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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Feb 15. 2024

카다피를 과연 사악한 독재자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아랍의 봄이라는 민주화가 최악의 비극을 만든 아이러니

https://youtu.be/zhsuXJIKj3A?si=xxZAFGenPnVh1qW8

무아마르 카다피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상당수의 사람들은 아마 "악마", "학살자", "최악의 독재자"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카다피가 죽었을 당시 한국 언론들의 보도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게 전달되었으면 되었지, 결코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방향은 없었기 때문이다. 나만 해도 2011년 아랍의 봄으로 카다피 정권이 붕괴되던 시절 아직 초등학생이었는데 대충 밥 먹으면서 뉴스 보다가 국민들 학살하는 나쁜 독재자가 죽었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내가 카다피에 대해 재평가를 하기 시작한 것은 중학생으로 올라갈 때쯤 아랍의 봄의 결과가 IS라는 괴물의 폭주를 낳는 것을 보면서였고 이것저것 공부하면서 중동 정세에 대해 선악 이분법을 버리고 다각도로 분석할 줄 알게 되었다.


본론으로 들어가 아까 카다피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오르는 이미지가 막 나가는 독재자 겸 학살자 정도에만 국한될 것이라고 지적했는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이런 이미지가 형성된 것에 과연 카다피에 대한 악마화 요소가 기여한 부분이 없을까? 물론 그렇다고 애써 카다피가 권위주의적 성격이 아예 없었다는 식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집권 중에 서방 세계의 어그로를 과하게 끈 점 또한 좋게 보진 않는다. 다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카다피가 북한의 김정일과 비견될 만큼 최악 수준에 가까운 지도자라 평할 급이었냐는 것이다. 솔직히 막말로 카다피에 대해 단편적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아랍의 봄 당시의 언론 보도들만 보고 나쁜 놈이겠구나 정도로만 보면서도 정작 카다피의 정치철학이 어땠는지와 정권 도중에 어떠한 정책을 했는지는 모르는 것을 넘어서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https://brunch.co.kr/@a346abd5a67a4ed/627

(카다피 정치철학에 대한 글은 이 글 참조 바람.)


그런데 의외이겠지만, 카다피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나라를 파탄낼만큼 결코 무능한 제3세계의 전형적인 독재자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아프리카, 중동 지역 전반의 지도자들과 비교했을 때 오히려 유능하고 안정적으로 통치한 쪽에 더 가까웠다. 당장 사막 지대가 많은 리비아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수입에 의존적이었던 농업 분야부터 자급자족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이뤄낸 지도자가 바로 카다피였다. 특히 광대한 토지에 농민을 고용하여 경작하는 방식은 노동력을 착취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는 카다피식 자마히리야 체제 이론에 따라 자력으로 경작할 수 있는 만큼의 땅을 배분하여 모든 농민에게 균등한 기회를 제공했다. 즉 만약 한 사람이 자기 개인적 소유를 위하여 농장을 건설하기 원한다면 그렇게 할 자격을 부여하는 식이었는데 왜냐하면 토지는 리비아의 집합적인 재산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

그리하여 1970년부터 시행된 계획으로 관개용지, 목초지 개발, 대수로 공사, 현대적 영농기법의 개발을 포함하여 전체 개발 예산의 6분의 1이 농업 개발에 투자되었다. 물 부족을 극복하기 위한 관개공사 계획이 사하라 사막 깊숙이 위치한 지하수원을 끌어내는 것부터 착수했다. 지하수원을 다 쓰고 인구가 조밀한 케이스인 북부 해안지역의 대규모 농업활동 지원의 경우 남쪽 사막지방으로부터 지하수를 방수하는 계획도 착수되었다. 결과적으로 연간 200만 입방미터의 물을 양수하여 생활용수로 사용하거나 북부지방 5만 헥타르 지역에 관개용으로 사용되었다. 또 농업인에 대한 대출금, 기술 지원이 제공되고 훈련소 및 연구소 설립, 협동조합 결성이 장려되었다. 그 결과 생산이 크게 향상되어 1970년 2만 7,000톤이던 밀 생산이 1983년 21만 3,000톤에 이르어 연간 증가비율이 17.2%에 달했다. 채소 생산은 연간 10.8% 증가하여 1970년 약 20만 5,000톤에서 1983년 77만 4,000톤까지 증가했다. 1985년에 이르어서는 5개년 개발 계획사업의 목표인 밀의 국내 수요 75% 충당, 보리와 과일, 채소의 모든 국내 수요 충당, 육류의 국내 수요 57.5% 충당, 우유와 계란의 국내 수요는 무려 95.6% 충당을 달성했다.


