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부리나케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원래는 결혼식 후 바로 말레이시아로 돌아갈 생각에 신혼여행을 1년 뒤로 미룰 계획이었다. 온 세상이 새하얀 눈으로 덮이는 크리스마스 겨울을 좋아해 신혼여행의 로망을 핀란드의 산타 마을에서 이루기를 꿈꿨다. 그러나 결혼식 이후 열흘 동안 본가에 머물기보다는 국내 여행이라도 잠시 다녀오는 게 낫겠다 싶어 남편이 가보고 싶던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하기로 했다. 결혼식을 3개월 앞두고 급히 숙소와 렌터카만 예약했다.
MBTI에서 파워 J를 자랑하며 한때 모든 일정을 계획하고는 했다. 대학교 시절에는 교환학생이 되기 위해 하루 일과를 15분 단위로 수첩에 빼곡히 채웠고, 오전 5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수험생 때보다 부지런히 스케줄을 소화했다.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 친구와 일주일간 영국을 여행하기로 한 뒤 엑셀에 여행지 정보, 버스 번호, 동선과 함께 일정을 1시간 단위로 정리해 두었을 정도였다. 이랬던 내가 파워 P인 라이언을 만나며 계획에 대한 압박을 내려놓게 되었고, 결국 우리의 신혼여행은 맛집이나 카페조차 저장해두지 않은 무계획으로 시작되었다.
제주도에 도착한 첫날부터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강풍주의보로 비행기가 흔들리며 아슬아슬하게 섬에 착륙했다. 늦은 밤이라 제주공항 근처의 숙소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 날부터 본격적으로 여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전날보다 세찬 바람으로 ‘찍먹’을 하듯 동쪽으로 이동했다.
먼저 제주 동문시장에 들러 주전부리와 기념품을 샀다. 그 와중에 렌터카의 배터리가 다 돼 주차장에서 한동안 꼼짝 없이 있어야 했다. 차를 정비받고 나서 김녕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우비를 입은 채 흐릿한 김녕 해수욕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10분도 못 버텼다. 편의점에서 급하게 산 우산이 두 동강이 날 정도로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이러다가 몸마저 날아갈까 두려워 숙소로 서둘렀다.
오션뷰 숙소에서 흐리멍텅한 하늘을 바라보며 한참을 쉬었다. 어느새 하늘은 먹색으로 물들어졌다. 이미 때늦은 끼니를 거를 수 없어 비바람을 뚫고 겨우 식당에 다다랐다. 고소하고 육향이 매력적인 흑돼지 삼겹살로 저녁 식사를 해결했다. 그리고 자동차 전조등의 불빛에 의존하며 어두컴컴한 숙소로 복귀했다. 이렇게 신혼여행의 둘째 날이 얼렁뚱땅 지나갔다.
사실상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던 셋째 날 아침이 밝았다. 찰랑거리는 파도 소리에 잠에서 깬 우리. 창밖 풍경을 보자마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전보다 맑아진 하늘로 제주도의 푸르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숙소에 한적한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어 라이언의 손을 꼭 잡고 돌담길을 따라 걸었다. 산책길에는 우리 두 사람만 있어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푸른색 바다를 배경으로 서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이때 새파란 하늘 아래 별처럼 반짝이는 윤슬이 예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감상하는 남편이 있어서, 그리고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오게 되어서 ‘행복’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침 산책 이후 숲속에 있는 카페와 오묘한 색깔로 일렁이는 월정리 해수욕장, 샛노란 삼색 고양이가 귀여웠던 소품숍, 제주도 현지 스타일의 떡볶이인 모닥치기 맛집, 그리고 말 등대가 인상적인 이호테우 해변을 즉흥적으로 다녀왔지만, 신혼여행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숙소에서 남편과 둘이 보폭을 맞춰 걸었던 산책길이었다.
이번 여행은 이전과 사뭇 달랐다. 날씨부터 계획대로 되지 않은 신혼여행이었다. 두 나라에서의 결혼식 준비에 이어 무계획으로 떠난 제주도 여행까지 모든 게 종잡을 수 없이 흘러갔지만, 이 모든 과정이 결혼의 진짜 의미를 배우는 여정인 듯했다. 그리고 그 어떤 여행보다 편안하고 즐거웠다. 신혼여행 이후로 제주도와 사랑에 빠진 우리. 커피를 내리며 종종 우스갯소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