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저지인(吮疽之仁)’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장수가 병사의 종기를 직접 빨아 낫게 하는 어진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오기(吳起)’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군단장쯤 되는 직책에 있을 때 자신의 병사 중에 등에 종기를 앓고 있는 자가 있었는데 오기 장군이 자신의 입으로 그 종기를 빨아 낫게 한 적이 있습니다. 군단장이 일개 병사의 종기를 빨아주었다는 사건은 큰 뉴스가 되어 전국으로 퍼져 나갑니다. 병사의 어머니가 그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합니다. 졸병의 종기를 장군이 빨아 낫게 해 주었는데 왜 우느냐고 누군가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왕년에 오기 장군께서 그 병사의 아버지의 고름을 빨아 낫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아버지가 싸움에 나가 몸을 돌보지 않고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지금 장군께서 이 아이의 고름을 빨아주었으니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 아이도 틀림없이 전장에서 물불 가리지 않고 싸우다가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통곡을 한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병사의 어머니의 관점으로 보면 오기 장군은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병사의 고름을 빨아준 것이 됩니다. 병사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자신의 이익이 먼저라는 것이죠. 그러나 오기 장군의 이전 행적은 버려두고 ‘연저(吮疽)’한 행위에만 초점을 두면 그 행위는 아무나 하기 어려운 접촉입니다. 아이의 배를 쓰다듬는 할머니 손이 약손이듯이, 맥을 짚는 의원의 손이 약손이듯이 오기 장군의 연저 행위가 접촉 위안이 되어 병사의 병을 낫게 한 것이죠. 그러니 병사는 다음 전투에서 위안을 받은 이상의 전투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회가 베풀고 보답하는 관계로 얽어지게 된다면 우리 사회는 행복이 넘치는 사회가 될 것임을 생각해 봅니다.
등교하는 아이에게, 회사 출근하는 가족에게 하이파이브라도 하면서 오늘 하루를 힘내는 모습을 보인다면 자녀에게도 부모에게도 접촉 위안이 되지 않겠는지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를 ‘아이구, 더운 날씨에 고생 많았다’고 하면서 두 손을 잡으며 맞이할 때 아이는 접촉 위안과 함께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자신이 보살핌과 대접을 받는다고 느껴 심리적 안정감과 함께 공부에 대한 의욕과 자신감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저녁에는 발 마사지라도 하면서 접촉 위안을 주는 것은 어떻겠는지요. 하루 종일 두 발에 의지해 몸을 지탱하고 다니느라 고생한 발, 제2의 심장이라 불리는 발을 마사지하는 것은 육체적 피로를 풀어주는 것은 물론이고 심리적으로 위안을 주고받는 최상의 방법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는 접촉 위안이 인간관계의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줍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이 시가 널리 회자되는 이유는 보편성을 얻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에 공감한다는 뜻이죠. 화자는 3연에서 ‘그에게로 가서 그의 꽃이 되고 싶다’고 합니다. 이는 심리학적으로 본다면 접촉 위안을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접촉 위안을 주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상대가 어떤 빛깔과 향기를 지닌 꽃인지 상대의 정체성을 찾아서 그의 이름을 불러주면 되는 것입니다. 애정을 듬뿍 담아 그 사람의 긍정적인 이름을 불러주는 것 하나만으로도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것입니다. 신체 접촉이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으니 애정 어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위안의 훌륭한 방법임을 생각해 봅니다.
김남조 시인도 ‘설일’이라는 시에서 심리적 접촉이 외로움이라는 병을 치유한다고 보았습니다. 5연으로 된 이 시의 2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김남조, <설일> 중에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시인은 외톨이로 외로움을 느낄 때 누구나 하늘을 통해 위안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하늘을 통해 외로움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죠. 누구는 하나님을 통해서, 누구는 부처님을 통해서, 누구는 또 다른 절대자를 통해서 심리적 접촉 위안을 느낀다면 외로움의 상당 부분은 없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가 인간을 행복으로 이르게 하는 문이라는 말이 생겨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종교적 이름이든 심리적 이름이든 서로 친밀한 관계에 있다는 인식이 들게 하는 언행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나를 중심에 두지 말고 상대를 중심에 두고 상대가 보기 좋은 행동, 상대가 듣기 좋은 말을 하면 상대는 심리적으로 안정감과 위안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상대를 행복하게 하고 그것이 자신에게도 행복으로 돌아온다는 평범한 이치를 머리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아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이 아니겠는지요.
김종삼 시인도 ‘묵화(墨畫)’라는 시를 통해 접촉이 서로에게 위안이 됨을 간결한 필치로 보여줍니다. 묵화(墨畫)는 먹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대상의 섬세한 모습은 생략한 채 단순하고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이 묵화의 특징이죠. 그림의 형태가 단순하기에 역설적으로 섬세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의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 <묵화(墨畫)>
할머니는 힘든 하루를 소와 함께 보냈습니다. 할머니도 목이 마를 텐데 소에게 먼저 물을 먹입니다. 그리고 소의 목덜미에 손을 얹고 ‘너에게 힘든 일을 시켜서 미안하다, 네가 있어서 내가 적막하지 않다, 그래서 고맙다’고 이야기합니다. 소도 할머니에게 눈을 끔뻑입니다. 자신의 목덜미에 손을 얹고 힘들고 적막한 자신을 위로해 주는 할머니의 손길에서 따뜻함을 느끼는 소는 이미 소가 아니라 자식보다 가까운 가족입니다. 소는 할머니 당신의 고단함과 적막함보다 자신의 고단함과 적막함을 위로해주는 할머니에게 고맙다는 말을 눈 끔뻑임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할머니에게는 소가 있기에, 소에게는 할머니가 있기에 발잔등이 부을 정도로 생활은 힘들어도 더 이상 적막하지 않습니다. 현재 상황에서 느끼는 행복감이지요. 할머니에게 소가 없다면, 소에게 할머니가 없다면 서로가 얼마나 적막하겠습니까? 소 목덜미에 손 얹는 그런 접촉이 힘겨운 상황에서 서로에게 위로가 됩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을 한 번 불러주는 것, 목덜미에 손 한 번 얹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서로를 행복에 이르게 한다는 진리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