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 작업지시서

BETWEEN EIGHT 에피소드 2

by designwalkers

자기 전 준비해 둔 과일과 야채를 믹서기에 넣고 갈아 마시는 것이 아침의 시작이다. 셀러리, 사과, 토마토, 키위. 매일 같은 재료지만 어떤 날은 맛있게, 또 어떤 날은 먹기가 꺼려지기도 한다.


화장실로 가 속을 비우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아파트 단지 내 헬스장에서 35분간 트레드밀을 달리며 땀을 낸다. 이 일련의 과정은 2년간 이어져 온 어렵지 않은 루틴이지만 가끔 깨지곤 한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며 오늘 할 일을 떠올린다. 요즘 가장 큰 고민은 ‘TH’다.


TH는 2개월 전부터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다. 동료라고 칭하지만, 아직 학생 신분이라 의류 제작에 관해 아는 게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패션디자인 전공으로,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휴학생이다.


여러 해 동안 밑에 디자이너를 두고 일해 보았지만, 이쪽 일을 아예 해보지 않은 친구와 일하는 건 나도 처음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어떻게 일을 가르쳐야 하는지’가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나는 옷 만드는 일을 누군가에게 따로 배우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지만, 처음 도매 시장에 매장을 오픈할 당시에도 누군가의 밑에서 일을 해보거나 코치를 받아 본 적이 없다.


나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위치는 처음이라 근무를 시작하기 보름 전부터 고민하고 계획해서 준비했지만, 막상 출근을 하고 보니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


내가 지금까지 이 일을 해오며 옷을 만들 때 문제를 최소화해 주는 것은 단연 ‘작업지시서’다. 쉽게 말해 공장에 보낼 ‘옷 제작 설명서’와 같다고 보면 된다. 작업지시서는 처음 샘플을 만들 때 필요한 ‘샘플 작업지시서’와, 완성된 샘플을 바탕으로 메인 발주를 넣을 때 필요한 ‘메인 작업지시서’ 두 종류로 나뉜다.


어릴 적 즐겨 만들던 조립식 프라모델의 설명서를 떠올려 보자. 부품 목록이 나열되어 있고, 어떤 식으로 조립해야 할지 안내되어 있는 것과 흡사하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미리 사출 된 플라스틱 조각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그 조각조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추가 정보가 더 포함되어 있다는 정도로 설명하면 이해가 될지 모르겠다.


샘플 작업지시서에 필요한 내용은 대략 이렇다.


샘플명, 날짜, 공장명, 도식화, 사용 원단, 부자재, 스와치(사용할 원단의 조각 견본), 그리고 각 부자재 업체들의 정보 등이다.


작업지시서는 새로 온 디자이너가 보거나, 처음 거래하는 공장에서 받아 보더라도 어떤 옷인지 바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날짜는 가끔 누락되곤 하는데, 다음 시즌에 작업을 복기하기 위해선 정말 중요한 정보라 빠뜨려선 안 된다.


모든 내용이 다 중요하지만, 그중에서도 ‘도식화’는 공장에서 어떤 옷을 만들어야 하는지 명확히 파악할 수 있게 그려져야 한다. 물론 참고할 레퍼런스 샘플을 동봉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도식화는 보통 만들 상품의 앞면과 뒷면을 선으로 그리게 된다.


이때 각각의 절개, 봉제선, 주름 등은 패턴 제작과 봉제 시 작업자가 참고할 수 있도록 아주 명확해야 한다. 무엇보다 부위별 사이즈 표시는 가장 중요한 핵심 사항이다.


쉽게 생각하면 별것 아닌 일 같지만, 10년 이상 옷을 만들어 온 나조차도 종종 실수하곤 한다. 특히 봉제선을 누락하거나, 선의 종류를 잘못 선택하는 실수가 주를 이룬다.


아주 기본적인 라운드 반팔 티셔츠를 예로 들어보자. 에리(넥 부분)와 본판(몸판)을 연결한 뒤, 그 위에 1줄 스티치를 넣을지, 2줄을 넣을지, 혹은 아예 넣지 않을지에 따라 옷의 느낌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데 막상 도식화를 그릴 때, 기획 단계에서 정해둔 디테일과 다르게 그려버리는 실수가 종종 발생하곤 한다.


다시 말하지만, 나도 누군가에게 일을 가르쳐주는 건 처음이라 오랜 시간 고민했다.


보통 업계에서는 막내가 들어오면 시장을 돌며 원단 스와치(견본)를 걷어오는 일부터 시킨다고들 한다.


