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hrose Feb 01. 2023

흑역사 극복기 1

이제는 무뎌진 소소한 흑역사  

 초등학교 때부터 마음에 드는 친구의 글씨체나 다른 사람의 글씨체를 따라 했다. 관찰력 하나 뛰어난 나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쉬웠다.

인스타 피드나 핀터레스트에 보이는 한 껏 멋있게 작성한 다이어리를 보면 대단해 보였다. 과제를 할 때, 다이어리를 쓸 때, 아이패드에 글씨를 쓸 때 등등..

그러나 금방 질려버리고 애써 남의 것을 따라 하는 노력이 귀찮아지면서 이건 내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는 순간 나로 다시 돌아온다.

전공이 미술이다 보면 모임, 팀플, 과제를 할 때 꾸미기를 요청해 오곤 하는데 글씨를 잘 못 쓰는 나는 그럴 때마다 성가셨고 고역이었다.

아직도 내 글씨는 특징이 없이 어설픔이 묻어난다. 길이가 길지도, 자음이 동글동글하지도, 모음이 수평 수직을 맞추지도 않고, 규칙적이지도 않다.

글씨를 쓸 때마다 불규칙한 모양이 거의 매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글씨를 교정받는 것도 무의식적인 내 것이 아닌 것 같아서 싫었다.

 이번에 구매한 다이어리를 펼쳐서 첫 글씨를 쓸 때도 마찬가지일 뻔했다. 하지만 이번 32살을 ‘나를 위해 살아보자’라는 마음을 먹고 세운 올해 목표 중 하나가 다이어리를 꾸준히 쓰기였기 때문에 글씨 모양보다는 내용이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기로 결정했다. 남들처럼 예쁜 글씨 쓰기를 포기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글씨를 애써 외면하고 내용에 집중해서 하루 이틀 쓰는 게 이어지다 보니 이제 글씨는 크게 신경 쓰이지 않고 체크리스트를 제대로 이행했는지, 글의 내용이 어떤지를 중점적으로 보았다.

  

.


 유년 시절 수련회 가서 밧줄을 잡고 우물을 건널 때가 떠오른다. 우물을 넘어가려면 물에 닿지 않게 무릎을 굽히고 발을 제대로 들거나, 힘차게 발을 디뎌서 우물을 넘어갈 때쯤 손에서 밧줄을 놓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다리를 제대로 굽히지도, 힘차게 발을 구르지도, 밧줄을 놓지도 못해 그대로 물에 빠졌다. 주변에 있던 아이들 모두가 웃었다.

신체활동보다는 외모에 신경을 만이 쓸 때라서 옷은 어찌나 예쁘게 보이고 싶었던지 수련회를 간다고 손수 고른 옷이었는데 다 젖어버렸다.

그때는 수련회의 취지를 무시하고서라도 예쁜 옷을 입고 그렇게나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그 이후로도 쭉 학교 체육 시간에 하는 신체 활동들은 피하고만 싶은 일이었다. 그나마 쉽게 할 수 있는 게 줄넘기였고 뜀틀 뛰기는 도움닫기부터 실패, 멀리 뛰기 아닌 폴짝 뛰기, 저조한 달리기 기록의 연속이었다.

초등 시절 어릴 적 남편과 배드민턴을 더블데이트로 한 적이 있는데 내가 너무 못해서 미안해했던, 나 빼고 3명이서 재미나게 핑퐁 했던 슬픈 기억이 있다.

나는 이제까지 운동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고 믿어 왔는데 나이가 들고 이런저런 운동을 시도해 보면서 체력, 심폐지구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제법 몸동작, 근육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운동 신경이라는 것이 내 유전자에 존재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


연애를 할 때도 난 어설펐고 어리숙했다.

그 시절을 생각해 보면 내 언행이 소신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 게 아니라 대부분의 니즈가 앞사람에게 맞춰져 있어서 오히려 뭘 하든 나의 행동은 더 헤맬 수밖에 없었다.

얘는 내가 무슨 반응을 하고 어떤 말을 할 때 좋아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아무 말도 행동도 못 하는 때가 수두룩했다. 얼굴만 예쁘장하지 조용하고 말이 없고 솔직한 자기표현을 하지 않는 다소 흥미롭지 못한 여자 친구였다. 20대까진 금방 식어버리는 남자들의 마음을 무조건적으로 비난했지만 남녀관계라는 게 어느 한쪽에만 절대적 문제가 있지는 않지 않나.  

 남편도 나를 닮았던 거 같다. 잘생긴 편이었지만 자기 외모에 만족할 줄 몰랐고 이성을 대할 때 능숙하지 않았다. 수줍어서 귀여운 구석이 있고 배려심이 깊지만 말과 행동이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고 2프로 부족한 다정한 행동이 어리숙해서 오히려 나를 당황시켰던 것 같다.

그래도 남자친구들 중에 가장 어설펐던 그러나 왜인지 모르게 계속해서 끌렸던 사람이 남편이다. 지금은 내게 누구보다도 가장 재미있는 사람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나에게 솔직한 표현을 해주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연애 초반 남편도 나의 편의에 올인하려는 배려심, 나에게만 맞추려는 노력들로 인해 대화 내용이 오히려 매우 단조로웠고 지루했었다. 졸리고 다정하고 지루하고 따뜻한 얼음 조금에 뜨거운 물을 부었을 때 느낌처럼 애매했다. 우리라고 처음부터 잘 맞지는 않았지. 긴 시간이 지나면서 우린 서로에게 조금 더 솔직해질 수 있었고 시답지 않은 농담 따먹기를 할 수 있게 되면서 이제 다른 남자 사람들과의 대화가 재미있지 않을 정도로 서로에게 최적화 돼 있다.


.

.


The past can hurt,

But I think you can run away or learn from the past.


과거는 아플 수 있지.

하지만 너는 과거로부터 도망칠 수도, 무엇인가를 배울 수도 있어

-<라이온 킹> 中


심리상담을 하면 상담 선생님의 질문에 따라 자꾸만 이야기가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

여러 번의 상담을 하고 나서는 내 과거를 한 뼘 멀리 서서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의식적으로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는 행동을 하다가도 문득, 스스로에게 잊고 싶은 사소하지만 끔찍한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다.

잊자고 마음만 먹어서는 잊어지지 않기에 흑역사 극복기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더라.

매 순간 흑역사만 곱씹으며 살지는 않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일종의 동기부여 수단이기에

나의 이야기를 어디든 글로 남길 수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쑥쓰러우나 반면 축복이고 행복한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카페에서 쓰는 글 ep.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