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나 작가 Aug 04. 2024

우리가 사랑했던 제주

리나 편


일곱째 날.

제주를 떠나야 하는 날이다.



두 번째 숙소는 젊은 감성이 묻어나는 곳이었다.  특히 주방은 드라마 세트장을 옮겨 놓은 느낌이었다. 싱크대 앞 벽면은 흰색의 작은 헥사곤 타일이 촘촘하게 채워져 있고, 상부장 대신 달려있는 우드 선반 위에는 예쁜 컵들이, 아래에는 행주와 카키색 고무장갑이 고리에 걸려있었다. 어느 것 하나 그저 그런 평범한 소품은 없었다. 냄비, 그릇, 하물며 저울까지도 빈티지스러운 감성을 자아냈다. 주인장의 센스 있는 섬세한 손길이 느껴졌다.

창가에 놓인 블루투스 스피커 전원을 켜니, 올드 팝송이 흘러나왔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과 음악, 그리고 예쁜 주방의 3박자가 내 마음을 몰랑몰랑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아침 식사.

원두 갈아서 커피를 내렸다. 요거트와 삶은 계란으로 테이블을 세팅했다. 마지막 아침을 앞에 두고 서로를 사진에 담았다. 햇빛에 비치는 레이첼이 특히 더 예뻤다. 사진을 보고서 내가 "이것 봐. 여신이네~."라고 한마디 했다. 



커피 향도 좋고 흘러나오는 음악도 멋지고 제주의 아침 햇살을 받는 주방 공간도 밝게 빛나는데, 내 마음은 어딘가 회색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레이첼이 마주 앉아 엽서에 편지를 쓰자고 했다. 펜을 들고 편지를 쓰려는데, 가슴에서 뭔가가 올라왔다. 심호흡을 했지만, 이미 감정이 내가 쳐놓은 울타리를 넘었다. 순간 눈물이 터져 나오려 해서 얼른 자리를 피했다. 단 한 글자도 못쓰고.

화장실에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왜 이래. 제발 진정 좀 하자.'



다시 자리로 돌아가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내 생각과 마음을 글로 잘 표현해 내려면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냉정함 따위는 1도 없이, 글 쓰는 내내 그저 차오르는 슬픔을 억누르기 바빴다. 그래서 내가 적은 편지글은 아마 엉망이었을 거라는 생각이다. 그 엽서는 나한테 없으니 어떻게 썼는지 지금은 알 길이 없다.

레이첼은 담담하게 잘도 써 내려가는데 나는 왜 이렇게 감정적이기만 할까 싶었다.

편지를 겨우 다 쓰고 일어난 내 얼굴을 살피며 레이첼이 괜찮냐고 우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얼른 아니라고 했다. 내 밝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짐을 모두 싸서 차 트렁크에 싣고, 공항 가기 전 마지막으로 어제 우리가 지나가며 예뻐서 찜해 놓은 공항 근처 바닷길을 걷기로 했다. 원래 점심을 먹어야 했지만, 지금 먹는 게 중요하냐며 점심은 대충 공항에서 때우기로 하고, 차라리 그 시간에 멋진 제주 바다를 한번 더 보자고 했다.



무지개색으로 칠해진 방호벽이 해안도로를 따라 쭉 이어져 있었다. 푸른 바다와 하늘을 배경 삼아 알록달록 선명한 색의 방호벽은 사진 찍기에 최고의 장소였다. 제주를 찾은 관광객들이 너도나도 사진 찍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도두동 무지개 해안도로'라고 검색하면 이곳을 찾아갈 수 있다고 한다.

레이첼과 나는 서로를 찍어주기도 하고, 무지개 길 따라 함께 손잡고 걸어가는 영상을 찍기도 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 둘 모두 이 순간을 아쉬워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떻게 이렇게 일주일이란 시간이 빨리 가지? 거봐. 3~4일 아닌, 일주일로 하기를 잘했지?"

"다음에는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만날까? 싱가폴에서 볼까?"

손잡고 걸으며 다음을 기약하는 얘기를 했다. 그 순간의 아쉬움을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채워보려 했다.



레이첼과 나는 작년부터 점점 더 가까워지면서, 몇 번 불편한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관계가 가까워지는 만큼 서로에게 기대하는 마음이 커지면서 서운한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또한 대부분 글로 오가는 온라인 소통을 하기에 점 하나 혹은 물결 하나로 마음이 상하고 오해가 생기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제주 여행을 앞두고 한편으로 걱정도 되었다.

'친한 친구끼리 여행 가면 잘 싸운다던데..., 관계가 끝나기도 한다던데..., 

괜히 좋은 추억 만드려다가 안 좋아지는 건 아니겠지?'

완벽한 기우였다.

불편한 감정도 서운함도 전혀 없었다. 물 흐르듯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날그날 계획을 짜고 함께 움직이는 것도, 쉼 없이 대화하고 발맞추어 걷고 사진 찍으며 즐기는 것까지 모두 그랬다. 마치 오래전부터 함께 지낸 사람처럼 모든 게 다 잘 맞았다. 이보다 좋을 수 있을까.


우리의 7일 여행을 함께했던 렌터카를 반납하고, 공항에서 간단하게 점심 먹으려고 파리바게트에 들어갔다. 자리가 없어서 눈치 싸움하다가 겨우 자리를 잡고, 샌드위치와 샐러드로 배를 채웠다. 좋아하는 음식 스타일이 달라도 불편했을 텐데, 우리는 음식 선택할 때도 잘 맞았다. 레이첼은 혈당을 높이는 음식을 피하려는 나를 잘 배려해 주어서 비교적 건강한 음식을 먹으며 여행할 수 있었다.

파리바게트는 오픈된 공간이라서 산만한 분위기였지만 나는 레이첼에게 오로지 집중했다. 레이첼이 하는 말을 귀담아듣고, 얼굴도 더 뚫어지게 쳐다봤다. 다시 못 볼 사람처럼.

'피부가 참 곱네. 속눈썹이 길구나.'

바로 다음날 소리튠 코치 선상파티 모임이 있어서 만날 수 있었고, 그 이후로도 또 며칠 더 만날 수 있는데도 여행의 마지막이 너무 아쉬웠다.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순식간에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제 진짜 헤어질 시간이 왔다. 여행 즐거웠다면서 두 팔 벌려 안아주며 작별 인사를 했다. 캐리어 끌고 내 갈길 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레이첼이 나를 찍고 있었다. 

그랬다. 레이첼은 틈날 때마다 나를 찍었다. 내가 누군가를 찍어주는 것에만 익숙했는데, 제주 여행에서는 레이첼이 나를 참 많이도 찍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잊지 않고 찍어주는 그 마음이 참 고마웠다. 

나를 가장 많이 찍어준 사람, 나를 예쁘게 찍어준 사람이다. 


'보고 싶어, 일루 와 같이 놀자, 우리 여행 가자.'

톡에서 막연하게 떠들던 말들이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행복했던 꿈같은 현실에서 깨어날 시간이 되었다.



2024년 6월 18일 화요일, 우리가 사랑했던 제주 여행은 끝났다.


핸드폰에 가득한 사진, 영상과 머릿속에 켜켜이 담아둔 추억은 남아있다. 삭제할 수 없는 둘만의 경험 위에 우리가 새롭게 만들어갈 이야기는 계속 쌓여갈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커피 향과 빛 그리고 마지막 밤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