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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담 Jul 22. 2021

김포공항 우여곡절기

경험담을 조금 각색한 소설

발바닥에 땀이 차오른다. 구두 안에서 발과 양말이 함께 땀에 미끄러진다. 그래도 뛰어야 한다. 조금만 더 뛰면 탈 수 있다. 한 시간 빨리 출발하는 비행기 표로 바꾼 한 시간 전의 내가 원망스러웠다.


원래는 KTX를 예매했다. 서울역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고 가다 저가항공을 검색해 본 것이 화근이었다. 아니, 그 전에 운 좋게 타자마자 다음 역에서 내 앞에 앉아 있던 까만 라운드 면티를 입은 젊은 여자가 일어나면서 그 자리에 앉게 된 것부터 문제였다. 자리에 앉으니 스마트폰을 열었고, 괜히 항공편을 검색해 본 것이다.


저가항공이 싸다더니 세금까지 다 포함해도 부산까지 가는 KTX보다 쌌다. 마침 집도 김해공항에서 가깝다. 열차 대신 비행기를 타면 한 시간은 일찍 집에 도착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스마트폰을 열어 열차표를 취소하고 비행기 표를 샀다. 넉넉하게 저녁 7시반에 출발하는 부산행 비행기다.


귀가 예상시간을 한 시간 앞당기고 나니 어쩌면 집에 도착해 늦은 저녁을 먹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서울역의 맛없고 비싸고 번잡스러운 푸드코트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마음이 푸근해져 온다. 라면에 맥주만 먹어도 집에서 먹으면 즐거울 것 같다. 조금 전 재판에서 상대측 변호사의 우격다짐에 살짝 상해 있던 마음도 풀어졌다. 어쨌든 오늘 재판장은 내 손을 들어줬으니, 앞으로 재판도 술술 풀릴 것 같은 기대감도 든다.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9호선 급행열차로 갈아탔다. 그런데 이번에도 다음 역에서 내 앞에 앉아있던 대학생 두 명이 일어섰다. 이렇게 운이 좋은 날이라니. 빈 자리에 얼른 털썩 앉았다. 벌써부터 집에 도착해 콩나물을 집어 넣은 라면을 끓일 생각을 하니 입 안에 침이 고인다. 좀 더 빨리 그 라면을 먹고 싶어졌다. 마침 급행열차를 탔더니 걷는 시간을 포함해도 여섯시 전에 김포공항에 도착할 것 같다. 국내선인데다 수하물을 부치는 것도 아니니 스마트폰으로 좌석배정까지 해두면 탑승수속에 오래 걸릴 이유가 없다. 공항에 도착해서 탑승까지 20분이면 충분할 것 같다. 스마트폰을 꺼내 7시반 표를 6시반 표로 바꿨다. 이제 두 시간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다. 기분 좋은 충만감이 든다.


김포공항 출발장 입구인 3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 시계를 보니 5시50분이다. 예상보다 10분 빠른 도착이다. 이제 공항 편의점에서 허기를 달랠 간식거리나 조금 사먹고 느긋하게 비행기를 타면 된다. 그런 마음으로 3층에 올라서는데, 눈 앞에 예상치 못한 상당한 인파가 나타났다. 기나긴 승객의 행렬이 출발장 입구부터 족히 50미터는 늘어서 있었다. 오사카 입국심사장에서나 봤던 기나긴 줄을 설마 김포공항 국내선 출발장 입구에서 보게 될 줄이야. 줄을 서보니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소리.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것이 어느 나라 말인지는 안다. 아마도 대부분 제주행 비행기를 타려는 중국 관광객들이다. 한국말도 많이 들린다. 장마가 끝난 7월이니 본격적인 휴가가 시작된 것이다.


일단 늘어선 줄의 맨 뒤에 섰다. 20분을 기다렸지만 반 밖에 줄어들지 않는다. 이제 비행기 출발시간까지 20분 밖에 남지 않았다. 산술적으로 지연출발이라도 되지 않는 한 비행기는 탈 수 없을 것 같다. 세계에서 가장 기다림을 싫어한다는 한국에서는 낯선 풍경이었다. 미술관 대기줄은 본적도 없고, 그 유명하다는 맛집 대기줄도 길어야 30분인 사회다. 한 겨울 미술관 앞에서 두 시간씩 줄을 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유럽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오사카 입국심사장처럼 절반이나 심사 부스를 비워놓고도 외국인 방문객들을 두 시간씩 아무렇지도 않게 줄을 세워두는 옆 나라 일본과도 비교되지 않는다. 아마 한국이었다면 곧바로 "입국심사가 지연되어 죄송합니다."라는 안내방송과 함께 직원을 총동원해서라도 비워 뒀던 부스를 모두 가동해 신속히 방문객을 쳐냈을테다. 그런 한국의 수도에 있는 공항에서 신분증과 탑승권만 확인하는 일이 왜이리 오래 걸리는걸까.