하지만 TH는 아직 기초적인 ‘다이마루’와 ‘직기’의 구분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잡무보다는 옷이 만들어지는 구조적인 원리를 먼저 이해시키는 게 급선무라 판단했다.


그 결과, 나는 그에게 다른 무엇보다 ‘작업지시서’만큼은 완벽하게 만들 수 있도록 가르쳐야겠다는 목표를 세우게 되었다.


예전처럼 펜으로 도식화를 그리기보다, 요즘은 아이패드나 일러스트레이터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디자이너가 늘고 있는 추세다.


아직 정식 디자이너라 부를 순 없지만, TH 역시 20대답게 일러스트레이터로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나는 먼저 예전에 내가 작업했던 ‘작지(작업지시서)’를 참고 자료로 건넸다. 그리고 W 업체의 2026 S/S 시즌 샘플 견본 중 하나를 골라, 직접 그 양식에 맞춰 작업지시서를 만들어 보라고 지시했다.


보통 클라이언트는 견본과 함께 작업 지시를 내리기 전, 수정 사항이나 주의 사항 등을 전달한다. 이때 견본 옷 위에 직접 마스킹 테이프를 붙여 메모를 적어 놓는 것이 업계의 통상적인 프로세스다. 우리는 바로 이 내용들을 바탕으로 샘플 작업지시서를 작성하게 된다.


TH에게 처음 맡긴 아이템은 링클(주름) 원단을 사용하고, 어깨와 목 사이의 절개선이 밑단까지 이어지는 베이식 한 블라우스였다.


나는 그가 처음이라 막막해할 것을 알기에, 무작정 그리지 말고 요령을 알려주었다. 옷을 바닥에 평평하게 펴 놓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은 뒤, 그 이미지를 컴퓨터로 불러와 선을 따서 그리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한참이 지나도 결과물을 보여줄 기미가 없어, 내가 먼저 다가가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는 펜 툴을 붙잡고 삐뚤빼뚤하게 선을 그었다 지웠다만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애써 점잖은 척하며 표정을 관리했다. 그리고 패스(Path) 툴을 정확히 다루는 법부터, 옷의 어느 부위부터 그려나가야 전체 순서가 매끄럽게 연결되는지까지 차근차근 알려준 뒤 자리로 돌아왔다.


누군가에게 업무를 지시하거나 전달할 때, ‘이 정도는 알겠지’라고 짐작하고 무언가를 시키면 안 된다는 걸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알면서도, 바쁜 와중에 그걸 하나하나 확인하고 지키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늘 일이 지난 후에야 뼈저리게 후회하는 대목이다. 그때 섣불리 짐작하지 말고,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돌다리를 두들겨 볼걸, 하고 말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그가 확인을 요청하며 맥북을 들이밀었을 때 나는 피식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견본과는 사뭇 다르게 밸런스가 맞지 않는, 묘하게 뒤틀린 핏으로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TH가 아방가르드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기에 녀석의 취향이 반영된 것 같아 웃음이 난 것이다.


하지만 일은 일이다. 만약 레퍼런스 견본이 없었다면 공장에서 아예 다른 핏의 옷을 만들어올 판이었다. 나는 도식화의 왜곡된 부분을 차근차근 설명하고, 누락된 봉제선들도 하나하나 수정해 주어야 했다.


우리가 옷을 만들기 전 준비 단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관찰’이다.


견본의 쉐입(Shape)가 어떤 느낌인지, 봉제 방법은 어떤 걸 사용했는지, 선의 마무리는 어디서 시작해 어디서 끝나는지 등을 현미경 보듯 자세히 관찰해야 놓치지 않는다. 도식화 속 선 하나 때문에 생산된 물량 전량을 불량으로 폐기해야 하는 아찔한 상황도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TH는 입사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작업지시서와 씨름 중이다.


나는 녀석과 일하며 작업지시서 양식에 ‘체크리스트’ 항목을 새로 추가해 만들었다. 라인 표기는 정확한지, 부자재 정보는 빠짐없는지 등 스스로 작업지시서를 다시 한번 점검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의류 제작에 있어 작업지시서는 모든 공정의 기준이자, 결코 흔들려선 안 되는 ‘절댓값’과도 같다.


물론, 이는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디자이너들도 종종 실수하는 난제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올해 A 업체의 진행 상품 중 한 품목을 전량 폐기해야만 했던, 아주 뼈아픈 실수가 내게도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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