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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프랑스시골소녀 Jun 20. 2021

체리의 굴레

나는 지금 프랑스 시골에 살고 있다.


크리스티앙 아저씨는 내가 불어로 일기를 써오면 첨삭해주시곤 하는데,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거냐며 말로 설명해달라고 하실 때가 있다. 그러나 이마저 아저씨를 이해시키기 쉽지 않다. 설명하는 나의 불어 발음이 너무나 이상 야릇하기에 제대로 못 알아들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불어의 특정 단어 발음이 힘들다는 내용을 일기에 쓰게 되었다.  


- 나는 불어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Heureux(행복)' 'oeuf(달걀)' 'oeil(눈)'. 그러나 나는 발음할 수 없다. 

- 나는 슬프다.  왜냐하면 '나는 행복(Heureux)하다'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크리스티앙 아저씨는 내가 안타깝다는 듯이 쳐다보시며, '행복'이라는 단어를 좀 더 쉽게 발음할 수 있는 단어로 알려주셨다. 하지만 못할수록 오기가 생기는 고집쟁이 나는 계속 연습해본다. 제대로 행복을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난 행복하지만 아직 행복하다고 불어로 말할 수 없는

나는 지금 프랑스 시골에 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눈을 비비며 크리스티앙 아저씨의 집으로 걸어가는 길. 수잔 아줌마와 아저씨가 체리 나무 아래에서 얘기를 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눈치 9단이 된 나는, 독일어로 대화하는 그들이 어떻게 체리를 딸 것인지, 어떤 사다리를 이용할 것인지, 의논하는 중임을 알아차리고 체리 나무 아래로 자연스레 걸어갔다. 한번 몸으로 나무를 툭 치면 후드득 쏟아질 거 같은 체리들이 정말 표현 그대로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아저씨는 체리를 딸 건데 지금 옷은 체리로 물들 테니 자신의 오래된 옷을 입으라며 주셨다. 오래된 옷이었지만, 꿉꿉하지 않았고 뽀송하지만 오래된 향이 그윽하게 묻어있는 아저씨 옷을 입고,  아침 먹다 불려 나온 레이첼까지 모두 체리 나무 아래 모였다. 



남프랑스의 아침 햇살은 뜨거웠고, 만만하게 봤던 체리는 끝이 없었다. 아줌마가 위에서 흔들어 체리를 떨어뜨리면 떨어진 체리를 주워 담기 시작했다. 하늘에 체리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아줌마가 외쳤다.

“체리 비야”

바구니, 냄비, 장바구니 등 체리를 담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것들이 하나둘 체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마침내 끝날 거 같지 않았던 체리 비가 차츰 그치기 시작하고, 체리를 가득 들고 부엌에 모였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체리를 수확했을지 각자 얘기해 봤다. 크리스티앙 아저씨는 20kg, 레이첼은 23kg, 나는 25kg, 수잔 아줌마는 30kg라고 얘기를 했고, 아줌마가 먼저 몸무게를 재본 뒤  체리가 가득 든 상자를 들고 무게를 쟀다. 결과는 딱 30kg. 수잔 아줌마는 어린아이처럼 신이 난 듯이 온몸을 흔들며 양손으로 브이를 그리며 외쳤다.

 
“내가 이겼어 내가 이겼어”
 
크리스티앙 아저씨는 누가 이기는지는 상관없다는 듯 30kg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재빠르게 계산을 시작했다. 
 
“1킬로에 6유로 정도 하니까, 우리는 180유로나 번 셈이야. 180유로만큼 체리를 안 사 먹어도 되겠다.”
 
한국에서 비싸서 잘 사 먹지도 못했던 싱싱한 유기농 체리가 내 눈앞에 이렇게 많다니 체리가 모두 내 거인 마냥 흐뭇했다. 이때까지는.. 흐뭇했었었었다. 그리고 시작된 체리의 굴레.


체리를 따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은 시작도 못한 시작이었다. 30kg나 되는 체리들이 과연 몇'개'나 될까? 여기서 개수가 상당히 중요하다. 알알마다 씨를 빼야 했다. 체리 한알을 틀에 올린 뒤 가는 막대기로 가운데를 눌러 씨를 빼내는 방식. 이는 곧 한알 한 알 수작업으로 해야만 했다. 체리 올리고, 누르고, 올리고, 누르고, 올리고 누르고... 무한 반복 작업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기계처럼 반복 작업을 계속하면서 수잔 아줌마는 말했다.

 
“처음에는 오른손으로 누르다가, 왼손으로 누르다가, 팔꿈치로 누르다가, 결국에 우리는 이마로 눌러가며 씨를 빼게 될 거야”

아저씨의 흰 티는 이미 체리 즙으로 분홍빛이 되어있었고, 얼굴과 손까지 온통 체리로 물들었다. 아니 절여지고 있었다. 그렇게 무한 씨 빼기를 시작한 지 한 시간쯤 되었을까? 아저씨가 내게 물었다.

“잼 만들어 볼 사람?”
 
끝이 보이지 않는 씨를 빼기보다, 차라리 쨈을 만드는 게 더 쉬울 거라 생각했던 나는 덥석 하겠다고 대답을 했고 그것은 또 다른 무한 반복의 시작이었다. 커다란 솥에 체리와 설탕을 가득 넣고 휘휘 젓기 시작했다. 그렇게 4시간가량 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밖에서 잼을 만들 수 있어서 멍 때리며 앉아서 젓고, 산보다가 젓고, 새보다가 젓고, 꽃 보다가 저었다. 자연이 내게 위로가 되다 보니 나름 시간이 빨리 지나가긴 했다.  해본 적이 있는가? 팔팔 끓는 불 앞에서 4시간 동안 단 냄새를 맡고 있으면 내가 설탕인지, 설탕이 나인지, 절여지는 듯한 단내가 온몸에서 나는 듯하고 '쩐다'라는 표현이 이럴 때 쓰임을 깨달으며, 나는 이미 단내에 '쩔어있었다'
 


체리 씨를 다 빼고 온 손이 체리로 격하게 물든 레이첼이 내게 맥주 한 병을 갖다주며, 그녀는 진지하게 멍 때리며 잼을 젓고 있는 내 얼굴을 보며 크게 웃으며 말했다. 

 
“너 지금 제정신이 아닌 거 같아”

“어 맞아. 나 지금 가스냄새와 체리 냄새와 뜨거운 불 때문에 난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거 같은 기분이 들면서 머리가 어지러워”
“하하. 정말 그래 보여. 가스냄새를 너무 많이 맡은 거 아니야? 정신 차려!! 하하”
“나 지금 체리처럼 보이지 않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온 집안에서 체리향으로 가득 찼다. 달면서 상큼한 단내. 체리 잼을 한병 한 병 담고, 수잔 아줌마는 체리 케이크와 체리 주스까지 만들고 나서야 체리의 굴레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이후 우리의 냉장고는 모두 체리로 가득 차게 되었다. 나는 몇 날 며칠 체리 꿈을 꿀 예정이다. 200%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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