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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Mar 27. 2023

여자들이여, 당신의 전성기는 아직입니다

59살에 중학교에 입학한 엄마는 올해로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엄마가 처음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는 한자 획순부터 소인수분해와 컴퓨터 활용까지 과목을 가리지 않는 질문을 소화해야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질문의 빈도수가 현저히 줄어들더니 이제는 과외선생 노릇을 그만둔 지 오래되었다. 엄마는 지구과학을 배우면 내가 살고 있는 지구가 실감 나서 가슴 떨리고, 수학을 배우면 명쾌하게 떨어지는 답이 짜릿하다 못해 아름답게 느껴진다고 했다. 문과 이과를 나누던 교과과정을 거쳐 평생 문과의 손을 들며 살아온 나는 도무지 엄마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 얼마 전 통화에서는 엄마가 전교 1등부터 5등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에 대해 말했다. 1등과 2등은 바뀌지 않는데, 3등부터 5등까지가 등수를 계속 바꿔가며 경쟁한다고 했다. 치열하긴 하겠네, 하면서 심드렁하게 듣고 있던 내가 별생각 없이 물었다.


"그래서 엄마는 전교 몇 등인데?"

"나는 4등."

"뭐? 엄마가 그 4등이라고?!"


풍월로만 들었던 전교 345등의 암투가 우리 엄마 이야기였다니, 이러니 내가 엄마를 어떻게 가르치겠는가. 전교 4등 자리를 지켜야 하는 자의 삶의 무게는 그 4등만이 짊어질 수 있는 것이다. 참고로 엄마가 다니는 학교는 갖가지 사정으로 학교에 가지 못했던 사람들이 모이는 중고등학교인데, 아줌마들이 다닌다고 해서 설렁설렁 소풍 가듯 공부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곳은 오직 실력으로 승부하는 치열한 경쟁사회. 아침 7시 반에 열리는 교문 앞에 7시 10분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고, 겨울이면 아직 해도 뜨지 않은 교실에 사각사각 자습하는 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쉬는 시간에도 공부를 하는 통에 누가 크게 떠들기라도 하면 눈치를 준다고 했다.


그런 엄마가 3월 2일에 있을 개학식에서 환영사를 발표하게 됐다. 엄마는 각종 감투와 상장을 좋아해서,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딸 수 있는 모든 자격증을 따고, 낼 수 있는 모든 글짓기 대회에 글을 보냈다. 학생은 부업이고 상장 수집가가 본업인 것처럼 많은 상장을 모았다. 전교생 앞에서 환영사를 발표하는 이번 자리도 희망자가 원고를 제출하면 거기서 발표자를 선정하는 방식이었는데, 수십 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엄마의 환영사가 뽑혔다고 했다. 환영사의 영예는 원고 심사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발표를 위한 오디션도 있었다. 과연 발표라는 것이 글발만으로 커버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지 않은가. 글로 1차에 통과하고 오디션으로 2차까지 통과한 엄마는 고등학생 천 명, 새로 입학하는 중학생 천 명을 앞에 두고 발표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 너무 떨려."

"진짜 그렇겠다."

"이번 중학교 입학식에 엄마가 추천한 사람이 3명 입학하거든."

"엄마 친구가 3명이나 새로 입학한다고?"

놀란 내 반응과는 상관없이 엄마가 말을 이었다.

"한 명은 엄마가 17살에 만났다던 친구고." 엄마는 국민학교를 마치고 바로 서울에 와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17살에는 기모노의 오비를 만들어 일본에 수출하는 공장에 다녔다. 그때 만난 2명의 친구와 함께 40년째 친구 사이를 이어가고 있는데, 그중 한 친구를 중학교에 입학시킨 거였다.

"또 한 명은 시장에서 일할 때 만난 언니고, 다른 한 명은 사생대회 나갔을 때 지나가다가 만난 아줌마거든. 그래서 이렇게 3명이나 입학식에 오는데"

"사생대회 때 지나가다가 만났다고?"

"응, 우리가 밖에 쭉 앉아있으니까 한 아줌마가 말을 걸어서 엄마가 학교를 추천했지. 아무튼 그런데"

"그럼 그 아줌마도 국민학교만 나오신 거야?"

"그렇지."

"그럼 엄마가 번호를 물어봐서 학교 추천해 준 거야?"

