텀블벅 펀딩 잡지 <NERD> 기고글
일상을 예술로, <패터슨(2016)>
우리는 이따금 일상의 궤도로부터 이탈하는 것에 동경을 품는다. 일상은 지루하고 똑같은 하루의 반복이라고 여겨지기에. 하지만 차분하게 살펴보면 반복되는 듯한 일상 속에서도 미묘한 균열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닮은 듯 다른 하루하루는 겹겹이 쌓여 우리의 삶을 구성한다.
<패터슨>의 주인공 패터슨은 버스를 운전하는 시인이다. 시인이나 예술가라는 이름은 평범하지 않은, 독특한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패터슨의 삶은 일탈과는 거리가 멀다. 6시 10분 즈음 일어나 간단한 출근 준비를 하고, 직장에 출근해서 버스 운행을 시작하기 전, 잠깐 시를 끄적거린다. 점심시간에는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는다. 퇴근 후에는 아내와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 뒤 강아지를 산책시킨다. 산책 길에 펍에 들러 맥주를 한 잔 마시는 것도 매일의 일과이다. 영화에서는 이런 하루가 일곱 번이나 반복된다. 패터슨의 직업은 버스 기사다. 정해진 노선을 따라 움직이는 버스의 반복 운동에 일탈이 끼어들 틈은 없다. 이렇게 일탈과는 거리가 먼 단조로운 삶 속에서도 패터슨은 영감을 얻고 시를 쓴다.
시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은 운율이다. 운율은 반복을 통해 얻어지지만, 반복이 곧 운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동어의 반복은 ‘나열’이지 ‘리듬’이라고 볼 수 없다. 운율의 형성을 위해서는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것들의 연속성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패터슨이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시를 쓸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일상의 리듬 속에서 변주를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패터슨은 대체 어떻게 평범한 삶 속에서 그 차이를 발견하는 걸까?
첫 번째 방법은 애정이다. <패터슨>에는 반복적으로 쌍둥이라는 모티프가 차용된다. 출근길에 스쳐 지나가는 할아버지부터, 펍에서 만난 청년들, 그리고 패터슨과 시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꼬마 아이까지, 영화에서의 비중에 상관없이 많은 인물들이 쌍둥이다. 무심하게 지나친다면 그저 똑같이 생긴 두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개별적인 존재들 간의 차이가 도드라진다. 출근길에 마주친 할아버지들 중 한 명은 패터슨의 아침 인사를 친절하게 받아주는 한편, 다른 쌍둥이는 다소 퉁명스러운 자세와 표정으로 그를 응시한다. 펍에서 만난 형제들 역시 도저히 구분할 수 없는 외모를 가졌지만, 대화를 통해 비로소 형은 샘, 동생은 데이브라는 구분되는 이름으로 인식된다. 퇴근길에 만났던 꼬마 시인은 이제 폭포 사진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특별한 누군가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그들이 구분되고, 특별해진 것은 패터슨이 관심을 갖고 그들에게 다가갔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할아버지들께 인사를 하지 않았다면, 펍에서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혼자 앉아있는 아이와 함께 엄마를 기다려주지 않았다면, 그 쌍둥이들은 비슷한 외모의 두 사람일 뿐이다. 무심하게 대할 때는 보이지 않던 작은 차이들은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반복되는 하루는 항상 침대 위 장면에서 시작한다. 다 비슷한 장면 같지만 디테일은 차이가 있다. 하루는 패터슨이 로라를 꼭 안고 자고 있고, 다른 날엔 서로 얌전히 마주보고 잠들어 있다. 어떤 날은 로라가 컵케이크를 굽느라 패터슨 혼자 침대에서 잠을 깬다. 틀 자체는 비슷하지만 조금 더 유심히 감각할 때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침대 장면이 다가 아니다. 패터슨이 운전하는 버스의 승객들도 디테일에서 차이를 빚는다. 영화가, 패터슨이 그들의 대화를 무시하지 않고 담아 내기 때문이다. 무정부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청년들, 관심있는 여자에 대한 얘기로 정신이 없는 남자들... 덕분에 그 이야기를 들은 패터슨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승객 한 명 한 명을 각자의 특색을 지닌 캐릭터로 인식하게 된다. 패터슨의 귀는 그 대화들을 흘려보내지 않고 잘 담아둔다. 아마 언젠가 그들의 대화는 패터슨이 쓰는 시의 재료가 될 것이다.