급한 마음에 슬쩍 앞쪽으로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먼저 들어가려 시도했다. 가만히 서서 비행기를 놓치느니 뭐라도 해봐야 한다. 한국에선 그렇게 해야 경쟁에서 살아남는다. 남보다 빠르고 적극적인 실천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보다 앞서 이를 실천 중인 여성이 있었다.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색 여름 자켓을 입고 머리를 질끈 묶은 그녀는 전형적인 서울의 직장 여성이었다. 그녀 역시 사정이 나와 다르지 않은 듯, 촉박한 비행기 시간을 강조하며 뒤로 늘어서 있는 느긋한 외국인 관광객들보다 우선 입장을 요구하고 있었다. 지극히 합리적으로 보이는 그녀의 요구는 단칼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너만 급한 게 아니니 닥치고 줄을 서라는 지극히 합리적인 이유다.


선발대의 모습을 지켜보고는 원래 줄 서던 자리로 돌아왔다. 출발까지 남은 시간과 늘어선 줄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한다. 이러다 비행기를 놓칠 게 분명했다. 어쩌지? 지금이라도 비행기를 포기하고 한 시간 뒤의 것으로 다시 사야할까. 온갖 혼돈이 머리 속을 한 바퀴 헤집을 즈음, 출발시각 10분을 남기고 드디어 출발장 입구를 통과했다.


그런데 또 다시 보안검색대 앞에 길게 늘어선 줄. 왜 이걸 생각 못했을까. 결국 비행기를 놓칠 것이라는 확신이 들자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몸에서 땀이 줄줄 흐른다.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줄기가 선연히 느껴진다. 넥타이를 풀어 슈트 안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래도 흘러내리는 땀을 주체할 수 없어 아예 슈트를 벗어 팔에 걸쳤다. 초조한 눈빛으로 저 줄의 끝만 바라보고 있으니 다행히도 딱 10분만에 기나긴 줄이 끝나고 내 차례가 왔다. 역시 한국이 빠르긴 빨랐다. 그 순간 저 멀리서 들려 오는 승무원의 안내 소리.


"부산행 18시30분 비행기 탑승 마감합니다."


탑승 마감 안내는 보통 방송으로 한다. 그러다 진짜 마감이 임박하면 승무원이 직접 육성으로 마지막으로 안내한다. 그런데 멀리서 선명하게 들리는 저 소리는 방송이 아닌 항공사 직원의 육성이었다. 정말로 그들은 나를 버리고 떠나려고 준비 중인 것이다. 정신이 살짝 아득해져 온다. 어떻게든 1초라도 빠르게 여길 통과해야 한다. 빛의 속도로 바구니에 소지품과 자켓, 가방을 던져 넣고 검색대로 뛰어올랐다.


"가방 속에 노트북은 꺼내서 따로 담아 주세요."


보안검색대 직원의 살짝 짜증 섞인 요구에 정신을 다잡고 다시 가방을 들어올렸다. 지퍼를 열고 노트북을 꺼내 따로 담는데 걸린 시간은 대략10초. 시간의 흐름은 상대적이라 했던가. 그 순간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긴 10초였다.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미친듯이 가방을 열어 노트북을 꺼내 다른 바구니에 담았다. 보안게이트를 통과한 후 양팔을 벌리고 섰다. 기습적으로 올라오는 쿰쿰한 땀냄새에 순간 몸수색을 하던 보안검색 직원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 것 같았지만 애써 무시했다.


검색대를 빠져 나온 가방에 미친듯이 노트북을 구겨 넣고, 에어팟과 지갑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마지막으로 슈트와 가방을 낚아채듯 들고 뛰었다. 저 멀리 내가 타야 할 비행기의 탑승구가 보였다. 그들은 야속하게도 입구를 안내선으로 닫고 있었다. 내 직전에 입장을 마감하던 오스트리아의 어느 미술관에서 겪은 황망함이 떠오른다. 그들은 이제 정말로 나를 버리고 떠나려고 한다. 그러니 더 빨리 뛰어야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운동 좀 할걸. 고작 30미터만 뛰었는데도 벌써 숨이 차오른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들썩이며 휘날린다.


