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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rose Feb 09. 2023

자아실현은 과연 사치인가?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2010년작으로 자아를 찾아 나서는 중년의 여성 역할을 줄리아 로버츠 배우가 맡아 명연기를 펼친 영화다. 유부녀 뉴요커 여성이 자신에게 맞는 삶을 찾아나가고자 이혼을 감행한  로마, 인도, 발리 여행을 하며 다양한 종류의 사랑에 빠지는, 결국 삶의 균형을 점차 찾아가는 내용이다.  영화에 대해 비현실적이라며 좋지 않은 평을 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지만 개인적으로는 인상 깊게  영화이다. 여주의 감정 흐름이 실제 여자들이 느끼는 감정들과 굉장히 맞닿아 있다고 느껴 오히려 현실감이 있었다. 어리숙하고 단순한 생각의 플로우가 오히려 인간적이느꼈다. 영화를 비난하는 댓글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나름의 방식으로 자아실현을 하고자 모험하는 것이 과연 사치인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영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자가 부자이기 때문에 1년이라는 시간을 통으로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굳이 꼬집는다. 이혼당한 남편을 비롯한 그녀에게서 버려진 남자들은 여자에게 희생 됐다며 그녀를 비난한다. 또한 여주가 자아를 찾지 못하는 이유를 사랑에 몰입하게 하는 남자의 잘못으로 책임을 전가했다고 비판한다. 발리에서 이혼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며 친해진 과부 민간요법 치료사를 위해 자신의 생일을 맞아 친구들에게 모금을 하여 그녀에게 집 지을 돈을 주는 것은 일방적이고 섣부른 연민, 자신을 드높이기 위한 일종의 적선이라고 비판했다.

 어느 컨텐츠에 가든 악플은 있기 마련이지만, 위와 같이 비판하는 사람들의 속내를 들여다보자면영화감독과 가상의 내용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쏘고 있지만, 되려 반대로 자신이  뾰족함에 아파하지 않았을까. 사실은 자신들의 인생을 합리화하려면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바람을  것도 아니고  많다고 재력을 뽐내며 허세를 부린 것도 아닌데  그렇게 열을 올리며 비난할까. 감독이든 영화 여주인공이든 어느 누구도 여주와 같은 삶을 살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인간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의 균형을 찾아나가기 위한 여정이다.


 100년이나 되는 인생에 단 1년의 휴식 시간도 줄 수 없는 삶, 과연 그 인생을 진정으로 알차고 보람 있는 여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긴 휴식기를 가지고 난 이후의 삶은 각자가 책임지고 살아야 할 몫. 사람들은 너 나중에 두고 보자 그렇게 쉬어서 전보다 더 잘 살 수 있는지 지켜보게. 라는 쓸데없고도 날카로운 관심을 기울인다. 심지어 현실에 있을 법한 스토리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그녀의 일상과 여행을 비현실적이라고, 배부른 고민을 한다며 분노한다.

 사람의 고통과 힘듦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나의 고통을 다른 사람이 겪어줄 수도 온전히 공감해  수도 없다. 내가 느끼는 것만이 전부이다. 삶의 고통을 덜어내고자 자아를 실현한다는 것은, 매일 습관적으로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 속에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무엇인지, 분명하게 분간하여 현명히 살아나가는 법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떠한 형태이든(내가 맡고 싶었던 프로젝트에 매진하여  마치는 것이든, 현명한 쇼핑이든,  없이 시작하는 무전여행이든, 원데이클래스든,  분의 명상이든, 휴양지에 가거나 자연을 보며 멍을 때리든, 산을 오르며 심폐지구력을 상승시키는 것이든  무엇이든)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나가는 것이다.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1 동안 해외여행을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느 누가  하겠는가. 그런 사람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자신은 그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혹은 돈은 있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영화에 대고 화풀이하는 것이 아닐까. 불평만 늘어놓는다고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


 또한 여주와 사랑했던 남자들을 굉장히 불쌍해하고 여주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도 상당히 불편하다.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만큼 자신도 모르던 나의 다양한 내면, 보잘것없는 모습, 자존심, 고집, 애정결핍, 유약함 등 하수 같은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서 진짜 자신의 바닥까지 마주할 수도 있다. 그렇게 타인에서 비롯된 여러 번의 사랑의 에피소드를 거치면 스스로 결핍, 두려움, 기대감, 충만함, 신뢰감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면서 오히려 진정으로 원하는 내 모습을 차분하게 찾아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영화의 여주인공도 그런 차원으로 여러 남자와 자연스레 만나고 헤어지면서(환승도 바람도 아니었다) 이기적이었던 과거의 부족했던 모습들을 인정하고 종국에는 자신을 용서하려 노력한다. 물론 여주가 자아실현 하고 싶다며 갑작스레 이혼 사유를 제공하긴 했으나, 만약 이혼을 하지 않았다면 과거의 여주는 결혼 생활 동안 내내 불만족스럽고 고통스러운, 부정적 기운을 내뿜으며 남자를 불안에 빠지게 했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여주는 과거의 자신을 반성할 필요는 있겠으나 그녀와 헤어진 후 아픔을 겪는 남자들의 나날들과 감정까지 책임질 이유가 없다.

