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로애락 음식사 '애'
그리운 게 너무 많다. 8개월 전 너는 너무 착해서 재미가 없다며 3년 5개월의 시간을 뒤로하고 나를 떠난 구남친. 결혼은 했는지 회사는 잘 다니는지 간간이 카톡 프사로만 근황을 알 수 있는 고등학교 친구들. 새벽같이 이어지는 회의와 야근을 같이 버티다 하나둘 퇴사한 입사 동기들. 일단, 사람이 제일 그리운 것 같다. 그렇게 코엑스 한가운데에서 망부석처럼 굳어버렸다. 집에 돌아와 밤 12시에 달밤의 운동을 하면서도 생각했지만 ‘이거다!’ 싶은 주제가 떠오르지 않았다. 새벽 2시가 되었다. 계속 고민하다가는 한숨도 못 자고 출근할 것 같아 샤워할 채비를 했다. 평소처럼 노래를 틀어놓고 샤워를 시작했다. 따뜻한 물줄기에 피곤한 몸과 정신을 맡기고 노래에 빠져들었다.
모두 잠드는 밤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다 지나버린 오늘을 보내지 못하고 깨어있어 누굴 기다리나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던가 그것도 아니면 돌아가고 싶은 그리운 자리를 떠올리나 무릎을 베고 누우면 나 아주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머리칼을 넘겨줘요 그 좋은 손길에 까무룩 잠이 들어도 잠시만 그대로 두어요 깨우지 말아요 아주 깊은 잠을 잘거예요
아이유 [무릎] 中
찬찬히 가사를 곱씹어보다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일요일 아침마다 청진동 해장국에서 엄마, 아빠, 수빈이와 함께 먹던 뼈 해장국. 그 맛. 그 순간이 떠올랐다.
음식점을 하시던 부모님은 낮보다는 저녁이, 평일보다는 주말이 더 바쁘셨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 모두 부모님 손 잡고 한 번씩은 가보았다는 에버랜드도 온 가족이 가본 적이 없다. 고등학생이 된 나 역시 너무 바빴다. 바빴다기보다는 집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아침 8시 10분부터 시작되는 0교시에 맞춰 등교하고, 밤 10시에 야자가 끝나면 수학 학원에 갔다가 새벽 1시까지 독서실에 갇혀있었다. 그 때문에 초등학생인 동생은 가족들 얼굴보다 TV를 마주하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런 우리 가족이 모두 함께 모이는 때가 일요일 아침이었다. 엄마는 새벽 6시에 눈도 못 뜨는 나를 깨워 일요일마다 온 가족을 온천으로 데려갔다. 따뜻한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정신이 몽롱해지는 게 기분은 좋았지만, 엄마의 거친 떼수건은 매번 적응이 안 됐다. 어찌나 등을 세게 미시는지 등이 울긋불긋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목욕 후 먹는 바나나우유는 맛있었다.
동생과 아빠 차 뒷좌석에 앉아 바나나우유를 쪽쪽 빨고 있노라면 어디 가자고 따로 얘기하지 않아도 아빠는 자연스럽게 청진동 해장국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각자 뼈 해장국을 하나씩 주문하고 앉아있으면 아빠는 배추김치와 깍두기를 우리 입 크기에 알맞게 작게 잘라주셨다. 음식이 나온 후에도 먹성 좋은 나를 위해 부족하지는 않냐고 말씀하시며 선뜻 아빠 뚝배기에서 가장 큰 뼈를 내 뚝배기로 옮겨주셨다. 그렇게 각자 떨어져 있던 가족이 청진동 해장국에서 한자리에 모였다.
지금도 청진동 해장국은 그 자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고, 나도 엄마도 동생도 여전히 뼈 해장국을 좋아한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더는 그 식당에 가지 않는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 것만 같은데 아빠가 빠졌다.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아빠가 어딘가 이상했다. 자주 피곤해하셨고, 기운이 없으셨다. 까무잡잡하던 피부도 점점 노란빛을 띠었다. 뭔가 불길한 느낌에 초록창에 이것저것 검색을 한 끝에 아빠가 간암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겁에 질려 엄마에게 내가 내린 결론 이야기했고, 돌아온 말은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마!” 대학교 3학년 봄. 동생의 열 네 번째 생일 다음 날. 아빠는 우리 곁을 떠났다. 그리고 나는 아직 나를 용서하지 못했다.
