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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by 이야기하는 늑대

https://groro.co.kr/story/16487



올해의 길고 긴 추석 연휴를 앞두고 부산 여행 계획을 세웠다. 연휴 기간 중에 2박 3일 동안 부산 송정 해변을 기점으로 해서 한 두어 곳을 둘러보고 부산의 맛있는 먹거리도 먹기로 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정말 우연히 합천 해인사 이야기를 아내와 하게 됐고 해인사도 가 보기로 계획을 살짝 수정했다. 사실 수정이랄 것도 없었다. 2박 3일이라는 기간을 3박 4일로 늘려 첫날 합천으로 가고 둘째 날 부산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단, 그냥 단순하게 부산이나 합천 모두 내가 살고 있는 청주보다 밑에 있는 지역이니 그냥저냥 대충 가는 길이겠거니 했는데 합천까지 2시간 30분 정도가 걸렸고 합천에서 부산까지도 2시간 30분 정도가 걸렸다.



합천 해인사, 그 유명한 팔만대장경이 있는 곳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실로 어마무시한 국보다. 11세기에 만들기 시작한 팔만여 개의 경판을 자랑하는 대장경이다. 만들어진 배경과 지금까지 이어 온 그 길고 긴 시간을 생각하면 이런 물건엔 정말 이성과 합리 그리고 과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불법 같은 게 서려 있을 것 같다. 직접 볼 순 없었고 장경판전 밖에서 나무창살을 통해 그 위용을 엿보는 게 다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조상님들이 불법으로 나라를 지키려 한 마음을 느낄 수 있어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한참을 둘러보다 가기 전 대전 앞마당에 크게 만들어진 ‘해인도’를 볼 수 있었다. 해인도는 만(卍) 자를 형상화 한 미로 같은 건데 그 미로를 돌면서 불경을 외거나 기도를 한다고 했다. 해서 어떤 기도를 하면서 돌아볼까, 아니 그저 한 번 돌아볼까 하는데 만 4세인 딸아이가 재미있어 보였는지 돌자고 손을 잡아끌어서 돌기 시작했다. 이왕 도는 길에 기도할 내용이 없어도 합장은 해야 할 거 같아(참고로 난 믿는 종교가 없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불교를 다른 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아하는 정도다.) 아이에게 합장을 하자고 했다. 아이는 그저 재미있어 보였는지 실쭉 웃으며 합장을 했다. 그렇게 두 바퀴를 돌았는데 다 돌고 나니 기도를 하는데 도움이 되라고 다양한 종류의 기도문이 A4 용지에 인쇄돼 있는 걸 발견했다.



다시 돌고 싶었으나 시간도 다소 늦었고 해서 아쉬운 마음에 두 장의 기도문만 챙겨 나왔다. 그중에 하나가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이었는데 첫 구절이 그냥 가슴에 와서 콱 박혔다. 옮겨 보자면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병고로서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였다.



최근에 만성적인 질환에 의해 삶의 질이 많이 떨어져서 지긋지긋한 질환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하는 차였다. 사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누구나 나와 같이 생각할 것이다. 죽을병은 아니지만 그날그날의 의지를 잡아채는 족쇄 같은 만성적인 질환들은 정말 짜증이 나고 떨쳐 버리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그러길 바라지 말라니... 그야말로 말끔하게 건강하다면 그냥 좋은 거 아닌가 하고 바라 왔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런 건강함을 믿고 어쩌면 몸을 막 굴릴 수도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드는 구절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성적인 질환들 좀 제발 떨쳐 내고 싶지만 한 편으로는 그런 질환을 바탕으로 내가 몸을 생각하고 관리도 하는 거겠지 하고 생각하니 아주 조금 손톱만큼은 아픈 내 몸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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