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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영 Sep 24. 2021

남편의 텃밭을 고소합니다.

텃밭보다는 날 좀 봐 주오.

 “농업 혁명은 창세기 이래, 인류 최대의 사기극이다.” 


유발하라리는 책 <사피엔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처음에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인류는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부터, 열매를 따고 짐승을 잡으러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동굴에서 자는 수렵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안전하게 정착하면서 가축도 사육하고, 도자기를 굽는다든지 등등의 문화가 생성·발전되었다. 내 머릿속엔 그렇게 인식되어 있는 탓이다.      

그런데, 요즘 ‘이 말이 정말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그 시간에 자유롭게 자연 속을 다니고 자연과 공존하였다. 농사짓는 일련의 일들, 씨 뿌리고 밭을 갈고 거름 주고 잡초 매고 수확하고 저장하는 일련의 묶임에 저당잡히지 않고 더 홀가분하게, 더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농사는 인류 최대의 사기극, 맞다!    


농업혁명은 안락한 새 시대를 열지 못했다. 농부들은 대체로 수렵채집인들보다 더욱 힘들고 불만스럽게 살았다 한다.  사육한 가축들은 온갖 전염병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농업은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게 만들었다.    


우리식구는 호수가 아름다운 군산 청암산 바로 아랫동네에 살고 있다. 처음 이 마을로 이사올 때에는 청암산을 마치 내 집 앞마당처럼 쉽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남편은 집 앞 텃밭에 상추, 고추, 오이로 시작해 토마토, 수박, 참외 등 야채랑 과일을 욕심껏 심기 시작했다.

직접 키운 상추며 고추 등 열매들은 마트에서 사먹는 상품과는 차원이 달랐다. 신선하고 고소하기까지 했다.

수박넝쿨 사이에 새로 열린 조그만 애기수박! 그 엄지손톱만큼 조그만 몸통에도 줄무늬가 그려져 있던 걸 보던 날은 어찌나 신기하던지 그저 감탄을 자아냈다. 텃밭은 그런 신비로움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조그만한 게 있을건 다 있는 아기 수박! 저 줄무늬 좀 보소!


  그러나, 그건 분명 ‘사기’임에 틀림없다. 텃밭이라는 한줌 흙에 묶이어, 우리는 이사온 지 벌써 3년이 넘지만 바로 코 앞에 있는 청암산에 가족끼리 딱 한번 갔다 온 게 전부다.

남편은 직장 다니면서도 시간만 나면 텃밭에 가서 일을 한다. 봄에는 흙 갈고 거름 주고 씨 뿌리고 모종 심고,

잡초 뽑고 순 고르기, 심지어 깜깜한 밤에도 불을 켜놓고 일을 하곤 한다.

남편의 눈길, 손길, 맘길 온통 받는 텃밭은 남편의 자식인가 보다. 그런데 우리 아이가 아닌 밖에서 낳아 온 자식임에 틀림없다.  

남편의 눈길, 손길, 맘길 다 차지한 텃밭은 남편의 자식같다.

    

 중학교 3학년인 우리 딸은 온통 나에게 맡겨놓고, 밥 먹이고 학원 보내고 공부시키는 거, 모두 나에게 맡겨놓고

자기는 항상 텃밭에 가 있다. 덕분에 우리는 봄에 새순이 돋는 것도 예쁜 꽃이 피는 것도, 가을에 울긋불긋 단풍드는 것도, 산에 오르는 동안 느낄 수 있는 바람 한 줄기도 느낄 수 없었다.  학원을 오가며 도로 가로수에서 계절을 느껴야 하다니 씁쓸할 뿐이다.  해질 무렵 저녁을 먹고 나도 잡초를 뽑으러 텃밭에 쪼그려 앉아 있으면, 이웃에 사는 부부가 손잡고 산책을 나가곤 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너무 부러워 눈물을 훔친 적이 있다.  

  

 아무리 몸에 좋고 맛난 음식도 우리 먹을 만큼만 있으면 족한 것을 남편은 그 조그만 텃밭에도 자꾸 욕심을 부렸다. 집 주변 언덕까지 개간을 하고, 호박이나 머위 등 비탈에서도 잘 자라는 식물들을  몽땅 심어놓고 스스로 부지런하다고 생각하며 뿌듯해한다.    


우리는 같은 회사에서 결혼한 사내 커플이다. 직업도 같고, 직급도 같다. 밖에서 낳아온 남의 자식 같은 텃밭만 가꾸느라 집안일은 조금도 도와주지 않는 남편이 야속할 뿐이다. 텃밭의 사기에 빠져 같이 산책하고 등산하는 재미를 놓치고 사는 것 같아 안타깝다.    


고로, 나는 텃밭을 사기죄로 어딘가에 고소하고 싶다!

나는 그저 농업혁명 이전의 먼 옛날처럼 자연을 누리고, 같이 숨쉬고, 같이 놀고 싶은 따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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