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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BI Jul 28. 2021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막막함이 한가득이지만 우리 같이 나가아보자는.


리디북스로 읽은 김이설 작가 책. 100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짧은 소설이다. 월요일 휴일 점심에 다운받아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처음에는 주인공이 처한 상황 때문에 고구마 10개 먹은 것 같은 답답함이 계속 올라왔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글 쓰는 시간도 확보하지 못하는 주인공이 너무 답답했다. 하지만 어쩌면 이게 현실인지도. 어떤 때는 아무리 무엇을 하려고 해도 안되는 시기가 있는 법이니깐. 



무엇보다도 흰 종이 앞에 앉아야 했다. 쓸 수 있든 아니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단 1초만이라도 흰 종이 앞에 앉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대로 죽어버릴 것 같았다. 


식당을 2개 운영할 때 잠시 글을 쓰지 못할 때가 있었다. 딱 위의 주인공 심정이었던 적이 있다. 무엇을 쓰지 않더라도 종이 앞에 앉아야 살 것 같은 마음. 제대로 못쓰더라도 내가 글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 이렇게 흘러가다간 그냥 글은 다 잊어버리고 살 것 같은 두려움. 그래서 나 또한 식당 포스기 앞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작은 종이에 필사를 하고, 책을 읽고, 짤막하게 글을 썼다. 그래야지만 살 것 같았다. 




어느 순간, 어쩐지 나는 보통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사람들이 보통의 삶이라고 규정지은 것들, 학교와 직장과 적당한 수입, 가족을 일궈 안정적인 일상을 꾸리고, 노후를 준비하며 일생을 보내는 일련의 과정들. 그 과정을 영위하기 위한 현실적인 실천 의지 같은 것들. 그런 것에 흥미가 없었으므로 가지고 싶은 열망도 없었다. 일반적인 삶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자, 그제야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니깐 나는 시를 쓴다는 포즈만 취해왔던 것이다. 시와 같은 편이 되거나 시와 같이 어울려야 하는데 나는 늘 속내를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듯이 멀찍이서 노려보기만 했다. 작품 하나하나마다 나를 그려 넣고, 나를 새겨야하는데 그마저도 용기 내지 못했다. 시를 쓰지도 못하면서 시 쓰기를 꿈꿨다는 건 시의 그림자에 숨어 내 언어가 사라지는 줄도 몰랐다는 뜻이었다.



결과가 희망적이냐고? 미약하지만 그렇다. 주인공은 글을 쓰지 못하는 환경에서 한 발짝은 벗어났다. 극적인 성공도 누군가의 도움도 없었지만, 스스로 걸어 나왔다. 꼭 그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그 사이 자신이 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도 깨달았다. 인생이란 영화처럼 혹은 드라마처럼 갑자기 행운이 찾아온다거나 갑자기 잘 풀리기 시작한다거나 그런 건 없는데 어느 순간 요행을 바라게 된다. 이 정도 썼으면, 이 정도 했으면, 갑자기 나에게 무언가 떨어지지 않을까라는. 시의 그림자에 내 언어가 사라지는 줄도 모르고 다른 이들의 등단을 부러워했던 주인공처럼. 스스로 개척해야 함을, 시를 쓰는 포즈만 취하는 게 아니라 치열하게 써야 함을. 가장 단순하지만 누구에게나 해주고 싶은 말을 이 작가는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이 한가득이지만 우리 같이 나가아보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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