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행시 Aug 10. 2024

방(Room)의 총량

요즘 딸의 일상

 5개월 손녀는 한시도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잠시라도 어긋나면 입술을 삐죽이거나 작은 팔다리를 흔들어 댔다. 오, 이런, 쯧쯧….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혀 짧은 달램. 이런 눈 맞춤도 잠시, 곧이어 최후의 수단이 동원된다. 안아주지 말라는 애 엄마의 만류도 소용없다. 슬쩍 눈치 한 번 보고 아기를 안아 든다. 아기는 누워 바라보는 세상과 고개를 빳빳이 들고 보는 세상의 다름을 알아가는 중이다. 깨끗한 흰자위에 검지만 수정같이 맑은 눈동자는 놀라움과 호사스러움에 한층 더 커진다. 물론 잠시 뒤 칭얼거림으로 만천하에 젖을 갈구하는 신호를 보낸다. 스마트폰에 빠져있던 둘째 딸이 달려와 아기를 번쩍 안고 방으로 들어간다. 


  나는 열린 방문 사이로 아기 냄새가 솔솔 풍기는 방과 딸애가 방금 나온 공부방 사이를 서성인다. 거실과 주방을 돌아보며 마음 둘 곳을 찾는다. 6월, 들끓던 한낮의 햇빛이 바람을 만나 가만히 내려앉기 시작한 오후 4시, 한가로움과 허전함이 동시에 찾아온다. 노트북을 들고 자리를 찾는데 침실에는 이미 남편이 큰 대 자로 길게 누워있다. 현관에서 가까운 시어머님 방은 애초에 들어갈 생각조차 없다. 큰 애가 시집가고 막내마저 나가면서 생긴 오롯한 공간은 고작 2개월을 넘지 못했다. 


 방이 4개인 이 집으로 이사 온 게 12년 전이다. 큰아이 고등학교 3학년, 둘째가 중학교 3학년, 막내가 8살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살 집을 정하는데 사회초년생이던 남편과 나는 여력이 없었다. 방 세 개짜리 연립에 살고 계신 시어머님 댁으로 들어가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18년 후 20평이 조금 넘는 집에 여섯 식구는 버거웠다. 안방은 어머님이 막내와 함께 쓰고, 중간 크기는 우리 부부가, 현관 옆 작은 방은 큰 애와 둘째가 썼다. 문제는 화장실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애들은 매일 샤워했다. 남편과 나는 시간에 쫓겨 대충 머리만 감고 출근하는데 점차 짜증이 났다. 이사를 하겠다고 남편이 말하자 ‘너희끼리 가라’며 어머님은 머리를 싸매고 누우셨다.

 

 그럼에도 남편과 나는 집을 알아봤고 마침 방이 네 개 딸린 근처 아파트를 찾아냈다. 집을 보러 가는 날, 현관을 나서는데 어머님이 부스스한 얼굴로 나오셨다.‘너희들이 뭘 안다고.’ 늘어진 티셔츠에 마실 다닐 때만 신는 주홍색 슬리퍼를 대충 발에 끼우고 어머님은 마땅찮은 얼굴로 차에 올랐다. 아파트 입구에서 만난 중개업자와도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곧장 앞장을 섰다. 집은 정남향으로 욕실 딸린 큰방 1, 거실, 방 2, 방 3이 나란히 있었다. 건너편에 방 4와 주방, 현관 그리고 공용 욕실이 있다. 


