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영의 결혼지옥에서 함께사는 손녀와 사이가 멀어진 할아버지 이야기를 봤습니다. 고등학생인 손녀가 할아버지를 피하고, 할아버지는 손녀에 대해 좋지않은 감정을 갖고 있길래, 이전에 어떤 사건이 있었나보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사건을 겪지도 않은채 어쩌다보니 서로를 불편해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그나마 사건으로 꼽을수있는것이 길에서 두번이나 마주쳤는데 모른척 지나갔던 일이었습니다. 물론 손녀가 모른척 지나갔을테죠. 자기를 피해서 몰래 지나가는 손녀를 보고 할아버지는 분개했을겁니다. 그리고 이 둘은 집안에서도 서먹서먹했을테고 그럴수록 더 불편한 상황이 된것이죠.
저는 현재 경북의 한 고등학교에서 방과후수업을 3년째 하고있는데, 온라인이든 학교에서든 여러 고등학생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올해까지 8년동안 농촌유학센터에서 주말 생활교사로 초등학생과 중학생 어린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가 청소년 전문가는 아니지만 제가 10대들과 함께 지내면서 스스로 실천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이들을 내려다보지 않는것입니다.
어른이라고 꼭 인사를 '받기만'해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사란 애초에 그런것이 아니니까요. 인사는 Interactiva한 것입니다. '서로' 주고받는 것이지 일방통행인것이 아닙니다. 저는 외국여행을 하면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양쪽에서 서로 같은 말로 인사를 주고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Hello엔 Hello로, Hola엔 Hola로, Good morning엔 Good morning으로. 이렇듯 인사는 상호적이고 대등하고 공평하게 서로 안부를 주고받는 세레모니입니다. 너가 거기 있구나? 나도 여기 있다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절차입니다. 가족을 포함한 모든 타인과 만나게되는 그 순간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고 내가 너를 의식했다는 사실을 단순한 제스처로 알리는것은 인간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전수된 사회적 기술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류가 지켜온 전통의식을 어떤사람들은 자기가 나이가 더 많다라는 이유로 지키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기가 먼저 상대방을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먼저 인사하기를 바라며 가만히 기다립니다. 그리고 원하는 인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럴때마다 '예절'과 '공경'을 운운합니다. 하지만 저는 한 개인의 기분을 잠시 좋게 만들어주는 것보다 인류역사 50만년동안 지켜져내려온 '인사'의 거대하고 초월적인 의미를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남녀간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먼저 많이 좋아하게 되는 짝사랑의 경우는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보통 먼저 좋아하게 된 사람이 많이 힘들거라 생각하겠지만 반대편 사람도 애매한건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남자가 여자를 짝사랑한다면 여자도 자기를 많이 좋아해주는 이 남자를 여러번 생각해보겠죠.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이 자기 마음대로 막 생기게 했다가 갑자기 없어지게 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지가 분명히 들어가는것에 틀림없지만 결코 100% 좌지우지 할수없기때문에 부담스러운 사랑표현에 대한 납득할만한 대답을 해줘야 하는 여자도 곤란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저 역시 예전에 가슴이 저려오는 짝사랑을 많이 해봤는데요. 그런 짝사랑을 아름답게 포장한 수많은 예술작품때문에 저는 스스로 비련의 남주인공이라 여기며 더욱 제 감정의 늪에서 헤어나오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심하게 기울어진 관계는 건강함을 잃어버리고 파괴적으로 변해갑니다. 내가 너를 이렇게 좋아하는데 넌 왜 간단한 답장조차 하지않는거냐면서 원망도 들고 어떨때는 미워지기도 합니다. 사랑을 얻는것이 목적이라면, 내 상태를 상대방이 사랑을 줄 수 있게 만들어놔야 합니다. 누구든 건강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고 싶지 않을겁니다. 건강한 상태, 건강한 관계를 만드려면 잃어버린 수평을 되찾는것이 첫번째입니다. 상대방을 죽을듯이 좋아한다고 상대방이 내 진심을 알아주고 내곁으로 달려오는 일은 현실에선 왠만해선 일어나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의 건강함을 되찾고 서로 정서적으로 도움이 되는 관계가 만들어졌을 때 비로소 사랑은 피어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