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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지런한백수 Jan 20. 2023

0. 두집 살림하는 중입니다.

설날


 2023년 설은 21일 토요일부터 시작되어 24일 화요일까지 평소보다 길다. 더구나 올해도 백수인 내겐, 평일까지 껴서 좀 더 길게 느껴진다. 작년 초에 강원도에 갔던 날 이후 공부와 시험을 이유로 추석때 방문하지 않은 날이 너무 길었기 때문에 명절이 시작되기도 전 목요일 경기도에서 버스에 몸을 담았다. 아, 그럼 이제부터 시작이냐고? 아니다. 강원도에 가기 전, 경기도에서 집 근처로 거처를 잡으신 할머니댁에서 할머니댁 장 볼 것과 경기도 장 볼 것을 화요일, 수요일 새벽에 모두 주문시켰다.


 경기도, 강원도 이게 다 무슨 말인가?



 나는 두 집 살림 중이다.


 경기도엔 엄마의 가족,

 강원도엔 아빠의 가족이 거처를 두고 있다.


 나는 본래 두 사람이 이별한 이후로, 아니 태어날 때부터 경기도에 본적을 두고 엄마와 함께 지내고 있다. 명절 때나, 아빠의 생신 때 강원도에 오가는 것을 반복하며.


 2023년 설날


 외할머니댁에서 평일내내 잠을 자고 주말엔 집에서 자는 생활이 동생의 방학 중에 반복된지 3주차다. 머리만 대면 잠에 들지만 나름 잠자리는 가리는지라 거실에서 아래 깐 이불, 덮는 이불을 따지며 베개도 곁에 두지 않고 겨우 잠에 들곤 한다. 보통 나만이 그러는데, 17일 밤은 거실 등이 환하게 비춘다. 좀 전까지 엄마와 고스톱을 치느라 피곤함에 눈 밑에가 볼록 튀어나온 할머니는 옆으로 두 손을 볼과 바닥 사이에 두고 야채들을 읊는다. 당근, 버섯, 대구포, 시금치랑 나물은 시장가서 사는 게 나으려나? 보다 이른 명절 준비다. 설은 22일 일요일, 전은 20일 금요일에서 21일 토요일 사이에 부치는데 재료를 17일에 사는 것은 평소와 다른 움직임이었다.


"지금 일단 주문하고, 이거 밤에 주문하면 다음날 새벽에 도착하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꼭 연락하고!"

"목요일에 간다고? 가서 언제오간?"


 옆에서 부족한 거 없나 따져보던 엄마 옆에서 할머니가 자세를 바꾸는 것 없이 피곤한 눈을 꿈벅이며 묻는다. 일요일. 점심 먹고 올지 안 그럴지는 모르겠어. 그제야 할머니가 끄덕인다.


"아빠가 가면 세뱃돈 주간?"


 그러면 질색인 표정으로 대답을 피한다. 할머니 나 29살이거든. 그리고 세뱃돈 준다고 매번 말하잖아. 그럼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히 줘야지. 하나밖에 없는 딸인데. 엄마는 옆에서 필요한 것들을 다 적어두고 저어기 옆으로 가서 노트북 모니터로 하던 일을 한지 오래였다. 나와 할머니의 대화는 열을 낼 필요도, 숨길 필요도 없는 대화였다. 아, 그리고 할머니 뒤엔 가족들이 늦게 잠들어 신이나 TV를 보고 있는 동생이 있었다. 이게 무슨 족보냐 싶지만 이혼한 부부의 자녀, 그리고 재혼한 (전)부부, 그 사이에 태어난 동생. 흔한 이혼가정과 재혼가정에서 보이고 나눠지는 대화였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이러한 대화를 굳이 숨기지 않는다는 점? 동생은 강원도에 가는 나에게 놀리듯 웃으며 묻는다.


"언니, 언니 아빠아빠한테 가?"


 언니 아빠도 아니고 왜 아빠아빠인지는 그냥 말 습관인 것 같다. 그럼 우리집 룰대로 쿨하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필요한 거 있고 엄마 바쁘면 네가 연락하라는 말도 해준다. 동생은 졸지에 자신의 아빠는 아니지만 언니의 아빠라는 사람을 알아버렸다. 호기심의 대상인 거 같기도 하다. 하긴, 이 집에서 온갖 사랑을 다 받으니 언니의 아빠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음에 전화하면 바꿔달란 말을 하기도 했으니. 다시, 할머니와 엄마 이야기로 돌아와보면.


 다음 날, 수요일 밤부터 엄마가 몸살 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프면 단순하게 감기 기운이 아니라 몸살이 찾아와 3일 이상 가는지라 할머니 댁에서 근처 편의점에 가 몸살약과 따뜻한 쌍화탕을 사 자기 전에 먹이고 다음 날에 할머니 앞이어서 괜찮다고 하는 할머니를 뒤로 또 약을 들이 밀었다. 안타깝게도 이 날은 내가 강원도로 떠나야 하는 목요일이었다. 아침 일찍 할머니 댁에서 집으로 가 몸을 씻고, 내 빨래를 담고, 내 빨래를 개고, 평일 동안 내가 낮에 집에서 공부하며 먹었던 식기류들을 설거지 해놓고, 마른 것들을 다 제 위치에 두었다. 뻔히 이날도 아플 엄마가 일을 하나라도 덜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설날 준비용 재료들도 다 냉장고에 담고, 약국에서 쌍화탕과 약도 사고 나니 엄마와 동생이 타이밍 좋게 도착했다. 여전히 어어, 으으, 거리며 몸살의 고통을 느끼고 있는 엄마 앞에서 얼쩡거리기 보다 동생에게 언니가 없으면 할 일들을 읊어주기 시작했다. 말한 걸 고이 종이에 적던 동생이 엄마 돌보기에 신나 히죽거리다가 갑자기 뼈있는 말을 던진다.


