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첼 편
제주의 마지막 날, 일곱째 날이다.
제주의 마지막 날을 떠올리면 무지개 색깔의 방호벽이 길게 널어선 알록달록한 바다에서 가졌던 시간과 김포 공항에서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리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피곤함과 서운함이 섞인 그 표정이 아직도 잔상에 남아있다.
제주 마지막 날 아침, 리나는 여느 때와 같이 커피를 갈았다. 마지막 날에는 유난히 햇빛이 눈이 부시고 화사했다. 여행 내내 내가 선물한 마법 귀걸이를 바꿔 끼면서 이 날 아침에도 어떤 색이 어울리냐고 물었다. 두 번째 숙소에서 여행 마지막날 아침에 갈았던 커피는 날짜에 딱 맞게 똑 떨어졌다.
나는 여행 내내 리나를 피사체 삼아 사진 찍는 재미에 들렸다. 누군가를 사진에 담아서 찍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카메라 셔터를 움직임에 따라 담고, 그냥 막 눌러서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아도 작품이 되는 순간의 기록은 그 당시로 돌아가 얼굴을 담그고 두고두고 볼 수 있는 향수병이 된다. 아기자기하고 마음에 쏙 들었던 숙소, 더 머무르고 싶었다.
마지막날 아침 식사는 남은 잔반처리와 같았다. 전날 다 먹지 못하고 싸왔던 빵, 늘 먹던 우리의 요거트, 삶은 달걀과 커피 그리고 햇살과 분위기까지 우리는 아쉬움을 가득 먹었다. 이후로 마트에 가면 유제품 코너에서 요거트를 고를 때마다 당류가 적은 요거트를 찾았던 리나가 떠오른다. 평소 워낙 요거트에 블루베리, 견과류를 즐겨먹었던 터라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 짧았던 일상이 내 일상 안으로 들어왔다.
숙소를 떠나기 전 마주 앉아서 편지를 쓰는 건 마지막 미션과 같았다. 며칠 전 카페거리에 갔다가 사들고 온 엽서를 이틀이나 식탁 위에 두고 오며 가며 바라봤다. 쓰기는 써야겠는데, 마주 보고 앉아서 쓰면 이 놈의 감정이 가만히 있을까 싶었다. 웬걸, 나는 덤덤하게 써 내려갔지만, 리나는 엽서에 글씨를 꾹꾹 눌러 담으며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운다. 리나가 운다. 순간 당황스럽기도 하고, 어떤 마음인지도 알 것 같았지만, 내가 어떤 말을 건네기가 조심스러웠다. 마치 지금의 무드를 내가 깨버릴까 봐. 집중하고 있는 리나의 마음을 흐트러뜨릴까 봐 조심스럽기도 했다. 그 편지를 받을 사람이 나 인걸 알면서, 자꾸 코끝이 찡해지려는 걸 참고 참았다.
그렇게 엽서를 채우며 힐끔 거리면서 리나를 봤다. 그리고 내가 줄 엽서를 들어 리나 얼굴에 비추어봤다.
"우리가 사랑한 제주" 내가 쓴 글 귀와 함께.
이제 짐을 싸고 서둘러 정리해서 숙소를 나서야 했다. 11시 체크 아웃 시간보다 더 빨리 나선 이유는 들르고 싶은 곳이 있어서였다. 왜 미리 몰랐을까 싶었던 '무지개 해안로'를 가야 했다. 그곳을 걷고 사진을 찍어서 꼭 알록달록한 사진을 길이길이 남기고 싶었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깔로 곱게 칠해진 방호벽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고, 위에 올라가 걸으면서 다양한 각도로 사진을 찍었다. 손을 잡고 건너가는 뒷모습, 손을 흔드는 앞모습, 자연스럽게 기대어 앉고 선 서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바다를 벗 삼아 시원하고 행복한 시간을 눈에 담고, 머리에 담고, 마음에 담았다. 지금까지도 그때 찍어 온 사진들을 수시로 들여다본다. 기록의 힘이 참 대단하다는 걸 매 번 느낀다.
점심도 생략한 채 우리는 좀 더 제주에 머무르고 싶었다. 그렇게 아쉬운 시간을 보내고 렌터카 반납을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일단 차를 반납한 후 공항으로 가야 했기에 서둘러야 했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무거운 가방을 낑낑거리며 끌고는 공항으로 갔다. 공항에 들어가 어디 점심 먹을 곳이 있는지 한참을 찾았다. 사람은 많고, 자리는 없었다. 결국 파리바게트로 가서 샌드위치를 먹기로 했다. 리나도 나도 둘 다 샌드위치를 좋아해서 이번 여행에서는 샌드위치 먹방 투어를 하자고 이야기했었는데, 결국 하지 못했다. 나는 하루 다섯 끼로 샌드위치를 먹어도 잘 먹을 사람인데 리나도 좋다고 했던 이야기가 아직도 못내 아쉽다. 남아공에는 맛있는 샌드위치 집이 없다. 이렇게 슬플 수가 없다.
공항 바리 바게트에서 자리가 나기를 기다렸다가 한 군데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샐러드 하나와 샌드위치 하나를 골랐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두 잔 시켰다. 우리는 이 음식을 다 먹어치울 때까지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내가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리나의 표정이 보였다. 여행 내내 리나를 가까이에서 봤다. 여태까지 온라인에서 보고 느꼈던 느낌과는 달랐다.
오프라인에서 사람을 곁에 두고 만나는 일이 내게는 한정된 일이다. 남아공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만 만난다. 그렇게 사람을 만나는 일은 이상하지도 어색하지도 않은 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사는 사람들과의 소통은 온라인 줌을 통해서만 해야 했고, 리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온라인에서 수강생으로 만나 동료가 되고, 같은 코치로서 성장을 함께 했다. 그렇게 친구가 되었고, 라이팅 코치와 수강생으로 함께 하면서 서로 더 많이 소통하고, 서로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렇게 가까워진 인연, 오프라인으로 만나 대화하고, 밥을 먹고, 함께 웃고 걷는 시간이 지극히 평범하지만, 내게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잠시 꿈을 꾸고 온 듯하다. 언제 다녀왔나 싶고, 마치 동화 속 이야기를 꺼내보는 기분도 든다.
리나와 여행을 가기 전 서로 생활 패턴이 맞지 않고, 취향이 달라서 불편하면 어쩌나, 오랜 시간 함께 하면서 서로에게 실망하고 멀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하기도 했다. 이 걱정이 큰 부분을 차지한 건 아니었지만, 염려되는 일이긴 했다. 그러나, 여행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우리는 취향이 비슷했고, 설사 아닌 부분도 일부러 맞출 일이 없는 그런 관계였다.
비행기에 올라 타 헤어질 생각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무슨 이야기를 그리 했는지, 우리는 계속 대화했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그리고 시간이 빨리 지나간 것에 대한 아쉬움과 다 하지 못했던 마주 보고 글쓰기, 릴스 만들기, 더 가고 싶었지만 가지 못했던 부분들도 우리의 이야기 도마 위에 올랐다.
비행기에서 내려 짐을 찾고 각자 갈 길로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다음 날 또 스케줄로 만나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또 만날 일이었다. 그런데도 일주일의 여행이 끝났다는 사실은 아쉬움 가득이었다. 뒤돌아 가는 리나를 사진기에 담았다. 뒤 돌아볼걸 알고 영상으로 돌렸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시작이 설렜다면 끝이 아쉬운 법이다.
그랬다. 시작은 설렜고, 끝은 아쉬웠다.
그리고, 우리의 아쉬움은 또 다른 기약을 남겼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제2의 플랜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