 아직 전주인이 이사하지 않아 이곳저곳을 안내하며 그동안 살면서 좋았던 것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자, 벽에 낙서가 많다며 어머님이 일침을 가했다. 초등생 두 명을 둔 전주인은 방 3을 옷방으로 쓰고 있었다. 오후 햇살이 알맞게 방을 비추고 싱글침대와 장롱까지 넉넉하게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어머님이 이곳을 쓰시면 좋겠네요.’냉랭한 어머니를 보고 뭔가를 눈치챘는지 중개사가 재빨리 말했다. 그 말에 유심히 방을 살피던 어머님의 얼굴에 알 듯 말 듯 미소가 지어졌다. 방 2는 욕실이 코 앞이라 샤워하고 맨몸으로 후딱 들어갈 수 있었다. 한밤중에도 화장실 출입이 잦았던 어머님에게 무엇보다 이 점이 마음에 들었으리라. 물론 가족 최고의 난제였던 화장실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사는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잔금을 치르고 전주인이 나간 후 바로 도배를 했다. 벽지 고르는 일은 방 주인에게 권한을 줬다. 우리 부부가 쓸 큰 방은 부자가 된다는 도배사의 말에 황금색이 섞인 화려한 빛깔, 어머님은 아무 무늬가 없는 베이지색을 고르셨다. 방 2는 할머니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막내가 쓰기로 하고 신데렐라 캐릭터가 그려진 분홍색 벽지가 발라졌다. 방 4는 전에 쓰던 이층침대가 고스란히 들어가고 큰애와 둘째가 함께 썼다. 순서로 보면 둘째가 방 하나를 차지하는 게 맞지만 그러지 않았다. 둘째는 정말로 2층 침대가 좋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특유의 양보심인지 흔쾌히 언니와 쓰겠노라 했다. 하지만 벽지만은 자신이 고르겠다고 했다. 큰 애가 탐탁지 않아 했지만 둘째는 연한 하늘색 세계지도가 펼쳐진 순간 ‘우와’하고 환호성을 지르더니 다른 것은 쳐다보지 않았다. 그렇게 방마다 주인 취향을 담은 벽지가 울타리처럼 에워쌌다.  자기가 고른 벽지를 한없이 대견해하며 잠자기 전 나라 이름을 짚어가던 둘째의 손가락 세계여행은 6개월을 넘지 못했다. 집 근처 여자고등학교를 마다했다. 자신의 꿈을 펼치기에 너무 보수적이고 갑갑하다는 이유였다. 원하는 학교는 집에서 두 시간이나 떨어져 있었다. 많은 불편과 어려움이 있을 거라는 온 가족의 만류에도 아이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자기 뜻을 지켰다. 


 다음 해 3월 입학한 학교는 꽤 훌륭했다. 기숙사는 4인실이지만 화장실과 샤워실이 분리되고 내부에 개인 독서실이 따로 있었다. 이불 짐과 몇 가지 물품을 들여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려고 차를 탔다. 떠나는 우리 차에 손을 흔드는 둘째 모습에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키라도 컸으면 덜했을까. 150 센터미터 밖에 되지 않는 둘째는 우물가에 서 있는 아이처럼 처량하고 위태로웠다. 

 아니나 다를까 꼭 2주일 후 일이 터졌다. 금요일 저녁 8시, 늦은 저녁이라 급하게 앉힌 압력솥이 막 달리기를 끝내고 요란한 심호흡을 내지르는 사이 둘째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으로 오는 마지막 버스를 놓쳤는데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고, 아이는 거의 흐느끼다시피 하고 있었다. 다 된 밥에 취사 버튼을 또 누른 것처럼 머릿속이 지글지글 끓어올랐다. 놀랐을 아이를 진정시키고 택시를 타고 오라 일렀다. 밤 10시에 도착한 아이는 얼마나 애가 탔는지 눈 밑 다크서클이 짙어져 있었다. 원래 자립형 사립학교라 365일 기숙사 생활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 점을 아이와 우리는 높이 샀고, 학교를 결정하는데 큰 몫을 차지했지만, 모든 학생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상위 10퍼센트인 아이들만이 별도 기숙사에 배정되어 자유가 허락되었고 어중간한 성적은 일반기숙사에 머물러야 했다. 그 말은 2주에 한 번씩 기숙사를 비워야 한다는 거였다. 잘 확인하지 못한 책임에 둘째는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며 집으로 오는 중에 최대의 고비를 맞이했던 거다. 