만약이라는 글자가 끝없이 나를 맴돈다. 만약, 아빠가 아니라 내가 아픈 것이었다면 아빠는 어떻게 하셨을까. ‘엄마의 매서운 말 한마디에 입을 다물지는 않았을 텐데…’ 만약, 내가 아빠가 아픈 걸 조금 더 빨리 눈치챘으면 어땠을까. ‘손 쓸 수 없이 전이된 암 덩어리를 잡아 볼 희망이라도 품었을 텐데…’ 만약, 엄마가 아빠와 재혼하며 나를 버렸다면 아빠는 지금쯤 살아계실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나를 품느라 아빠가 병에 걸린 것만 같다.’
아빠는 새아버지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다정한 아빠였다. 모두가 잠든 것만 같은 새벽 한 시. 아빠는 고된 하루 끝에서 나를 기다리셨다. 어떤 날은 딸기우유와 크림빵, 어떤 날은 바나나우유와 핫바를 들고 독서실에서 나오는 나를 맞아주셨다. 집에 가는 차 안에서 매일 그날의 하루를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나에게 오늘은 피곤하니 조용히 가자는 말도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하루는 엄마와 크게 다툰 날이었다. 아빠는 나를 차에 태우고 말없이 해안도로를 달리셨다. 그리고 딱 한 마디 하셨다. ‘우리는 이렇게 바람도 쐬고, 바다도 보고 있지만, 엄마는 하루 종일 뜨거운 불 앞에 서 있단다.’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우리 집은 시선이 닿는 곳곳에 꽃다발이 걸려있다. 아빠는 꽃다발을 정말 자주 잘 사 오셨다. 특히, 5월 21일 부부의 날에는 커다란 꽃다발을 등 뒤에 숨기고 집에 오셨다. 아빠가 돌아가신 해에도 어김없이 5월 21일은 돌아왔다. 엄마는 내가 보낸 꽃다발을 품에 안고 한참을 그리움과 슬픔에 젖어계셨다.
사랑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었다. 지금은 이혼도, 재혼도 흠이 아닌 세상이다. 하지만, 그때는 젊은 총각이 여덟 살짜리 애 딸린 이혼녀와 결혼하는 게 쉽지 않았을 때였다.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해 몇 번 보지도 못한 낯선 꼬마애를 데리고 사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버려지지 않을까 빤히 눈치를 보는 모습이 밉지는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친자식인 동생과 뻐꾸기 새끼 같은 나를 정말 똑같이 아끼고, 사랑했다.
나의 이야기를 얼핏 아는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자랐냐고 물어본다. 그러면 나는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고 무럭무럭 잘 자랐다고 답해준다. 아빠를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져 괴로워하는 나지만 아빠에게 받은 사랑으로 잘 살고 있다. 사랑도 받아 본 사람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항상 온 마음을 다해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일도 사랑한다.
물론, 마음속에 잘 파묻어 놓았던 죄책감과 우울함이 튀어나올 때도 있다. 얼마 전에도 술에 취해 친구에게 울며불며 전화했다. 아빠가 없어서 너무 힘들다고. 아빠를 살리지 못한 게 모두 내 탓 같다고. 탓할 사람이 나 밖에 없다고. 다음날 일어나보니 눈이 팅팅 부어 개구리 왕눈이가 되어있었다. 문토 첫 모임 날이었다.
친구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솔직히 속은 시원했다. 예전에는 아무리 마음이 약해져도, 술에 취해 곤드레 만드레가 되어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없이 혼자 울었다.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아빠와 비슷한 연배의 아저씨만 봐도 남몰래 울던 때도 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친구들에게 술기운을 빌려 말할 때도 있고, 맨정신에 말할 때도 있다. 이렇게 그간의 이야기를 글로도 쓰게 되었다. 아주 느리지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겠지만 언젠가는 일요일 아침에 청진동 해장국에서 뼈 해장국을 먹는 날도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