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면서 생기는 고민은 참 많다. 첫 아이를 키우면서 바라는 게 있다면 그저 건강하게 자라주는 것이다. 지난 주말 우리 가족은 더위를 피해 키즈 카페로 실내 나들이를 갔다. 카페는 만원이었지만, 3세 미만의 베이비존은 텅텅 비어 있었다. 우리 가족이 유일한 손님이었다. 나는 알고 지내는 엄마들과 이미 몇 번 다녀온 곳이라 별로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남편은 마치 신문물을 접하는 듯 신기해 했다. 아이를 놀이기구에 태워주며 즐겁게 놀아주던 남편은 어느새 덩치 큰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재구성하면 대강 이러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애기 몇 개월이에요?" "6개월입니다." "우리 애랑 똑같네요. 몇 킬로죠?" "9킬로입니다." "우리 애는 10킬로..."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아이의 발달 상황을 묻고 답하는 사이, 웃는 표정이지만 일종의 경쟁구도가 형성되는 것을 느꼈다. 마치 조폭들이 서로 대립하며 족보를 따지는 듯한 분위기였다. 나는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당황스러웠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장사 체형의 집안이다. 나도 여자 치고는 큰 키를 자랑하는데, 남편과 키 차이가 거의 없을 정도다. 특히 집안 남자들은 더욱 거구다. 결혼식 때 아빠 손을 잡고 신부 입장을 할 때 남편에게 나를 인계하며 남편을 안아주던 아빠는 흡사 곰이 사람을 덮치는 모습이었다. 항공기 파일럿인 사촌은 키가 190을 훌쩍 넘어 군복무 시절 신체검사 때 약간 구부정하게 키를 재었다. 너무 크면 조종사 자격에 흠집이 생길까봐서라고 했다.
이런 배경을 설명하는 이유는 우리 아이의 주치의 선생님 때문이다. 예방접종 차 정기적으로 병원을 갈 때마다 아이의 몸무게가 급격히 증가하는 것과 식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먹어대는 통에 수유량을 조절하라는 꾸중을 듣는다. 나는 병원을 가기 전부터 '아, 이번 달도 체중이 1kg 증가했네. 오늘은 또 꾸중을 얼마나 들을까.' 하는 걱정부터 앞선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지나친 수유가 아기의 내분비 기관에 나쁜 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고 걱정하신다.
그런데 그 거구의 남자가 안고 있던 아이는 우리 아이보다 2배 가까이 더 많이 먹고 있었다. 하루에 분유 1,300ml를 먹고 이유식과 간식은 별도로 먹는다고 했다. 나는 약간 억울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아기가 부담될 수 있는데 무책임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품으며 스스로를 달랬다. 이후로도 새로 온 아이 부모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편은 처음보는 상대와 친숙하게 아이스 브레이킹을 하며 아양을 떨었지만 대화의 본질은 비슷했다. 육아책에 바이블과 다름없는 '삐뽀삐뽀 119 소아과'에서 저자 하정훈 선생님은 육아는 경쟁이 아니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매일 질문한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옹알이에 반응해주며 발달 단계에 맞는 행동 요령에 집중하며. 매일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이 아이가 곧게 뻗어나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부족함 없이 자라기를 바란다. 그러나 남편의 바람은 다르다. 남편은 아이가 박사 학위를 따기를 바란다. 남편과 시아버지가 그랬듯, 유도 선수로도 활약하기를 바란다. 의사 면허도 따기를 바란다. 종합하자면 의사 면허가 있는 의공학자가 되어서 내가 재직 중인 학교에 의공학과 교수가 되길 바란다.
남편은 엔지니어로서 의사가 되지 못한 것을 천추의 한으로 여긴다. 여차저차해서 석사 학위는 취득했지만 박사 학위를 갖지 못한 것을 두 번째 한으로 여긴다. "이건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야. 그런데 그자가 무조건 된다고 우기잖아. 우라질, 하늘 같은 박사님의 지시인데 어쩌겠어. 소용없는 짓이라도 해야지."라며 언젠가는 자신도 박사를 따겠다고 다짐한다. 남편이 갖고 싶은 의사 면허와 공학 박사 학위를 조합하면 의공학자가 된다. 남편이 가끔 하는 말이 있다. 의사는 엔지니어가 될 수 있지만, 엔지니어는 의사를 할 수 없다고 말이다. 어떨때는 그의 언변에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자식이 의사든 박사든 된다면 물론 좋겠지만, 나는 그래도 아이의 진로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따르게 하자고 생각한다. 그러나 남편은 그것이 무책임하다고 본다. 아이가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부모가 가능한 한 길라잡이가 되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록 강요는 없을 테지만 적어도 아이가 좋은 쪽으로 진로를 택할 수 있게 약간의 가스라이팅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름 설득력이 있어 아직 반박의 여지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럼 아이가 다른 것을 하고 싶다고 하면 어쩌지? 남편은 재능이 있으면 밀어주고, 흥미만 반짝이면 본업으로 삼되 생업을 별도로 열어두게 조력해 주자고 한다. 말하자면 복수전공 같은 것이다.
아이가 부모의 영향 없이도 진취적으로 진로를 개척해 나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일 것이다. 그런데 확신할 수 있을까. 부모도 인지하지 못할 만큼 교묘하게 영향을 준 것이라면? 또는 환경이 영향을 미친 것 이라면, 그건 좋은 부모일까? 나쁜 부모일까? 이런 질문들은 남편과의 대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고민들이다. 누구나 아이가 행복하고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지만 그 과정에서 부모의 역할은 언제나 고민스럽기 마련이다.
아이를 키우며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시금 되돌아본다. 과연 우리는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영향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판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육아는 부모도 함께 성장해 나가는 과정인 것 같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 역시 부모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