋지 않은 디자인이라고 주장하는)에 대한 정의를 스스로 내릴 수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었다고 생각한다. 마치 공학도가 과학과 공학의 차이, 거기서 기인한 공학의 의의를 얘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처럼 디자인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응당 '디자인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떤 좋은 디자인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나는 과외 지식으로 Stanford University에서 Google Coursera에 개설한 Introduction to Mathematical Thinking을 수강한 직후였기 때문에, 이 담론에 대해 상당히 논리적으로 접근했다. 글의 서두에서 밝혔던 것처럼, 좋은 디자인은 디자인이라는 전체집합의 부분집합이며 동시에 좋은 것이라는 집합과의 교집합이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그 특성을 규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 과정의 결과로써, 나는 좋은 디자인으로 어떤 것을 re-design 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의 '좋지 않은 점'을 추출하고 분석하여 더 좋은 상태로 천이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결론은 이전 글에서 다룬 '인지공학 관점에서의 문제 해결'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그래서 우리 팀이 선정한 좋지 않은 디자인인 연필깎이에 대해서도 같은 관점으로 접근했다. 연필깎이 그 자체만 보지 않고, 연필깎이의 기능을 사용함으로써 얻어지는 부수적인 효과들과 사용성, 그리고 각각의 요소가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 논의하고, 그중 '더 나은 상태'로 천이시킬 수 있는 요소들을 선별하여 최종 콘셉트를 만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 워크숍은 내가 이론적으로만 모델링하던 디자인 문제 해결 프로세스를 실천해 볼 수 있었다는 의의가 있었으며, 개인적으로는 그 결과에 상당히 만족하는 편이다.
하지만 동시에 한계도 뚜렷했다. 이 문제 해결 프로세스가 단순한 과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시를 관람하는 다른 팀의 학생들 혹은 다른 국가와 학교의 교수들에게 짧은 시간 안에 이를 온전히 설명해 내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문화적 차이와 커리큘럼의 차이로 인하여, 일본 교수들과 학생들에게는 이러한 논리적 프로세스를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일본 학생들이 주도권을 가졌던 팀들 대다수가 기능성과 사용성보다는 포장과 같은 심미적 요소에 치중했던 것을 통해 서로가 문제에 대해 접근하는 관점이 크게 달랐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한쪽의 해결 방법이 더 바람직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귀국한 뒤 지도교수님과도 논의를 하였지만, 이는 문화적 차이와 커리큘럼의 차이일 뿐, 어느 한쪽이 상대적으로 '덜 디자인스러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공학 기반의 디자인 연구자를 지망하는 학생으로서, 내가 강점을 가질 수 있는 문제 해결 방법을 다듬고 숙달하여 내가 쓰일 수 있는 곳을 명확히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전략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경험이었다. 추후 이러한 워크숍을 다시 참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나만의 방식을 수립하고 숙달할 수 있는 기회를 앞으로도 더 탐색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