산업 개발 역시 카다피 정권 하에 굉장한 성과를 자랑했다. 1969년 카다피 대령이 집권한 이래 리비아는 석유 수출국이라는 전통적 구조에서 벗어나 산업다각화를 추진하며 산업 생산품의 해외시장 수출을 준비했다. 1981~1985년의 5개년 개발계획 동안 산업 생산의 연간 22.6% 성장, 산업생산품 수출의 연간 2.4% 증가, 석유산업 분야 노동자 수 연간 11% 증가 등이 수치상 기록되었다. 석유 파생물과 가스산업 생산품의 수출은 전체 산업수출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으며 이를 통해 얻은 수입은 상당 부분이 중공업 성장에 재투자되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끌어갔다. 특히나 나세르식 아랍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카다피 답게 당시 리비아에서는 농업과 공업부문에서 노동착취가 종식되었으며 토지는 사유재산이 아니라 어떤 개인에게나 다른 사람을 고용하지 않고 스스로 경작할 수 있는 만큼의 땅을 사용할 권리를 부여해 줬다. 이처럼 공업 부문에 대해서 리비아는 노동자를 생산순환 구조에서 파트너로 간주하는 새로운 협동관계를 확립했다.


카다피가 혁명을 성공시킨 직후인 1969년 9월 당시 리비아는 무려 6만 5,000 가구가 무주택자였으며 기존 주거자 53%도 환경이 좋지 못했으며, 전 인구의 43%가 사실상 천막이나 판잣집에서 살고 있는 처지였다. 따라서 카다피는 집권하자마자 1969년부터 1975년 사이 총 11만 212 가구의 주택을 건설하였고 비어 있는 건물을 필요한 가구에 분배하였다. 리비아의 주거 대책의 가장 큰 목표는 모든 거주자가 그가 살 수 있는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 결과 1970년에는 정부소유 주택을 일반인에게 매각하기도 하였다. 또 저소득 가구가 이 주택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하게 만들려고 월 150달러 이하의 소득자에게 원가의 10%만 부담시켰다. 집이 필요한 세대주는 주택 요청서와 결혼증명서를 제출하게 하였고 인민위원회는 신청인이 무주택자이거나 현재의 주택이 수준 이하라는 것을 증명해 주어 이러한 조치들로 빈민 및 저소득층 가구가 자금 부담 없이 주택을 얻게 되었다.

카다피 시절 리비아의 1인당 GDP는 한동안 유럽연합보다 높았었다. 이후에 하락한 것은 반미 노선에 따른 경제제재 때문이고 해제 이후 다시 상승했다가 내전으로 파탄났다.

여성 인권 측면, 카다피가 독재자로 평가받는다는 점 때문에 놓치기 쉽지만 냉정히 보면 중동 국가 지도자 중에서 가장 여성 인권을 향상해 준 지도자 중 하나가 그였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사실 이는 카다피뿐만 아니라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 이집트의 사다트-무바라크 정권 같은 아랍권의 독재자들이 기본적으로 정교분리 원칙을 바탕으로 한 세속주의를 내세우고 종교 근본주의를 탄압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중동 지역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무슬림 형제단의 사례처럼 반정부를 위해 민주주의의 탈을 쓰는 것으로 아이러니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카다피 집권 기간 동안 이전까지 여성에게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던 리비아 사회가 이혼을 위한 법적 절차에 있어 동등한 권리 제공, 인민회의 및 인민위원회에서 활동에서 남자와 평등한 참여 자격 부여를 시작으로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목표로 1968~1978년 동안 중등교육을 받는 여학생 수가 4배나 늘어나고 모든 전문직업이 여성에게도 개방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민주화 이후 리비아가 내전에 빠져들면서 여성 인권이 더 퇴보한 셈인데 실제로 카다피 이후 들어선 과도위원회와 민주정권을 자칭하는 새 정부는 해묵은 샤리아 율법을 들고 나오며 여성 인권을 억압하려 들었다.


