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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성룡 Jan 15. 2023

<아버지의 해방일지> VS <하얼빈>

근현대사의 거친 파고를 정면으로 돌파한 사람들

두 소설 모두 한국 근현대사의 거친 파고를 정면으로 헤쳐나간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그린 이야기이다. 두 소설 모두 소설적인 상상력과 허구보다는 구체적인 인물의 사실적인 역사(개인사)를 바탕으로 기술됐다. 하지만 이야기 전개 방식이나 인물 묘사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해방일지가 빨치산의 딸로서 세상의 차별과 멸시를 온몸으로 겪은 화자의 시선에 비친 아버지를 담담히 풀어나갔다면, 하얼빈은 신문 보도와 재판 기록, 편지글, 담화문 등 철저한 사료 조사를 바탕으로 구한말 격변기를 뜨겁게 살다 간 청년 안중근의 이야기를 팩트에다 딱 반스푼 작가적 상상력을 가미해 빚어낸 이야기다.


둘 다 마지막 넘기는 책장이 아까울 정도로 재미있었고 때론 콧등이 시큰해지는 감동도 있었지만, 그 느낌은 조금 달랐다.


남의 눈엔 변절 혹은 투항한 사회주의자로 살면서도 죽는 날까지 사회주의자로서 존엄을 지키며 사회주의적 인간성만큼은 변절 않고 살아간 아버지의 해방 일지는 무겁지 않고 경쾌해서 좋았지만, 그래야만 현시대에 그나마 아버지의 삶이 읽히고 받아들여질 걸 가늠하고 의도했을 작가의 마음이 보이는 듯해서, 나는 오히려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작가는 말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가벼워져 받아들이기 수월해진 만큼 아버지 삶이 자칫 희화될 것을 우려하지 않았을까. 마주한 사람 모두를 성실히 대하고 ’ 오죽하면 그럴까 ‘라는 자세로 이해하고 넘기는 아버지의 고집스런 태도가 그저 재미나 웃음의 대상으로 여기고 말 일은 아니지 않은가.


아버지로 인해 삶이 송두리째 파탄난 친인척과 화자 자신의 삶. 특히 어린 나이에 존경해마지 않던 큰 형 때문에 눈앞에서 아버지가 학살되는 장면을 목격한 작은 아버지가 충격으로 평생 형을 증오하며 술독에 빠져 사는 이야기는 아무리 가볍게 기술해도 결코 가벼워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가족사와 구례라는 마을, 그 안에서 사상 때문에 등지기도 하고, 등 돌렸다가 경조사에 돕기도 하는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는 담담하고 가볍게 풀어냈기에 더 짙은 현실감으로 다가왔다.


민족정서에 어긋날 게 없는 안중근 이야기는 굳이 가볍게 기술하거나 친근 혹은 친절하게 쓸 이유가 없다. 기사문장을 쓰듯 최대한 화자의 감정을 배제한 채 주인공 안응칠이 걸었을 발자국을 뒤따라 비추고, 주인공이 느꼈을 감정선을 현실적으로 살려 이입하는 것 만으로 충분하다. 안중근이라는 이름과 그의 족적이 워낙 크고 굵기에 사실에 대한 기술만으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김훈은 평소 장점대로 정확히 그렇게 했고, 주효했다.

다만, 김훈이 훌륭한 점은 뮤지컬이나 영화가 가져와 누르려했던 혹은 그래서 눌리기도 하는 ‘영웅’이라는 단어 대신 안중근이 검찰 조서에서 직업이라고 밝힌 ‘포수’라는 단어에 주목했다는 점이 아닐까.


김훈은 작가의 말에서 “‘포수’,‘무직’,‘담배팔이’ 이 세 단어의 순수성이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등대처럼 나를 인도해 주었다”라고 썼다.


하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이 부분은 일본 검찰과 법원의 의도가 개입된 직업 기술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 검찰과 법원은 처음부터 이토 저격 사건이 전혀 정치적 의도가 없는 우발적인 사고로 몰아가고자 한다. 그게 여의치 않자 무지몽매한 조선 청년이 이토와 일본의 의도를 ’ 오해‘해서 벌인 일로 매도한다. 법정에서 안중근은 자신이 오해한 게 아니라 검찰관이 나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며, 자신은 자객이나 우발적 폭도가 아니라 한국 독립전쟁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이토를 죽였고, 따라서 전쟁포로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안중근은 러시아 땅 하얼빈역애서 총탄을 쏜  즉시 ’ 코레아 후라‘(한국 만세!)라고 외친다. 자신의 국적과 정치적 의도를 분명히 하기 위한 외침이었다.


물론, 이 부분까지 김훈은 충분히 고민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응칠과 우덕순의 ‘영웅’적인 면모보다는 가난한 삶과 단출한 출정에 더 집중했다. 이 소설이 구한말 조선 청년들의 불안한 삶과 시대를 향한 울분, 저항과 이상을 더 현실감 있게 전달할 수 있는 까닭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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