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인류는 사랑을 긍정적인, 추구할 가치가 있는, 그 자체로 목적인 일로 여겨왔으며, 이는 가장 냉소적인 철학자들조차 외면할 수 없는 진리인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친구나 지인뿐 아니라 일면식도 없는 공인이나 연예인에게도 빠져드는데, 그 상대를 자꾸 보고 싶어 하고, 환상을 덧씌우고, 우상화하는 일들은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포장되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는 일의 이면에는 분명 집착이 있고, 그런 집착의 원인은 우리 안에 있다.
좋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야말로 확실한 호감의 신호이다. 아무런 관심이 가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는 경우는 없으며, 대개 흔치 않은 특별한 장점을 가진 상대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외모나 능력, 성격이나 사회적 지위 등 어떤 방면에서든 상대의 특성이 드물고 희귀하다면, 예컨대 외모가 빼어나거나, 성품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온화하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특별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특별함을 비범함, 즉 평범치 않음에 한정할 수는 없다. 객관적으로 평범한 사람도 개인적으로는 얼마든지 특별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내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들이 그렇다. 실제로 친분이 있는 사이이든 아니든, 긴 세월을 알고 지낸 사람은 곧 나의 사람이라는 착각이 생기기 쉽다.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이미 우리의 경계 안에 들어온 사람은 설령 호감을 품을 만한 요소가 없더라도 특별해질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내게 없는 특성을 지닌 상대는 나의 관심을 끌기 쉽다. 인간관계에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친구가 많은 이가 특별해 보이고, 현재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커리어가 탄탄한 이가 특별해 보인다. 이는 상대의 특성이 객관적으로 얼마나 대단하거나 희소한 지와 상관없이 유효하다. 내게 아쉬운 부분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모든 면에서도 대단할 것 같다는 착각은 호감을 품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다시 말해,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흔히 포장하듯 운명이라거나 순수한 감정이라기 보단 내면의 탐심과 욕구를 상대에게 투사한 결과이다. 이런 행동이 비정상이라는 것은 아니나, 그 사실을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는 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문제, 즉 결핍, 외면, 탐욕을 인식하지 못하고 특별한 상대를 찾아 관심을 쏟아 부음으로써 해소하고자 하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을 리 없다. 이런 집착이 과도해지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스스로를 갉아먹어도 관계를 놓지 못하거나, 상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생긴다.
진실은 평상심으로 바라보면 그렇게나 특별할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만약 타인에게 격렬히 끌리거나 달콤한 환상이 불쑥 생긴다면 다음과 같이 질문해보자. 나는 지금 나의 존재를 온전히 긍정하고 있는가? 때때로 소중한 이와의 이별이나 힘든 타지 생활, 생업의 스트레스 등이 우리를 나약하게 만들 수는 있다. 그리고 그때 눈에 보이는 사람이 구원자나 신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부족함도 넘침도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느끼고 이해하면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속절없이 빠질 이유가 없다.
물론 평상심을 가지고 산다고 하더라도 보기에 몹시 흡족한 사람이 생길 수는 있다. 그러나 곧 그 특별한 사람도 나나 당신같이 고통받고 어리석은 인간에 불과하다는 연민이 들 것이다. 세상에 정말로 완벽하고, 오롯하고, 온전한 이가 있는가? 상대가 정말로 뛰어나서, 유일무이하여 관심이 생기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이 특별함을 덧씌워 매달리고 싶을 뿐인가? 우리는 환상을 덧씌우지 않은 채 상대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좋아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기대도 집착도 없는 순수한 애정이다.
자신의 삶에 외면하고 싶은 점이 많을수록 다른 사람에게 매달리기 쉽다. 그러나 내면의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외부에서 이를 채우려 드는 행위는 구멍 난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과 같으니, 구멍을 메우지 않으면 바닷물을 모두 끌어 담는다 해도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충만하지 않으면 어떤 이도 충분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