교육도 무료화 정책도 큰 진전을 보아 대학까지 모든 교육에 정부가 돈을 지불해 줬으며 리비아에서 원하는 교육 과정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은 정부에서 해외로 갈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했다. 이것으로 당시 400만 명이 조금 넘는 리비아 총인구 가운데 140만 명이나 무상으로 대학교육까지 받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카다피 정권 시기를 거치며 리비아에서는 식자율이 25%에서 87%로 높아졌고 반대로 문맹률의 경우는 90%에서 10%대까지 하락하게 되었다. 병원 등 인프라와 의료 시스템의 확충도 큰 빛을 보며 카다피 치하에서 리비아 공립병원의 치료는 무료로 내내 유지될 수 있었고 콜레라와 장티푸스와 같은 질병을 억제하고 기대 수명을 연장하는 작업에 성공하는 등 보편적인 의료 무료 서비스를 달성했다. 그 외에도 풍부한 에너지 자원을 앞세운 전기 무료화와 더불어 휘발유 가격을 리터당 0.14달러로 세계 최저 수준으로 고정하는 정책도 있었고 여성이 아이를 낳으면 정부는 여성에게 자녀 양육비로 5,000달러를 주기도 하였으며, 결혼한 부부는 얼마 후 정부로부터 새 시작 축하를 위해 $50,000를 받기도 하였다.


자동차 보조금 정책도 인상 깊은 게 자동차 구입 시 정부는 그 가격의 50%까지 보조금을 지급하였으며 원자재 가격을 일부러 인위적으로 낮게 만들어서 아사 사례가 나오는 것을 최대한 억제하는 정책도 펼쳤고 국영 은행은 0%의 이자율로 대출을 제공해 줬다. 결과론적으로 봐도 카다피 정권 시절 리비아는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로 봐도 무방했던 것이 카다피 하에서 리비아의 1인당 GDP는 약 15,000달러로 사상 최고 수준이었으며, 내전으로 인해 제대로 파탄난 2024년 현재와는 달리 외채도 없었고, 리비아의 경제는 항상 두 자리 수로 성장했던 나머지 카다피가 아랍의 봄으로 죽기 불과 1년 전인 2010년에도 경제 성장률은 10%였다. 즉 카다피 시절 리비아는 로버트 무가베의 짐바브웨와 같은 막장 독재 국가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던 셈이며 이러한 혜택은 저유가와 경제재제로 재정이 나빠졌던 90년대에도 지속되었기 때문에 당시 리비아는 극심한 빈부격차에 시달리는 타 아프리카 국가와 비교했을 때 빈부격차 문제는 덜한 데다가 생활수준은 아프리카에서 1위를 기록했다.

카다피 전후의 리비아 비교

그리고 북한의 김씨 일가처럼 철권통치를 일삼은 전체주의형 독재자라고도 100% 단정 짓기는 애매한 것이 카다피도 나름 직접민주주의 철학이 있어서 <그린 북>이라는 자신의 저서로 구체화한 자마히리야 체제를 리비아에 적용하고자 했었다. 이건 위에 올린 "카다피의 그린 리비아 철학에 대한 해설" 글에 자세히 나오니 굳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가지는 않고 간단히 요약만 하겠다. 카다피 시절 리비아에서는 의외로 발전된 선거제도와 지방자치제도가 자리 잡았는데 가령 자마히리야(인민의회) 의원 중에서도 상당수가 여성과 소수민족이었던 만큼 지역 간 갈등 중재와 소수자 인권 향상에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심지어 기초 인민의회 선거에서 일반 국민에게 전직 고위관료가 패한 사례도 있을 정도. 이렇듯 리비아가 제3세계의 다른 독재 국가들과는 달리 어느 정도 나름대로의 민주적 철학을 가지고 있음은 다른 곳도 아니고 비록 제재 해제 이후이긴 하나 어쨌든 서방 세계조차도 부분적으로 인정한 사실이다. 물론 다르게 보면 아무튼 독재 국가라기엔 꽤나 하층부가 민주적이었던 장점이 있음에도 카다피라는 거대한 중심축이 상층부에 존재하고 그가 무너지니 전부 와해되는 등의 권위주의적 성격이 다소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라는 점에서 보기에 따라 명암이 극과 극으로 갈릴 만한 체제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그리고 2011년 아랍의 봄으로 카다피가 무너진 후, 리비아는 급속도로 그동안의 성과가 와해되기 시작했다. 가령 카다피가 죽기 1년 전인 2010년 리비아의 GDP는 1만 1,417달러로 웬만큼 중진국 수준은 되었지만 아랍의 봄으로부터 약 9년 후인 2020년에는 고작 3,282달러로 3분의 1 이하 수준으로 급하락 해버렸다. 게다가 정권 붕괴 직전에 앞서 언급했듯이 카다피 정권은 대수로 공사를 통해 리비아의 상당 부분을 농지화 할 수 있을 만큼의 수자원을 확보했지만 아랍의 봄 이후 민주주의자를 자칭하던 친서구 이슬람 극단분자들이 그 수자원을 싹 다 프랑스 회사에 넘겨버렸고, 해당 프랑스 회사는 수자원에서 채취한 물을 모조리 수출용으로 사용해 버리는 탓에 현재 리비아는 식수마저 부족한 심각한 물 부족 국가가 되어버렸다. 카다피 재임 기간 동안 리비아는 사막 지대라는 환경적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식량과 물을 자급자족하는 "식량 안보"를 해냈지만 정작 아랍의 봄으로 카다피가 실각한 후 리비아 전체가 내전에 빠지면서 심각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는 셈.