 영화 후반부까지도 여자는 자신이 자아를 찾지 못하는 이유를 깊어지는 이성과의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여자가 지금까지 만난 남자들은 모두 스윗하고 누구보다 여자를 열렬히 사랑해 준다. 그러나 여자는 사랑에 깊게 빠지게 되면 그 마약 같은 감정에 휘둘려, 결국 명상과 루틴한 삶으로 어렵게 찾아낸 내면의 평화가 깨질 것이라고 두려움에 떨며 소리 질렀다. 그렇다고 여자가 자신의 고통이 남자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자가 괴로워하는 이유는 모두 본인의 두려움과 이기심에 있으며 여주도 그 사실을 아는 듯하다.

 첫 번째 남자와 그렇게나 이상적으로 그리던 결혼을 했으나, 교육대학원 생각을 하는 남편을 내조하며 애를 낳고 안정적으로 사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져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이라고 느낀 것은 남자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결혼에 실패했던 이유는 마치 마냥 예쁜 힐을 꾸역꾸역 신느라 애썼던 20대가 저지르는 내 발 모양을 잘 모르고 했던 실수와 같은 것이다. 함부로 사랑에 빠졌던 요기니 2번째 남자와는 서로 맞지 않는 생활 방식 때문에 괴로운 나머지 헤어진 것이지 그 남자 때문이라고 한 적은 없다. 너와 나는 잘 맞지 않지만 그냥 참고 견디며 같이 있자는 남자의 말에 안 맞는 옷을 입은 듯 숨이 막히는 답답함을 느꼈던 것뿐이다.


 여자는 말한다.

쉽게 살고 싶은 것이 아니야, 괴로운 게 싫은 거지.’

어떻게 보면 철없지만, 어떻게 보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담아내는 이라고 느꼈고 나 또한 같은 마음이다. 우리는 치열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다 보니 인간의 당연하고 기본적인 욕구를 적절히 충족하고 균형을 잡아나가는 것에 소홀할  있다.  기본적인 욕구들  하나가 자아실현으로, 기나긴 인생을 보다  괴롭게, 의미 있게   있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자아를 찾는다는 것은 마치 뒤섞여있는 옷장을 시간을 내서  손으로 정리하듯, 정말 싫어하고 좋아하는  무엇인지 구분하고 내가 감내할  있는 일과 그렇지 못한 일을 흐릿한 안경을 안경 닦이로  , 분명하게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남이 해줄  없는 부분이며 지긋한 나이가 되고도 남은 일생동안 고민하고 여행하고 독서에 매진해야 하는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생각이 많고 복잡하게 피곤하게 사냐며 걱정받기엔 이미 늦었다. 욕구 피라미드  상단에 있는 자아실현의 욕구 단계에 발을 디딘 사람들에게 그런 말은 효과가 없다. (그렇다고 상단의 욕구를 쫒는 사람들은 모두 하단의 욕구들이 완벽하게  충족된 상태라고 하기엔 어렵다. 진정한  모습을 찾게 되면 기본적인 의식주에 대해 감사하게 되고 환경을 쾌적하고 유쾌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하게 되기도 하니까)

 나름대로 영화의 혹평을 반박하고자 하는 글을 써보니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 알겠더라. 의식주, 안전, 소속감 욕구를 충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쏟아내는, 배불리 살아서 만족을 모른다는 비난에 영향받으며 그들의 기준에 살아갈 생각 없다. 훗날 혹시 가세가 기울어 일상이 힘든 순간이 온다면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해  문제이니까. (현재  삶에 감사할 줄은 알아야 하기에 명상을 하거나 요가를 끝낸  사바아사나를   속으로 감사함을 되뇐다. 가족들을 만나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선물을 해주는 것에 인색하게 굴지 않는다)

 인간은 어느 정도의 고통까지 얼마나 인내하며 살아야 하는지 고민스러워 머리를 싸매고 헤매는 순간이 닥쳐오기 마련이다.  정도 힘든 것은 감내하고 살아야 하는지,  정도면 내가 벗어나도 되는 순간인지.  기준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고민스럽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주 싱겁게도 그것은 누가 대신 알려줄 수도 없고 스스로 여러 번의 반성과 고민 끝에 결론 내려야  부분이라고 밖에   없다. 비록 힘들더라도 내가 감내할  있고 인내하고 싶은 일이라면 기꺼이   있다. 그러나 조금만 힘들어도 도저히 이런 일을 하며  여생을 보낼  없고  마음은 이미 여기서  멀리 도망가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죄책감을 느끼지 말고 용기를 내볼 때이다. 과거   번의 선택으로 훗날의 완벽하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빚어낼  있다고 믿는 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이고 어리석은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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