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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완 Aug 06. 2023

우리는 모두 실패한다

넷플릭스에서 캐리 맬리건이 출연한 '더 디그'를 봤습니다. 그녀가 가장 유명세를 탄 영화 '위대한 개츠비'에서 존재정도는 기억하고 있었지만 제게 딱히 끌리는 배우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한달전쯤 넷플릭스에서 라이언 고슬링을 찾다가 보게된 '드라이브'에서 여주인공으로 나온 캐리 맬리건을 다시 만나게되었고 그 여세를 이어서 최근 '그녀가 말했다'까지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파도를 타는, 또는 도미노가 연달아 쓰러지는 느낌으로 영화를 봅니다. (책과 음악도 마찬가지에요) 저는 이런 방식이 꽤 마음에 드는데 진작에 어렸을때부터 이렇게 봤더라면 좋았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더 디그'에서 인상깊게 봤던 장면을 소개하려고 노트북을 켰습니다. 극중 로버트는 브라운(발굴가)를 고용한 프리티(남편을 잃은 미망인, 캐리 맬리건)의 외동아들입니다. 로버트와 브라운은 세대를 뛰어넘어 첫만남부터 우정을 나누게되고 그런 에너지가 프리티에게도 전달됩니다. 하지만 프리티는 건강이 좋지않고 점점 위독해지는 모습을 로버트가 목격하게 됩니다.


로버트(프리티 아들)

엄마가 아픈거 나도 알아요. 근데 내가 할수있는게 없어요!
난 왜 아무것도 못하죠? 낫게 해드리고 싶은데

브라운(프리티에게 고용된 발굴가)

네 덕분에 좋아지고 있어

로버트

아뇨, 더 나빠졌어요. 저도 보면 알아요 (울음)
아빠가 돌아가셨을때 다들 저보고 엄마를 돌봐야한다고 했는데..
전 실패했어요. 실패했어요.


로버트는 엄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서 울고마는데, 슬퍼하는 로버트를 마주한 브라운은 무릎을 꿇어 시선을 맞추고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어떻게 위로를 할까요? 저는 이렇게 영화속 주인공이 어떤 난감한 상황에 마주쳤을때 굉장히 궁금해집니다. 


브라운

로버트?
We all fail (우리는 모두 실패해)
Everyday (날마다)


브라운은 할아버지에게 배운 발굴하는 일을 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난해서 누추한 생활을 하고있고, 쉽게 상상할수 있듯이 땅을 파서 뭔가를 발굴하는 일이란 성공보단 실패가 훨씬 많을겁니다.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그런 사람이, 자기 앞에서 슬퍼하고 있는 어린아이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할수있을까요? 


힘내라
인생이 원래 그런거란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
이렇게 울지말고 너가 더 강해져야지
걱정하지마 엄마는 괜찮아질거야


브라운이 이런 말로 위로를 했더라면 제가 이렇게 블로그를 쓰는일도 없었을겁니다. '우리는 모두 날마다 실패해' 이 대사가 참 좋았습니다. 교과서적으로 전달되는 의미와 다르게 이상하게도 이 말에서 저는 패배주의에 찌든 염세주의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우린 모두 다 패배자들이야! 그렇게 아둥바둥해봤자 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이런 냉소와 비관이 아닙니다. 날마다 땅을 파보지만 발견하는 것이라곤 돌덩이와 의미없는 쓰레기뿐인 그의 일(발굴가) 때문에 그의 대사는 묘하게 다르게 들립니다. 실패할지도 모르는 두려움, 그것은 우리 누구나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대단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어쩌지? 소중한 사람이 떠나가면 어쩌지? 시험에서 떨어지면 어쩌지? 브라운이라고 해서 그러한 걱정과 두려움이 없는것은 아닐겁니다. 프리티의 의뢰를 받아 그녀의 땅을 파는 작업을 매일 하고있지만, 경험이 일천하다고 해서 뭔가가 나올것이라는 기대를 접은채로 삽질을 하진 않을겁니다. 오늘도 아무것도 안나올거야, 삽질해봤자 이렇게 버려진땅에서 뭐가 나오겠어? 이런 생각으로 매일 작업을 할수는 없습니다. 