카다피 이후 리비아의 상황은 오랫동안 그가 집권했을 때보다 훨씬 최악으로 흘러갔다. 아랍의 봄은 자연스럽게 민주화로 이행될 것처럼 보였지만 현실은 리비아를 구성하던 각 부족들의 이권 다툼에 군벌화로 이어지며 나라가 쪼개졌고 그 사이를 틈 타 미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중국 등 다양한 강대국들이 이권을 위해 관여하면서 훨씬 개판이 되어버렸다. 결국 국민통합정부를 표방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튀르키예와 일부 유럽연합 회원국들, 미국, 카타르의 지지 하에 서부지역 트리폴리에 단독정부를, 리비아 국민군이라는 세속주의 군부세력이 러시아 및 바그너 그룹과 사우디의 지지를 받아 동쪽 지역 투브루크에 단독정부를 세우게 되며 나라가 쪼개지는 내전에 빠져들었고 다행히도 2020년을 기점으로 양 세력은 휴전을 맺었음에도 여전히 분열이 봉합되지 못했다.

리비아 국민군의 총사령관 칼리파 하프타르

그런 의미에서 카다피에 대한 향수가 리비아 국내에서 점점 확산되고 있다. 일례로 저번 리비아 대선 당시 카다피 아들도 후보로 등록하였는데 의외로 많은 지지를 받았었다. 결국 두 군벌의 분열로 리비아에서 대선이 무산되었던 것은 함정이지만. 다만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지금 상황이 카다피의 아들인 사이프 알 이슬람 카다피와 리비아 국민군 총사령관인 칼리파 하프타르가 국민들의 높은 지지와 열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카다피 아들을 말할 것도 없고 칼리파 하프타르 또한 세속주의 군벌인 리비아 국민군의 리더 격인 인물이고 비록 중간에 정적이 되었다지만 어쨌든 카다피 정권에서 고위직이었던 사람이다. 특히 칼리파 하프타르의 경우는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어서 리비아 국내에서 영향력을 강하게 행사하고 있고 카다피의 강력한 리더쉽에 향수를 가진 계층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게다가 하프타르는 IS와 시리아에서 유입된 무슬림 형제단 계열 반군들이 리비아에 창궐한 상황 속에서 바그너 그룹과 손잡고 극단주의자들과 싸우며 자국을 안정시키는 것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리비아인들 중에는 그가 가진 특유의 강단에 기대를 하고 있는 심리를 가진 이도 종종 보이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카다피 정권의 축출이 틀린 선택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결정적인 증거는 리비아 국민들의 평가나 반미주의자들의 프로파간다적 주장도 아니다. 바로 리비아에 나토의 공습 결정을 내리며 카다피를 끝내 죽게 만들고 리비아를 민주화라는 탈을 쓴 내전 상태로 몰아넣었던, 당시 미국 대통령 오바마의 입에서 실패를 스스로 인정한 것으로 이 문제에 대한 평가는 답이 정해졌다. 오바마는 차기 미국 대선과 퇴임을 곧 앞두고 있는 2016년 4월 폭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재임 기간 중 가장 커다란 실수라고 생각하는 일로 "리비아 사태에 개입하면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그 날(카다피 정권 붕괴) 이후를 위해 계획하지 않은 것이 아마도 최악의 실수"라고 스스로 자평했다. 카다피 축출과 이후 새 과도정부 수립을 직접적으로 지휘했던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 본인이 리비아에 대한 개입이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고 규정했다는 점에서 카다피 정권이 차라리 리비아인들에게 내전 이후의 정부보다 훨씬 더 나았다고 보인다. 뭣보다 21세기 들어서 스스로 비핵화하고 서방에게 화해 제스처를 보여온 카다피를 그렇게 뒤통수 때리고 공습한 것은 역으로 그걸 보게 된 북한이 핵 개발에 더욱 집착하게 되는 계기를 미국이 만들어준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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