"언니는 이럴 때 가고 그러냐"


 맞는 말이다. 왜 내가 강원도에 가야하는데 아프고 그런가. 그러나 엄마가 아프다고 가는 날을 미루기에 강원도에서 또 할 일이 있어 애매한 시점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겐 중요한 이유지만 강원도에 그를 이유로 못간다고 하기에 편한 곳도 아니었다. 그러게, 란 말을 짧게 하고 입을 삐죽였으나 동생은 종이에 내용을 적느라 내 표정을 못 본 듯 했다. 얼마전 사두었던 날치알과 김으로 날치알 주먹밥을 해주고, 냉동 새우를 볶아 주고 배고프면 일단 밥을 푸라! 부터 알려주는 것 모두 동생이 엄마에게 요청할 만한 것들이었다. 동생은 엄마가 아프다는 걸 인지한 듯 뭘 그런 걸 걱정하냐는 말투였지만 우리도 배고프면 예민해지듯 동생은 어리기에 더, 더, 땡강을 피워 미리 여러번 인지를 시켜줘야 했다. 그날 밤, 몸살 기는 있지만 많이 아프지는 않은 듯 만두국도 끓여먹었다는 걸 보니 다행이었다.


 강원도


 강원도에 가기 전엔 늘 짧게 심호흡을 하고 거울을 보는 횟수가 부쩍 는다. 어머니께 가기 전에 언제 간다고 전화 1번, 당일 아침 몇 시차라고 전화 1번, 도착해선 인사. 이 모든 행동 전에 호흡을 한 번 들이마셔주어야 한다. 언젠가, 친구와 약속 중에 어머니에게 전화가 걸려와 받는 내게 친구가 말했다.


"시어머니니?"


 이곳에 웃음을 나타내는 자음을 쓸 수 있다면, 한 페이지를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정말 길거리에서 그 말을 듣고 한 대 맞은 것같기도 했지만 내 일이 아닌냥 웃겼으니까. 아, 내가 어머니와 전화할 때 그래보이는구나. 그 뒤로 몇 해나 흘렀는데 내 태도는 여전하고, 불편함도 크게 사라지지 않았다. 전화할 때면 어느 날은 반갑게 맞이해주었고 어느 날은 뼈가 박힌 말들이 들려왔다.


"오랜만이다. 이러다 얼굴 까먹겠다?"


 처음에 이런 말은 애교였다. 그 다음엔 목소리가 굳었고, 어떤 때는 네가 오든 말든 관심 없다는 말투였으며, 어떤 때는 온다 그래놓고 왜 안 오냐고 소리를 질렀다가 아빠가 일 간다고 오지 말라고 해서 안 간 날엔 아빠가 오지 말란다고 안 오니? 하는 타박하기도 했다. 이건 어머니가 새어머니여서가 아니었다. 몇 해 보니, 그냥 어머니의 성격이었다. 그걸 알고 나니 다음부터 타격이 덜했다. 무심한 말투에도 그냥 난 갔다는 걸 채우면 됐기에 말투에 흔들리지 않았다. 가서 두밤 자고 오면 당분간은 궁색 맞추어 연락드리면 되니까.


 아빠와 새어머니에게 하는 연락인데 의무감과 남을 대하는 것 같다고 하는 지적이 있다면 아주 날카롭다. 그러나 이마저도 아빠와 나 사이처럼 연락의 부담이 없을 때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아빤 집에서 내게 굳이 연락하지 않는다. 일을 하던가, 컴퓨터하던가, TV를 보는 등 자기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주로 일을 하러 운전을 할 때, 내가 생각났을 때 전화를 한다. 그 무뚝뚝한 양반이 그냥 생각나서 전화했어, 라고 하면 운전 중에 한 전화라도 눈물이 찡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의무방어전이 된다. 아빠에게 하면 더 편할 걸 어머니에게 굳이 하고, 간단한 메시지로 끝날 걸 전화로 한다. 이것이, 세상 며느리들의 삶이라면-난..의붓딸이지만- 난 또 못 할 것 같고 그렇네.


 어머니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녀의 성격이구나 넘기며 이해한 것들이 많았다. 내게 한없이 다정했다가, 술을 한 잔 마실 땐 내게 모든 이야기를 하며 세상에 가진 한을 다 이야기 하다가도 다음날이 되면 술에서 깬 아침은 낭만이 없듯, 그렇게 감정도, 표정도 사라진다. 다행히도 술 마시고 다음 날은 떠나는 날이어서, 그 잠깐의 고요함과 무표정을 견딜 시간이 짧았다.


 그럼에도 내가 자주 가는 것이 아니기에 약간의 불편함만 있을 뿐, 한 번 갈 때마다 하루, 이틀 참으면 되기에 어머니에 대한 생각도 아빠에 대한 생각도 엄마에 대한 생각도, 집에 계시는 아버지에 대한 생각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내가 나이가 들었는지, 작년 한 해 공부하느라 다른 생각을 못하다가 이제 할 여유가 조금 생겨서인지 개개인에 대한 생각과 시선에 차이가 생겼다.


 그래서 기록해보고자 한다.


 이혼가정, 한부모자녀, 양가 의붓 아버지, 어머니, 이복동생, 의붓오빠까지.

 외동이었는데 가족이 많이 생겨버린,

 거기다 나를 챙겨준 외가식구까지 하면 더 많은,

 29세의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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