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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쌤 Nov 29. 2023

희미한 기억의 미로

과도한 메타 인지가 가져오는 마음의 갈등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직원 연수차 단체로 등산을 간 적 있다. 때는 바야흐로 10월 중순 경이라 온 세상이 울긋불긋 물이 올라 단풍이 절정이었다. 당시는 등산 붐이 일었을 때라 산에는 사람이 넘쳐났다.


 "언제 와 본 것 같은데?"


 내가 이런 곳을 와봤을 리 없었다. 처음 온 곳이 응당 낯설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낯익은 것처럼 익숙했다. 처음 보는 것이 분명한데 다시 겪는 듯한 기묘한 느낌을 데자뷰 현상이라고 했던가.


 평생을 길치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던 지라 크게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산을 올랐다. 사실 등산이라 할 것도 없었다. 국립공원 진입로에서 산 중턱까지 전세 버스가 올라갔고 발을 내딪는 등산로는 단단한 흙으로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거의 당도했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아, 나 여기 와 본 적 있어."


 정신없이 산길을 걷다가 정상에 다다랐을 무렵, 메타 인지의 통로가 뚫려 기억의 회로에 봇물이 터지고야 말았다. 언제 누구랑 왔었고 하산해서 무엇을 먹었으며 집에 귀가했을 때 컨디션은 어떠했는지 불필요한 정보까지 세세하게 기억났다.


 지난 주말은 정통 인도 요리가 그렇게 먹고 싶었다. 삐쩍 마른 인도 아저씨가 반죽을 한 웅큼 뜯어서 깊은 구덩이 같은 화덕 벽면에 척하고 붙였다가 떼어낸 난이 먹고 싶었다. 길쭉하고 까실까실한 난을 길게 쭉쭉 찢어서 동방의 향신료를 잔뜩 넣어 만든 걸쭉한 커리를 닦아 먹고 싶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은 가기 싫었다. 휴일 날씨는 온화했고 한적한 곳이 좋았다. 그러나 그런 건 죄다 번화가에만 있었고 내가 으뜸으로 치는 인도 요리점은 신세계 백화점에 입점되어 있었다. 여러모로 큰 맘을 먹은 후에야 백화점으로 차를 몰았다. 8층 식당가로 가는 길에 갤러리가 있다. 가끔 기웃거리던 곳인데  그날따라 느닷없이 만화 릭터가 전시되어 있었다. 8등신에 눈이 커다란 일본 여고생은 뭔가 친숙하면서도 생소했다. '대관절 이게 뭐라고 관람객이 이렇게도 많지?'


 '스즈메의 문단속'이라는 제법 흥행했던 영화의 전시회였다. 호기심에 이끌려 슬쩍 들어가 본 갤러리에는 각종 굿즈와 포토존이 가득했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구경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갤러리 전시 물품은 사실 맛보기에 불과했다. 갤러리 바깥에 있는 문화센터가 진짜 전시회였다. 본격 관람을 하려면 15,000원을 지불해야 했다. 내심 누가 보겠나 싶었지만 표를 사기 위해 길게 줄이 이어져 있었다.


 신기한 마음에 벽에 붙은 시놉스를 읽었는데 내가 내용을 훤히 꿰고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오래전에 내가 시청한 적 있는 에니메이션 시리즈의 신작이라는 것. 즉 3부작 영화에서 나는 1부에 해당되는 파트를 봤던 것이다(재난을 소재로 했을 뿐 사실상 별개의 이야기이다).


 그 영화를 접했을 당시 나는 사회 초년생이었다. 우연한 기회로 일본을 몇 차례 왕래했었다. 나는 학창 시절 제 2 외국어로 일본어 수업을 흥미있게 들었고 회화 시간에도 주저 없이 입을 열었었다.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 말했다. '외국어는 자신감이 중요해.' 나는 현지에서 당당하게 '~고레와, ~소레와'를 남발했지만, 오사카에서 나의 일본어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일본어 공부에 몰입하게 되는 동기부여를 받았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일본 영화를 반복해서 보고 듣고 따라 말했다. 수없이 돌려보던 그 영화가 바로 '너의 이름은'이라는 애니메이션이었다.


 그게 영화사에 길이 남을 대작인 것도 몰랐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터미네이터2 조차 누군가에겐 유치뽕짝으로 간주된다. '이봐, 다 큰 양반이 그깟 로보트 나오는 걸 뭐하러 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실제 이야기다).


 전시장에서 읽은 설명에 의하면 시리즈의 최신작인 '스즈메의 문단속'도 대히트를 쳤다. 사람들은 그 영화의 제작 과정에 사용한 드로잉, 스케치, 스토리 보드를 보기 위해 아낌 없이 지갑을 열고 있었다. 실로 컨텐츠의 힘은 대단하다. 그리고 이런 쓸데없는 썰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메타 인지의 힘도 새삼 대단하다는 걸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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