It's gonna be alright. 여러 영화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슬퍼하는 상대방을 위로할때 등을 토닥이며 건네는 말입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말이지만, 말이 주는 힘이라는것이 있기때문에 따뜻한 목소리에 실려보내는 메시지로서 나름 차분하게 역할을 다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더 디그'의 장면에 적용해보자면, '로버트, 엄마는 괜찮아질거야. 기운내' 정도가 될것같습니다. 사실 이러한 위로도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We all fail everday


브라운의 이 대사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실패하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우니 실패를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위로와 격려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실패를 겪은 어른이 이제 막 인생을 펼치기 시작하는 젊은사람에게 해줄수있는, 거친 현실을 꾸미지않고 있는그대로 알려줌과 동시에 따스한 인간애를 담고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의 쓴 맛을 많이 경험해봤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보통 어른들이 젊은사람에게 하는 충고에는 약간의 고약함이 담겨있습니다. 자기가 맛보았던 쓰디쓴 경험을 근거로 젊은사람에게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않으면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 '나는 이래서 실패했으니 너흰 절대로 그렇게 해선 안돼', 또는 '나는 이래서 성공했으니 너희도 이렇게 해야돼' 이런식의 훈계는 "We all fail"과 두가지 점에서 크게 다릅니다. 하나는 성공이라는 결과에 집착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나와 너의 구분이 아닌 우리를 사용해서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 두가지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중에 성공할지 실패할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처지가 비슷하다. (그리고 대부분 실패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박혜윤 작가의 '숲속의 자본주의자' 한 부분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https://brunch.co.kr/@santafe9723/122


아이의 젊음으로부터 배우기 시작하자, 자연스레 아이에게 나의 경험으로부터 조언하는 걸 참고싶어졌다. 가령 학교에서 공부를 잘해야 좋은대학에 가서 돈 잘버는 좋은직업을 갖는다고 말해주고 싶지않다. 소로는 말했다. 모든사람에게 그들의 인생은 각각 개인적인 이유로 비참한 실패라고. 좋은 대학교에 진학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일을하는것은 한때 내가 걸었던 길이었지만, 소로의 말처럼 '개인적인 이유'로 판단해보면 '삶의 비참한 실패'에 가깝다. 여기서 말하는 실패는 잘잘못이 아니다. 나의 선택을 후회하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사회적인 기준으로 성공을 거둔 사람조차 가지않은 길에대한 회환과 타협이 있을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숲속의 자본주의자, 박혜윤  |  '가르칠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챕터 중에서>


모든 사람은 각각 개인적인 이유로 '비참한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쓴 '월든'을 이 책에서 자주 언급하는데 이 '비참한 실패' 역시 소로가 '월든'에서 말한 내용입니다. 


나이가 많다는것은 교사로서 자격을 따지자면 젊음보다 더 훌륭하지 않고, 그 자체로도 좋은자격이 되지못한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면서 잃어가는것에 비하면 얻은것이 없기때문이다. 가장 현명한 사람조차도 살면서 절대적인 가치를 배웠는지 의심해봐야한다. 나이든 사람들에게는 젊은이들을 위한 중요한 조언이 없다. 왜나하면 그들의 경험은 단편적이고 각각 개인적인 이유로 그들의 삶은 비참한 실패이기때문이다.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성공을 원하지만 늘 실패하는게 인생


영화 '더 디그'를 보고난 뒤에 여운이 가시질 않아 한번 더 봤습니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이니 지금으로부터 대략 90년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에도 사람들은 성공하길 바라는 것들이 있었을겁니다. 엄마가 건강하게 오래사는것이 로버트에게는 성공이고, 대단한 유물을 발견해서 널리 인정받는 것이 브라운에게는 성공입니다. 새로 사귀게 된 남자가 전쟁터에서 무사히 제대하는것이 어떤 여자(릴리 제임스가 연기)에게는 성공일테고 자기가 죽더라도 아들이 건강하게 잘크길 바라는것이 프리티에게는 성공입니다. 모두 자기 나름대로 의미있는 성공을 바라지만, 9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그 결과를 알고있습니다. 로버트의 엄마는 오래살지 못했을테고, 브라운은 최근까지도 대단했던 발굴작업에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6년간 이어진 대전쟁에서 새로 사귄 남자가 전쟁터에서 살아돌아올 확률은 극히 적었을테고, 프리티가 바라는대로 로버트는 보호받으며 자라지 않았을겁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모두 실패한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모두 알고있는채로 영화 '더 디그'를 처음부터 다시 봤습니다. 모두 실패할것이 뻔한데도 각 캐릭터들은 분주히 움직이고 울고웃고 배경은 시시각각 변화하며 이야기는 또 흐릅니다. 죽을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고 노래가 끝날것을 알면서도 듣고 또 듣습니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뻔한말을 하려는것은 아닙니다. 다만, 영화에서 브라운의 대사 We all fail everyday를 보고 들으며 느꼈던 벅차오름을 제 언어로 한번 정리해보고 싶었습니다. 어짜피 실패할것이 뻔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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