"응, 그래서 입학식에 올 건데"


나는 이 서사의 세부 내용이 궁금해 죽겠는데 엄마는 자꾸만 별 일 아니라는 듯 뒤로 넘어간다. 부분 부분 앞으로 되감기를 하며 물어본 사정은 이렇다. 엄마의 학교는 체육대회도 하고 수학여행도 가고 봄가을이면 야외로 사생대회도 나가는데, 엄마가 아줌마를 만난 날은 바로 그 사생대회 날이었다. 한강변으로 나가 잔디밭에 자리를 쭉 잡자 글짓기 대회가 시작되었다. 노트를 무릎 위에도 두고 가방 위에도 두고, 집에서 캠핑용 앉은뱅이 탁자를 가져온 아줌마도 있었다. 쌀쌀한 늦가을 바람을 맞으며 글을 적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불쑥 말을 걸었다고 했다.

"여기는 다들 뭐 하는 거예요?" 한 아줌마가 서있었다.

"고등학교에서 사생대회 하는 거예요." 엄마가 대답했다.

"학교요? 여기가 그럼 다 학생이에요?" 아줌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에 앉아있는 아줌마들을 손으로 휘 훑었다.

"맞아요." 엄마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사람이 평균나이 72세의 학생을 단체로 맞이한 순간을 상상해 본다. 엄마와 아줌마는 그 길로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그리고 3월 2일에 그 아줌마가 중학생으로 입학하는 거다.

"와, 그분도 대단하시다. 거기서 그렇게 말을 걸었네?"

"아줌마잖아."

"아줌마들은 다 그런 거야?"

"응."

엄마가 또 별 일 아니라는 듯 답한다.


그래서 내 질문을 모두 넘기고 엄마가 하고 싶었던 말은 중학교에 새로 입학하는 3명의 친구들 앞에서 멋지게 발표를 해낼 수 있게, 발표 잘하는 법을 가르쳐달라는 거였다. 나라고 발표 잘하는 법을 얼마나 알겠는가. 유튜브에 검색해 보니 다행히 도움이 될만한 영상이 몇 개 보인다. 영상과 함께 발표할 때 주의할 점들을 정리해서 보냈다.

"엄마, 원고를 최대한 잘 외워서 고개 숙이지 않고 청중을 보면서 발표할 수 있게 연습하면 좋을 것 같아."

"감사."

엄마 문자는 늘 답이 짧다.


엄마는 입학소감문을 읽기 전에 첫마디를 어떻게 시작할지 고민했는데, 먼저 영어 공부를 시작한 선배님답게 "헬로, 에브리원~" 하는 인사로 시작하겠다고 정했다. 더 길게 말하면 입학생들이 못 알아들을 위험도 있으니, 아주 적절한 멘트 선정이었다. 그렇게 엄마는 3월 2일에 자신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적었던 입학소감문을 읽었다. 그 입학 소감문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내가 학교를 다닐 수 있다니 눈물이 난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버스 차창 밖 풍경이 달라 보인다
A B C 전혀 몰랐던 글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이들이 학교 다닐 때 가정통신문을 받아 오면
부모 학력란에 "그냥 고졸이라고 써." 말하던 내 목소리
내 목은 자라목이 되곤 했다


'그냥 고졸'이었던 엄마가 이제 당당한 고3이 되어 학생들 앞에서 이 글을 읽는 동안 식장은 눈물바다가 되었고, 우느라 엄마의 발표를 제대로 듣지 못한 신입생들이 앵콜을 외쳤다고 했다. 사회를 맡은 선생님은 이건 콘서트가 아니기 때문에 앵콜은 어렵다며 당황했다. 그렇지만 앵콜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교장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엄마는 환영사를 두 번 연속으로 읽었단다. 환영사를 두 번 읽는 학교. 아줌마들은 원래 다 그런 걸까?


"지금이 내 인생의 전성기인 거 같아." 엄마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 전에는 배우 양자경이 오스카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이런 소감을 말했다. "여자들이여, 당신의 전성기가 지났다는 말을 믿지 마세요." 60이 넘어 전성기를 이야기하는 여자들을 보며 내 인생의 전성기를 기대하게 된다. 전성기를 맞이한 여자들과 비교해 보면 나의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은 것 같다. 지금까지도 인생이 이렇게 재밌었는데 전성기는 시작도 되지 않았다니, 앞으로 또 어떤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까.


지난 8일에는 장미 모양의 이모티콘과 함께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 오늘이 세계 여성의 날 이래.

멋진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 축하해."

엄마는 고맙다는 답장과 함께 이번 학기도 반장을 맡았다고 했다.

"학교 다니는 동안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싶어.

또 아자아자 해보려고."


나는 내 삶의 여자들을 사랑한다. 그들이 개척하는 삶의 형태를 사랑한다. 더 바라고 쟁취하고자 하는 투명한 욕망을 사랑한다. 당신의 전성기는 이제 초입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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