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즈음 -
흰 눈썹이 났다, 정말 늙나 보다. 오고야 말일이 오고야 말았다. 흰머리칼까지는 그러려니 넘어가겠는데 천년을 살아내는 산신령처럼 흰 눈썹이 나고 말았다.흰 머리카락을 감추기도 하고 뽑기도 하고 새치커버용 화장품을 사용하기도 하며 염색을 피해 가려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70이 훌쩍 넘어 버렸는데 아직 염색을 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건 ,또래의 사람들보다 노화가 더디 오는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노화의 조짐이 어찌 머리카락뿐이겠는가? 스스로 느끼는 노화의 증상이 온몸 구석구석 나타나고 있다
처음 노화 판정을 받은 건 눈이었다. 갑자기 글씨가 두세 겹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일시적인 증상이라고 생각했지만 안과 선생님의 진단은 분명하고 거침이 없었다.
"노안입니다" "노노노노노 안 안 안 안 안" 메아리쳐 들려올 만큼 충격적이었다. 나이 40대 중반에 신체의 노화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다. "돌팔이" 애꿎게 안과의사를 매도했지만 돋보기를 사용하여 눈이 편해지는 걸 경험하고서야 내 몸속에 노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깨우쳐졌다.
"아직은 아니야, 눈이 워낙 좋았으니까 평균쯤으로 내려가는 거지,특별히 나쁜 건 아니야, 노화라니, 어림없어" 끊임없이 속으로 항변을 하기도 했다
처음이 어렵지 다음은 비교적 쉽게 인정해야 하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건망증, 손에 휴대폰을 들고 통화를 하면서 눈으로는 두리번두리번 휴대폰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고 냉장고에는 같은 채소들이 쌓이기도 했다, 연거푸 양파나 상추를 사들이기도 하고 김치 거리를 쌓아두기도 했다. 외출 시에 여자의 생명이라는 핸드백을 놓아두고 귀가하는 일도 있었다.
걸음거리가 느려지기도 했다. 급한 성격이어서 남보다 빠른걸음이었는데 옆을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같이 걷고 있던 젊은사람들에게서 뒤쳐져 걷고 있는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끙' 자리에서 일어나며이상한 소리를 내기도 하고 '에구구' 혼잣말을 하기도 한다 .
덥거나 추운 상태를 견디는 힘도 약해졌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지낼 수 있던 겨울 날씨나 땀을 내고 시원해지던 여름날이 없어졌다.환절기에는 카디건이나 작은 손부 채라도 있어야 외출이 가능해졌다.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이었지만 그 순간은" 늙었나봐"스스로 인정 하면서도 어쩌다 한번이니 그러려니 잊고 말았다.
이제는 혼자 느끼는 감각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노화의 과정들이 표면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리에 쥐가 나기도 하고 방아쇠수지 증후군이라는 손가락에 나타나는 질병이 생기기도 했다 눈앞에 날파리가 날아다니는 비문증을 겪기도 했다
'관절염도 없고, 오십견도 없고 고혈압도 없고 당뇨나 고지혈 중도 나타나지 않으니 아직은 건강한 몸이야그 흔한 갱년기 증상도 겪지 않고 수월하게 보냈잖아 ' 변명하면서도 늙어감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다
다행히 흰머리는 늦게 나는 편이다. 새치커버하느라 별의별 수단을 다 쓰고는 있지만 아직 공식적인 염색을 해 본 적은 없다.
" 나 아직 염색 안 해, 이젠 해야겠지?' 노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자랑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흰머리가 이렇게 내 노화를 인정하는 마지노선이 되어주고는 있지만 내심 내가 정해 놓은 한계는 있는 법이다.
'흰 눈썹은 천년을 사는 산신령의 상징이야, 흰 눈썹이 나면 정말 노인이 되는 거지 '했는데 그 흰 눈썹이 한 톨 발견된 것이다. 아직은 풀꽃처럼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다. 뽑을까? 잠시 망설이기도 했다
"머리 염색하며 눈썹도 염색해야겠다 "일찍 흰 눈썹이 난 친구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여기저기 신체의 노화로 불편을 겪고 있지만 늙어 가는 게 꼭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닌 거 같다. 의무와 책임에 묶여 앞만 보고 달리던 젊은 날에서 나를 돌아보는 여유가 생기는 시간이 좋다. 글 쓰기가 대표적이다. 잘 써야 한다는 욕심때문에 한줄도 쓸 수 없었던 부담에서 벗어났다. 나지신을 표현해 보는 일이 좋아졌다. 쓰다보면 생각이 정리되기도 하고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내 안에 이런 런생각과 감정이 들어 있었구나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흰 눈썹 발견으로 잠시 당황하는 시간을 보냈으니 '이젠 정말 늙었다 ' 인정하고 나이 들어서 좋은 점들을 즐겨 보려 한다 젊어서 미처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나이 70을 맞이하는 건 나도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