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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BI Jul 25. 2021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동물이 인간에게 복수를 하고 있어


아니, 이 작가를 왜 이제 안거야. 이런 깊이감 있는 글 너무 오랜만이다. 


“동물이 인간에게 복수를 하고 있어. (……)
이건 그렇게 괴상한 이야기가 아니야. 동물들은 강하고 지혜로워.
그들이 얼마나 영리한지 우리가 모를 뿐이지.”


'별자리 소설'로도 불리던데, 흥미로운 건 별자리 이야기뿐 아니라 그간 동물들을 사냥하고 괴롭힌 자들을 향한 통쾌한 복수극으로 읽혔다. 코로나 시대에 더욱 와닿은 건 지구 상에 인간만이 존중받을 종족 인양 까불다가 바이러스로 복수극을 당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 같아서일까. 


이미 노벨문학상으로 그 실력은 세계 탑임을 인정받았지만, 어떻게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지 하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나중에는 줄 치는 걸 포기했다. 바로 작가의 다른 책도 주문 '방랑자들'도 읽고 있는데, 너무 좋아... 


중간에 다른 책을 읽기도 하겠지만, 당분간 올가 토카르추크 작가 책을 모조리 읽을 생각이다. 그녀가 사고하는 방식, 세상을 바라보는 눈,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표현들, 이런 것들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내 생각에 죽음은 물질의 절멸로 이어져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몸에 가장 적합한 해결책이다. 소멸된 시체는 그들이 생성된 블랙홀로 다시 빨려 들어가야 한다. 영혼은 빛의 속도로 빛을 향해 유랑할 것이다. 만약 '영혼'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말이다. 



사악한 존재는 그들의 발을 보면 안다. 대지에 뭔가 다른 모양의 인장을 찍어 놓으므로. 



남겨진 거라고는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죽은 몸뚱이뿐. 지금 이 몸뚱이는 차분하고 만족스러워 보였다. 물질로부터 해방된 영혼이 기뻐하고, 물질도 영혼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기쁜 듯했다.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에 형이상학적인 이혼이 성립되었다. 이제 끝이었다. 



이따금 우리가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머무는, 거대하고 넓은 무덤 속에 사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차갑고 불쾌한 잿빛 어스름에 물든 세상을 보았다. 어쩌면 감옥은 바깥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 어느 틈엔가 우리는 감옥 없니는 살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신의 눈과 귀를 활짝 열어 두어야 하며, 사실과 일치시키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완전히 다른다고 생각하는 대목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하며, 어떤 사건이 다양한 층위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많은 사건이 실은 단일 사건의 여러 측면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은 거대한 그물이며, 그 어떤 사물도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하나의 전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매일 밤과 매일 아침 / 어떤 이는 비천하게 태어난다. / 매일 아침과 매일 밤 / 어떤 이는 달콤한 기쁨으로 태어나고, / 어떤 이는 끝없는 밤으로 태어난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전조>에서. 



사람들은 헛소리나 지껄이며, 자기가 이미 아는 것을 뽐내는 데 그치지 않고, 상상력을 발휘하며 놀라운 것들을 창조한다. 국가는 더 이상 개인의 일상을 억압하는 족쇄를 채우지 않고 사람들이 자신의 희망과 꿈을 실현하도록 돋는다. 개인은 기계처럼 돌아가는 시스템의 톱니바퀴나 특정한 역할 수행자에 머물지 않고, 자유로운 존재로 탈바꿈한다. 



먹먹한 슬픔과 비탄. 매번 동물이 죽을 때마다 느껴지는 이러한 회한과 애도의 감정은 아마 절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나의 애도가 끝나면, 또 다른 애도가 이어지므로 나는 끊임없이 상중이다. 이것이 나의 상태다. 나는 피투성이가 된 눈밭에 무릎을 꿇고 앉아 차갑고 뻣뻣한 어린 멧돼지의 털을 계속 쓰다듬었다. 



동물을 보면 그 나라가 어떤지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깐 동물을 대하는 태도 말입니다. 사람들이 동물에게 잔인하게 군다면 민주주의나 그 어떤 시스템도 소용이 없습니다. 



가장 작은 것 속에 가장 큰 것이 담겨 있음이 분명하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바로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탁자 위에 행성의 배열, 나아가 우주 전체가 깃들어 있다. 온도계, 동전, 알루미늄 숟가락, 그리고 도자기 컵, 열쇠, 휴대폰, 종이 한 장과 펜, 내 회색빛 머리카락 중 하나의 원자에는 생명의 기원이, 그리고 세상에 그 시작을 부여한 우주적 재앙에 대한 기억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내게서 '게으름뱅이 목성 증후군'이 나타나는 건 바로 이런 상황 탓인 듯하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당연한 결과'라 일컫는다. 그래야만 많은 재능을 타고났음에도 자신의 잠재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총명하고 영리하지만 학업에 몰두하지 못하고, 자신의 지능을 카드 게임이나 페이션스에 쏟아붓는다. 아름다운 육체를 갖고 있지만 아무렇게나 방치하거나 해로운 물질로 감염시키고, 의사의 견해를 무시한다. 이러한 목성은 이상한 유형의 게으름을 유발한다. 늦잠을 잤기 때문에, 가고 싶은 마음이 안 들었기 때문에, 늦었기 때문에, 방심했기 때문에, 그렇게 평생 한 번뿐인 기회를 놓치고 만다. 그러한 게으름은 바꿔 말하면, 쾌락에 탐닉하고, 인생을 반쯤 잠든 상태에서 보내며, 사소한 즐거움을 위해 시간을 허비하고, 노력을 꺼리고, 경쟁에 연연하지 않는 성향이다. 



번역이란.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글을 옮기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서로 가까워지게 만드는 것. 



왜 우리는 꼭 유용한 존재여야만 하는가. 대체 누군가에게, 또 무엇에 유용해야 하는가? 세상을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으로 나누는 것은 과연 누구의 생각이며, 대체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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