"잠시만요!"


부끄럽지만 외쳤다. 저 탑승구는 완전히 닫혀서는 안된다. 다행히 뛰어오는 나를 보고 승무원이 닫아 잠그던 안내선을 슬며시 열어주었다. 탑승권을 바코드 리더기에 찍고 탑승구로 뛰어 들어갔더니 하필 비행기로의 연결통로가 없다. 또다시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려가 버스를 타야 했다. 계단을 두 칸씩 마구잡이로 뛰었다. 마지막 다섯 계단은 아예 한 번에 뛰어내렸다. 무릎이 찌릿찌릿 아팠지만 참아야 했다.


버스 앞 안내 승무원의 안쓰러운 표정을 뒤로 하고 간신히 비행기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시간을 확인하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핸드폰이 없다. 또다시 정신이 아득해진다. 어떻게 할까. 스마트폰은 나중에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비행기를 포기해야 할까? 고민은 깊었지만 행동은 빨랐다. 지체없이 버스에서 다시 뛰어내려 보안검색대로 달렸다.


"뭐 두고 오셨어요? 그럼 비행기 못 타실 것 같습니다."


버스 밖 승무원의 안타까운 목소리를 뒤로 하고, "어어!! 나가시면 안됩니다! 탑승권을 보여주세요!!"라며 미친듯이 달리는 내 뒤를 미친듯이 뒤쫓는 탑승구 승무원도 뒤로 한채 그저 달렸다. 보안검색대에서 다행히 스마트폰을 찾았다.


"이러시면 안됩니다. 탑승권을 보여주세요."


뒤늦게 도착한 탑승구 승무원의 신경질적인 요구에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얼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탑승권이 없다. 좀 전에 버스에서 스마트폰을 찾으려 주머니를 뒤지다 흘린 모양이다.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라니. 운수 좋은 날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다행히 이 승무원은 탑승구를 마지막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반대로 튀어나와 미친놈처럼 달리는 나를 그대로 쫓아 여기까지 왔다. 탑승권이 없어도 내가 방금 탑승권을 바코드 리더기에 찍고 탑승구를 통과한 사람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음부터는 이러시면 안됩니다."라는 따뜻한 말로 지친 나를 위로해줬다.


다시 승무원에게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일 겨를도 없이, 또다시 뛰었다. 미친놈처럼 뛰었던 덕에 핸드폰을 찾기까지 시간은 잠깐 밖에 걸리지 않았다. 아직 버스가 떠나지 않고 있을지도 모른다.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신물을 억지로 되삼키며, 아픈 무릎을 부여잡고 다시 계단을 뛰어내려 간신히 버스 앞에 당도했다. 아직 버스는 떠나지 않았다.


"물건 찾으셨어요?"


버스 앞 승무원의 따뜻한 호의에 숨을 헐떡이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연신 반복하며 버스에 올랐다. 비행기 좌석에 앉으니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옆 좌석에 앉은 퍼머를 한 중년 여성이 땀냄새 때문에 살짝 얼굴을 찌푸린 것 같았지만 못 본 척 했다. 엉덩이까지 축축한 판인데 오죽했으랴.


비상시 탈출 요령 안내가 이어지고, 이륙 후 항공기가 항속에 이르렀을 때까지도 헐떡이는 숨이 가라앉질 않았다. 그래도 마음은 평온했다. 어쨌든 스마트폰도 찾고 비행기도 타지 않았는가. 예정보다 일찍 집에 도착해 라면과 맥주를 먹기만 하면 된다. 콩나물과 계란 하나를 넣어서. 이만하면 운이 좋은 날이다.


비밀번호를 눌러 현관을 열고 들어오니 마침내 해냈다는 기분과 함께 맥이 탁 풀렸다. 서울 출장의 목적이었던 재판은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저 공항에서부터 우여곡절 끝에 집에 일찍 도착한 나를 칭찬해주고 싶을 뿐이다. 슈트를 벗어 걸려는데 안주머니에 벗어 넣어두었던 넥타이가 없다. 아까 슈트를 벗어 들고 뛸 때 떨어진 모양이다. 보안검색대도 아니고 그냥 공항 복도 어딘가에 나뒹굴고 있을 그것을 찾을 방법은 없을 것이다. 아끼던 넥타이다. 몇 번 착용하긴 했지만 5만원은 할 것 같다. 처음부터 다음 비행기를 탔다면 5만원을 더 썼을 것이고, 대신 우여곡절은 겪지 않았을테고, 5만원상당 넥타이도 잃어버리지 않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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