마빈과 산책을 하던 어느 밤, 패터슨은 빨래방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비트박스 소리를 듣는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걸음을 빨리할 법도 한데, 패터슨은 오히려 발걸음을 늦춘다. 그리고는 가만히 그 랩을 감상한다. 빨래방 래퍼는 랩을 하다가 잠시 멈추고 ‘No ideas but in things’라는 말을 몇 번이고 읊조린다. 이는 ‘관념이 아닌 사물 그 자체로’라는 말로, 패터슨이 좋아하는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의 작품 세계를 대표하는 말이다. 윌리엄스는 세상을 과장하거나 추상화하기보다 객관적으로 묘사할 것을 강조했던 시인이다. 패터슨이 일상에서 시를 포착하는 두 번째 방법. 일상의 객관화이다. 윌리엄스가 지향했던 시처럼, 패터슨의 시 역시 담백하다. 패터슨은 운명이나 극적인 절망에 대해 이야기하기 보다는, 성냥갑과 바에서 매일 마시는 맥주에 대한 시를 쓴다. 세계의 디테일을 뭉그러뜨리는 추상적인 언어가 아닌, 일상의 익숙한 언어로 묘사하는 것. 장엄하고 위대한 아름다움 보다는 작고 평범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패터슨이 창작하는 작품들의 특징이다.
패터슨은 흥분하는 법이 없다. 이는 객관적인 눈으로 차분한 시를 쓰는 시인에게는 필수적인 덕목이다. 외부의 크고 작은 사건들에 즉각적으로 흥분하는 사람은 미세한 균열들을 감각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스포츠카를 타고 달려가면서 지난주보다 손톱만큼 더 자란 들꽃의 성장을 파악해 낼 수 없듯이 말이다. 뿐만 아니라 <패터슨>이라는 영화 자체도 패터슨이 쓰는 시처럼 차분하고 담백하다. ‘영화’라면, 아내 로라와 갈등이 생기거나, 강아지 마빈이 납치되는 일 정도는 일어날 법도 한데, 그런 사건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감독 역시 패터슨처럼 평범한 아름다움을 작품에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 조용한 영화에서 그나마 가장 극적인 사건은 마빈이 패터슨의 노트를 찢어 놓은 일이다. 하지만 그 때에도 패터슨은 화를 내지 않는다. 그저 마음을 정리하기 위한 산책길에 나설 뿐이다.
시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리듬’은 서로 닮았지만 다른 연속체들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러니 비슷하고, 지루해 보이는 우리의 일상은 사실 리듬을 찾아내기에는 최적의 조건이다. 패터슨은 자신의 애정 어린 시선을 통해 평범한 삶의 리듬을 자신의 내면 세계로 끌어온다. 그리고 다시 그 내면 세계는 패터슨이 창작하는 시에 녹아 든다. 패터슨의 이름, 그가 사는 도시 패터슨, 윌리엄스의 시집 이름이 모두 같은 것은 세계와 개인, 그가 창작하는 예술 사이의 연관성을 드러내는 소재인 것이다. 또한 그는 특유의 차분한 성격과 표정으로 일상을 살아간다. 그 관조적인 태도로 일상의 작은 균열들을 발견하고 예술로 승화해내는 것이다. 애정을 갖고 예민하게 감각하기 위한 노력을 통해, 우리 역시 일상 속에서 미세한 차이들을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작은 변주들은 모여 한 편의 시가 될 것이다. 패터슨이 그러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