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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이집사 Aug 17. 2023

받아들일 용기, 모른다고 할 용기

하얀 가운의 권위를 던진 의사

아들을 데리고 피부과를 찾았다. 녀석은 두어 달 전부터 머리가 가렵다며 긁적였다. 아들 머릿속을 들춰본 아내는 기겁했다. 온통 불그스레 진물투성이였다. 볼도 사포로 문지른 버즘나무 껍질처럼 희뜩희뜩했다.


초등 3학년쯤이었다. 샤워를 이틀에 한 번은 해야 한다고 잔소리 쳤건만 아들은 내 말을 도무지 듣지 않았다. 사시사철 머리가 가려울 때만 몸에 겨우 물을 묻혔다. 당할 걸 당했다며 쌤통이다,라며 아들에게 한 소리 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안쓰러웠다. 당장 안 되겠다 싶어 작년에 여드름 치료를 받았던 병원을 가보자고 했다. 아내가 못 미더운 눈치다. 피부과인지 비뇨기과인지 모를 의원이라며 영 마음에 안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피부과 전문의를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다. 급한 대로 피부과만 하는 병원을 검색해 봤다. 차로 십 분이 안 되는 한 곳이 잡힌다. 셋이 출발했다.


들어서니 손님 한 명 없다. 토요일 열 시 좀 넘은 시간인데 예상 밖이다. 접수를 하고 바로 들어갈 줄 알았지만 십여 분이 흘러도 부르질 않는다. 슬슬 부아가 걸려오는데 창구에서 아들 이름을 부른다. 머리와 볼 증상이 심한 게 어찌 그런지 궁금하던 차여서 아내와 아들을 뒤따라 들어갔다. 의사는 손전등으로 아들 머릿속을 헤집어보고 턱을 잡고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본다. 그러더니 뜻밖의 질문을 한다.


"최근에 심한 감기 걸린 적 있어요?"


"아니요"


"비염이 심한가요?


"아니요"


잠시 침묵이 흐른다.


대뜸 자기는 잘 모르겠으니, 소아과에 가보라고 한다. 볼은 심한 여드름 증상이 잦아들면서 생긴 것 같은데 짐작일 뿐이란다. 머릿속은 왜 그런지 통 모르겠단다.


어이가 없었다. "이비인후과도 아니고, 감기 걸리고 비염이 있는지를 왜 물어 도대체, 아들의 머릿속 사정이 궁금해서 병원을 찾았는데 의사의 머릿속까지 내가 추측해야 돼? 당신 의사 맞아? 아니 어떻게 진단을 못할 수가 있냐, 그럼 어떻게 해야냐"... 라며 되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소아과로 가보라며 여지를 남겼는데 거기에 대고 왈가왈부하기가 부담스러웠다. 의사가 입고 있는 하얀 가운은 여전히 위엄이 있었다.


© impulsq, 출처 Unsplash


그러더니 간호사를 부르며, 진료비를 받지 말라고 한다. 병명을 못 잡아내고 진단도 못해서 그런가 싶었다. 진료 의견서는커녕 빈손이다.


소아과에 가보라는 의사의 조언을 무시하고 바로 집으로 왔다. 그냥 며칠 지켜보기로 했다. 와이프가 예전에 사놓았던 특수 샴푸로 머리를 매일 감았다. 공원에서 배드민턴을 치며 땀을 뺐다. 일주일가량 지나니 거짓말처럼 아들의 피부 간지러움이 잠잠해졌다. 호르몬이 왕성한 성장기 아이의 정상적인 발작이었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그때 피부과 의사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먹거나 바르는 피부약을 처방했으면 어땠을까. 시간에 묻혀 간지럼증은 잠잠해졌겠지만 기껏 항진, 항생제인 양약이 몸에 좋을 리가 없었겠지. 매일 머리 감으라는 아빠 말을 흘린 걸 아들은 인정했다.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을 줄이고, 운동으로 땀을 내기로 약속했다.


당해보기 전에 깨달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대방의 충고를 받아들일 용기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안타깝게도 어릴수록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도 당하고도 못 깨닫는 것보다는 낫다. 나이를 먹을수록 지혜가 쌓인다는 말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지긋한 나이임에도 눈을 감고 귀를 막는 외골수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경륜과 겸손이 주는 힘은 여전히 강하다.


피부과 의사는 자신은 잘 모르겠으니 소아가 의사를 찾으라 권했다. 아들과 내 앞에서 의사의 지식과 권위를 내려놓은 셈이다.


의사든 의사 할아버지든 경험과 지식의 일천함은 피하기 어렵다. 어찌 모든 인생사를 겪어내고 깨달을 수 있으랴. 시시각각 자신의 생각과 관점미세조정하는  열린 마음이 중요하지 않을까?


남의 조언을 받아들일 용기, 모르면 모른다고 할 용기, 아이고 어른이고 참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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