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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님이 Mar 15. 2024

우리는 왜 무의미한 것을 찾게 되었을까?

밤늦게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옷도 벗지 않고 바로 소파에 누운 채로 인스타그램의 릴스를 2시간 넘게 본 적이 있다. SNS는 피곤하다 생각해서 계정조차 가져본 적이 없고, 직업적인 사명에 의해 유튜브는 백해무익하다고 주장하며 비판으로 일관해 온 내가, 일을 위해 가입한 인스타그램에 접속해서 한참 동안을 잠도 안 자고 손가락만을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거실 조명은 다 꺼져있었고 내 자세는 구겨져있었기 때문에 상체 하체 할 것 없이 온몸은 마비가 오기 직전이었고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고 있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멈출 수가 없었다. 딱히 재밌지도 않은 릴스의 지옥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죽음의 위협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아주 조금 다른 손동작으로 인스타그램 앱을 빠져나와 그 순간 바로 삭제했다. 이것이 그 무시무시하다는 도파민 중독인가.


인간은 이미 오래전부터 생명계 내 독점적 지위를 가진 존재로서 동물 진화의 정점에 있으며 긴 시간을 통해 차별화된 사회적 진화 또한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이와 같은 유일무이한 발달이 어떻게 가능했는가에 대해 신경행동학 및 행동신경과학의 영역에서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의 역할에 주목한다.


도파민은 우리가 흔히 아는 대로 쾌락에 관여하는 신경전달물질이기도 하지만 진화론적인 관점에서는 그것이 뇌의 ‘보상 체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진다. 우리가 어떠한 목표 달성의 경험을 했을 때 도파민이 보상으로 주어지는데, 이를 점점 더 추구하게 만드는 뇌의 체계가 인간을 더 높은 수준의 집중력, 더욱 긴 시간 지속될 수 있는 지구력을 가지게 만들어 뇌신경 시스템이 비약적으로 발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도파민 보상 체계를 통해 끈기 있고 부지런한 방식의 삶의 진화를 거듭해 온 것이다. 도파민은 보상으로 주어지지만, 보상의 기대만으로도 활성화된다는 최근의 연구가 해당 가설을 뒷받침한다.


그런데 지금 수십만 년 동안 인류의 발전을 이끈 도파민 보상 체계가 무너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극적인 변화를 기술의 발전과 새로운 매체의 등장과 이를 소비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스마트폰과 숏폼(Short-form)에 빠진 현대인이다. 스마트폰을 갖게 되면서부터 우리는 장시간 가만히 앉아 책을 읽지 않는다. 심지어 영화와 드라마, 그 밖의 이야기들 또한 그 서사를 인내하며 따라가지 않고 요약된 영상을 찾아본다. 이것이 더 극단적으로 발전하여 트위터, 틱톡, 릴스, 숏츠 등 짧게 압축된 숏폼 콘텐츠에 열광하게 만든다.


어떠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스마트폰을 통해 즉각적으로 도파민을 생성하는 숏폼에 매료된 현대인은 이제 시간과 노력, 어떤 면에서는 고통이 수반되는 장기적 보상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게 된 것이다. 뇌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즉각적인 도파민 활성화에 익숙해졌고, 우리는 이 현상을 '도파민 중독'이라고 부르며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인식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기술과 매체의 발전이 인간의 사회·신경학적 진화를 가로막은 것처럼 보이는 지금의 현상을 지켜보며 나는 다음의 새로운 의문을 가지게 된다. 어떠한 위기에도 지적인 영역의 확장을 통해 적응과 극복을 성공시킨 인간이, 너무나 앞선 기술의 발전에 굴복한 것인가? 인간은 자신의 진화를 포기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일까? 인간이 스스로 이러한 운명에 자신을 맡겼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최초의 인류는 동물의 세계에서 전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매 순간 생존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조건은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것, 사냥을 해서 먹을 것을 성공적으로 구하는 것 등의 즉각적이고 강렬한 보상 체계로부터 삶을 만들어가도록 이끌었다. 초기의 단기적 보상 체계는 인류가 경작하게 된 것을 시작으로 사회와 문화를 탄생시키고 발전시키며 장기적 보상 체계로 진화했다. 그날 하루의 먹을거리와 생명 유지만을 고민하면 충분했던 인류는 한 해의 농사를 계획하게 되었고, 점점 그보다 긴 시간에 대한 기대를 바탕으로 사회를 만들고 삶을 구상하는 방향으로, 즉 발전이라는 것을 목표로 한 장기적 보상 체계를 통해 진화해 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더 이상 길어질 수 없을 때가 되어 다시 가장 짧은 보상 체계로 회귀하고 있음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주역에서 이르는 물극필반(物極必反), '극에 달하면 반드시 그 반대에 이르게 된다'는 시기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너무나도 긴 삶의 여정에 대한 고민에 빠져있다. 현대인에게 그날 하루에 대해 생각하며 의미를 찾고 만족하는 것은 일상이 아닌 특별한 행위가 됐다. 아이들의 삶을 보면 그것이 더욱 두드러진다. 하루하루를 즐기는 삶은 아이들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지금의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며 나아가서는 그 이후의 먹고살 걱정을 하고 있다. 도파민에 중독돼 무기력해 보이는 아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전 세대가 하지 않았던,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한 현실적인 고뇌, 불안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정보를 수용해야 하기에 생각할 것이 너무 많다. 이러한 생각들은 우리를 삶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직면하게 해 그 모든 장면을 실재하는 고민으로 만든다.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긴 서사가 언제나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숏폼으로, 골방으로, 자기 안으로 숨어들어가는 사람들을 이야기로, 밖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이야기와 밖의 모습이 그들에게 충분한 보상이 돼야만 한다. 기대와 궁금증, 충분한 만족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누구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극단의 변화가 만든 혼란 속에서 한 개인이 발전과 진화라는 과제에 목메지 않고 새롭게 설정된 편안하고 안정된 보상 체계를 만들어 가도록 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이다.


현대인은 진화를 멈추지 않았다. 점점 더 무거워지는 삶의 무게를 덜고 싶어 할 뿐이다. 이전에도 항상 그래왔듯이 인간은 우리를 가로막는 어려움을 새로운 진화의 계기로 삼을 것이다. 그렇기에 수십만 년 동안 더 나은 것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하며 살아온 인간이, 숏폼이 주는 무의미한 보상에 의지해 아주 잠깐 쉬어가는 것이라고 지금을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얼마 전 중학생이 된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피곤하다고 하면서 왜 잠을 안 자고 새벽까지 휴대폰을 보는지에 대해서.


— 그건 저의 쉬는 시간이에요. 자고 일어나면 힘든 하루가 바로 다시 시작되잖아요. 그래서 저에게는 그 시간이 꼭 필요해요.



* 이 글은 2024년 3월 4일자 성신여대학보 <성신학보>에 기고한 칼럼 '우리는 왜 무의미한 것을 찾게 되었을까? : 숏폼 열풍에 대한 단상'을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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