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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선열 Oct 21. 2024

만약에  그 약속을 하지 않았더라면

-첫 직장이 결정되었다-

등대


 나이 들면 추억에 산다더니 요즘 들어 종종 옛일들이 떠오르곤 한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는 일이 잦다. 천성이 낙천적인 편이니 어려웠던 일들이 떠 올라도 후회하거나, 다른 사람을 원망하기보다는 ‘그만했으니 다행이야!’, 하거나 ‘다음에 잘하면 되지 뭐’

하고 자신을 위로하는 편이다. 그런데도 만약에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런 약속을 하지 않았을 거 같은 일이 하나 있기는 하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던 시절의 일이고 그 일 때문에 삶의 터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더라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가끔 궁금하다.

대학 졸업 반이었다. 지나간 후의 청춘은 아름답지만, 막상 그 시절로 돌아가라면 선뜻 나설 수만은 없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장래의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힘든 시기였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해야 했고 의무와 책임의 무거운 짐을 의식해야 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또래의 젊은이들이라면 통과의례처럼 같이 겪어내야 할 시간이다.

무엇보다 진로를 결정하기 위해 무수히 고민했고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청춘이 가능성이라고 말하지만, 현실적인 제약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현실은 우리 앞에 놓인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사대 졸업반이었던 나는 상대적으로 교사라는 안정된 직업이 보장된 편이었다. 당시는 지자체별로 교사 순위 고사가 있었다. 사대 졸업생들이 교사 발령 순위를 결정하는 시험이다.

지방대 졸업반이던 나는 서울로의 진출을 꿈꾸었다. 서울에는 언니가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고 동생들의 유학도 고려하고 있었으니 기왕이면 서울에 취업하고 싶었다. 내심 대학원 진학의 꿈도 있어 서울과 지방에서 두 번 순위 고사를 치르기로 했다, 서울은 경쟁이 심했지만, 지방은 비교적 쉽게 교사 발령을 받을 수 있었다.      

70년대 중반이니 그 당시만 해도 오늘날처럼 교통이 편하지도 숙소가 많지도 않아 서울에서 순위 고사 치르기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숙소를 마련해야 했으며 시험 당일뿐만 아니라 결과가 발표될 때까지 일주일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시험은 1차 필기시험 후 합격자들이 2차 면접을 보고 최종 합격자가 결정되었다.

1차 시험은 전국에서 몰려든 수험생으로 경쟁이 심했다. 거의 10:1의 경쟁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차 필기시험이 끝나고 합격자 발표까지는 일주일 정도 시간이 걸렸다. 언니는 친구와 같이 자취를 하고 있었다. 좁은 자취방에서 며칠을 같이 지낼 형편도 아니었고 맞벌이하는 엄마를 도와드리고도 싶었고 며칠 후 합격자 발표를 보러 다시 와야 하는 게 부담스럽기는 했다. 당시 합격자  발표는 교육청 게시판에 했다. 전화도 없었고 서류 통보도 없었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게시판을 확인하는 방법뿐이었다. 마침 아버지 친구분이 교육청 장학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서로의 형편을 잘 아는 아버지 친구분이니 흔쾌히 합격자  발표를 보아주시겠다 약속했다. 교육청은 바로 순위 고사를 관장하는 기관이다. 누구보다 먼저 정확하게 합격 여부를 알 수 있고 아버지가 근무하는 학교에 알려주기도 어렵지 않다. 나는 안심하고 집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마침 지방 순위 고사에 합격했다는 통보가 와서 마음이 놓이기는 했다. 발표날 아버지 친구분은 미안해하며 불합격 소식을 알렸다, 서운하기도 했고 아버지 친구분께 누를 끼친 거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지방에서 교사 발령을 받아 첫 월급을 타면 인사를 다녀와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졸업증명서를 떼러 학교에 간 날 서울에서 출강하시는 교수님을 만났다. “축하한다, 지방에서는 너 하나 합격했더라” “네? 저 아닌데요” “아니긴 너 하나 합격인데 혼돈할 리 없지 “ 

부랴부랴 서울교육청으로 전화를 넣었더니 1차 합격이 분명한데 2차 면접을 포기해 불합격 처리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전후 사정을 설명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버지 친구분도 잘못을 안정했지만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언니도 미안해했다. 그럴 줄 알았으면 불편하더라도 며칠 서울에 머물렀어야 했다고 아쉬워했다. 약속을 소홀히 여긴 아버지 친구분에게 원망을 퍼부었다. 내가 오히려 언니를 진정시켜야 했다. 지방에서 근무하다가 서울로 오고 싶으면 내년에 다시 시험을 치겠노라고 장담도 했다. 

지방에 근무하며 다시 서울로 올라갈 기회를 보았지만, 그 후 삼 년 이상 서울에는 지리 과목 순위 고사가 아예 없었다. 삼 년 이상을 년 말쯤이면 순위 고사 준비에 매달리며 대학원시험을 포기했으니, 서울로 직장을 옮기지도 못했고 대학원 진학도 하지 못했다.     

평소엔 잊고 지내는 일이지만 일이 잘 안 풀리던가 마음이 울적해질 때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했더라면 대학원 진학도 하고 삶의 방향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두 갈래 길에서 어떤 길을 가던 못 가본 길에 대한 후회는 남는 법이다. 당시 내가 서울로 갈 수 있었다고 해도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반드시 좋은 일만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약속을 소홀히 한 사람 때문에

받은 불이익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약속은 감당할 수 있는 약속이어야 한다. 소홀히 한 약속 때문에 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마음이 약한 나지만 약속만큼은 지킬 수 있을 때 하려고 노력한다. 인정에 이끌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섣불리 하면 상대방의 편의를 봐주겠다는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상대방에게 피해가 될 수도 있다.     

그때 내가 서울로 갈 수 있었다면, 아버지 친구분과 약속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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