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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구 Oct 26. 2021

한때 모두 아이였던 우리는

텀블벅 펀딩 잡지 <그래도 우리는> 기고글, 영화 <미나리> 리뷰

<미나리>의 화면은 맑고 찬란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겪어온 어린시절은 아름다운 장면만으로 치환되지는 않는다. 두 시간 동안 데이빗과 그 가족이 겪는 먹먹한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잊고 지내던 불안하고 때로는 우울했던 유년의 기억이 재생(再生)된다.


Crack 1. 세계의 불완전함을 깨닫기.

아이에게 부모는 완전한 존재다. 하지만 부모도 사람이기에 싸우고, 울고, 실패한다. 그들의 불완전함이 드러나는 순간, 아이의 세계는 무너진다. 그래서 모니카와 제이콥이 싸우던 날, 폭풍우에 위협받던 집은 그저 집이 아닌, 데이빗의 세계였다. 흔들리는 세계를 폭풍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데이빗은 종이비행기를 날린다. 폭풍우에 젖어버릴, 나풀거리는 종이비행기로 데이빗은 전력을 다해 자신의 세계를 지킨다.

공장에서 ‘쓸모 없는’ 수평아리를 능숙하게 골라내는 제이콥은, 그 자신도 결국엔 쓸모 없음을 불안해하며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발악하는 한 마리의 병아리이다. 아이들 앞에서는 늘 강해 보이던 모니카 역시 순자 앞에서는 ‘잘 살지 못해 미안하다’라며 흐느끼고, 아이들은 문틈으로 엄마의 울음을 목격한다. 부모의 불안과 슬픔은 아이들에겐 온 우주의 불안이고 슬픔이 된다. 이제 완벽한 세계는 무너졌고, 이 세계에는 다툼과 불안과 우울이 존재한다. 


Crack 2. 불쾌함과 공존하기.

순자는 어느 날 갑자기 데이빗의 세계에 침범한다. 달콤한 쿠키가 아닌 역한 냄새의 한약을 권하는 순자는 불쾌한 존재다. ‘Grandma smells like Korea’. 데이빗에게 

아직은 낯선 존재인 할머니의 냄새는정겹거나 그립지 않고, 낯설고 불쾌하게 느껴진다. 데이빗은 ‘냄새나는’ 할머니와 방을 함께 쓰기를, 그러니까 자신의 세계에서 이 불쾌한 존재와 함께 살기를, 완강히 거부한다. 게다가 이 ‘침입자’는 구수한 입담으로 욕을 내뱉고, 심장이 약해 모두가 애지중지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던 데이빗에게 마운틴 듀를 가져오라며 심부름을 시킨다. (결국 데이빗은 소변을 마운틴 듀로 속여 이 ‘침입자’를 응징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한약 먹기처럼 못마땅해도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고, 불쾌한 냄새와 소리를 참고 견뎌야 하는 순간도 있다. 차마 거부할 수 없는 불쾌함을 수용해야 하는 날은 모든 어린이에게 온다. 


Crack 3. 위험을 직시하고, 감수하기.

모니카는 심장이 선천적으로 약한 데이빗을 절대 달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반면, 순자는 달리고 싶어하는 데이빗을 막지 않고, 데이빗이 혼자 옷을 입다가 서랍장에 다치는 것도 막지 못한다. 모니카와 달리 순자는 데이빗을 완벽하게 보호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데이빗을 응원한다. 투박한 발음으로, 그러나 아주 정직하게 ‘유 아 베리 스트롱 보이(You are very strong boy)’라고 말해준다. 순자와 있을 때 데이빗은 ‘스트롱 보이’가 되고, 나무까지 달려볼 수 있다. 

부모님은 데이빗에게 숲에는 뱀이 있으니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한다. 뱀은 실제로 위험한 동물이지만, 성경에서도 뱀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에 빠뜨리는 악한 존재로 묘사된다. 위험하고, 악한 존재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은 당연하지만, 죽을 때까지 뱀이 무서워 숲에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다. 데이빗은 결국 순자와 함께 들어간 숲속에서 뱀을 만난다. 돌을 던져 뱀을 몰아내려는 데이빗에게, 순자는 보이는 게 안 보이는 것보다 낫고, 숨어 있는 게 더 위험한 법이라며 위험을 직시하는 법을 알려준다.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는 미나리처럼, 데이빗은 이 모든 균열 속에서도 성장한다. 모니카와 제이콥이 화마 앞에 무너지고 순자가 숲으로 향할 때, 순자에게 달려가 손을 내미는 것도 다름아닌 데이빗이다. 작은 아이가 혼돈 속에서도 찬란하고 단단하게 자라난다는 건,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런 어린 시절을 지나 이렇게 자라났다는 건, 내게는 너무나 경이롭게 느껴진다. 오늘을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지치는 날에 그 경이로운 생명력을 떠올리며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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