 그 후 3년간 남편과 나는 2주에 한 번씩 아이를 실어 날랐다. 교통편이 좋지 않아 버스밖에 없는 데다 직통도 아니라서 오는 데만 3시간이 넘었다. 승용차는 2시간이라 하는 수 없이 남편과 번갈아 기사 노릇을 했다. 지금도 둘째의 고등학교를 생각하면 회색 포장도로와 고속도로 요금소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집에 돌아온 둘째는 주말 내내 2층 침대에서 거의 내려오지 않았다. 세계지도 방 이층침대는 그저 둘째의 주말 쉼터였다. 3학년이 되고 어느 봄날, 여느 때처럼 늘어지게 잠을 자는 둘째를 보다 못한 내가 소리를 팩 질렀다. 그렇게 고집부리며 다닌 학교도 재미없더냐는 비아냥과 성적이 좋았으면 이렇게 집에 오지 않아도 되는데 공부도 하지 않을 거면서 부모만 고생시킨다는 힐난이었다. 나는 너무 지쳐있었다. 한시도 한가할 틈이 없던 직장생활도 그렇고 늦둥이 막내가 학교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늘어져 있던 둘째는 사방에 가시 돋친 내 말을 그대로 받아 들더니 그 위에 활활 불까지 붙여 다시 내게로 던졌다. 


 “내가 학교에서 얼마나 노력하는지 엄마는 모르잖아. 그리고 이렇게 엄마·아빠를 힘들게 할 줄은 나도 몰랐다구,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울기 시작하면 눈을 심하게 비비는 둘째의 버릇이 악다구니 속에 빠르게 튀어나왔다. 아차 싶었다. 이럴 때는 그저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이었다. 며칠 후 둘째에게 긴긴 편지를 썼다. 생각 없이 내뱉은 내 말에 잘못 섞인 단어와 어둠에 갇힌 방 이야기를 했다. 당장은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이 한 줄기 빛도 허락되지 않는 절망의 방이라도, 그 어둠에 익숙해지면 비로소 다른 문을 보게 된다고. 인생은 한쪽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는 누군가의 말을 빌려왔다. 이미 나의 말은 신뢰를 잃어 힘이 없었기에. 시간과 반복은 일상에 익숙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우리가 갇혔다고 생각했던 방에 많은 종류의 문들이 열렸다. 둘째를 실어 나르던 오래된 SUV 차는 주말 4시간 동안 움직이는 방이었다. 대부분 두 명이었지만 어느 날은 막내가 들어오고, 어느 날은 큰 애까지 함께했다. 우리는 차 안에서 끝말잇기나 초성 게임을 하며 시간을 줄여 나갔고 맛집을 검색해 저녁까지 해결한 뒤 둘째를 들여보냈다. 

 전에 없던 애틋함과 나이 차이로 서먹했던 자매 사이 우정 비슷한 것들이 문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렇게 둘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과 취업, 결혼, 출산까지 무난하게 이어갔다. 희한하게 둘째는 대학도 기숙사, 취업한 곳도 기숙사였다. 결혼했어도 사위와 지역이 달라 서로 기숙사에서 지내야 했다. 그 사이 아이가 생겼다. 장거리 출장이 많은 사위는 육아에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마음은 있지만 집에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으니 서툰 가사와 육아는 둘째에게 힘에 부쳤다. 처음에는 농담처럼 당분간 내 집으로 오라 했던 말이 현실이 됐다. 아뿔싸, 말이 씨가 된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구나. 


 모녀가 온다는 소식에 방을 정리했다. 아기방은 신데렐라 공주방으로 정했다. 이 방은 통창이라 벼를 심은 논의 풍경, 햇빛, 바람과 같은 모든 자연이 모여들었다. 커튼을 내려 세탁하고 침대보를 갈고, 의자에 올라 천정에 붙은 먼지를 털어냈다. 책상에 있던 내 짐을 모두 정리해 세계지도 방으로 옮겼다. 큰 애까지 나가자, 이층침대를 내버리고 싱글침대를 들여 손님방으로 쓰고 있었다. 둘째가 심혈을 기울인 하늘색 세계지도는 빛이 바래기는 했지만, 아직도 분명한 글씨로 어딘지를 설명하고 있다. 나는 이 방에서 새롭게 시작하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둘째는 생각이 달랐다. 휴직 기간에 자격증을 따야 한다며 세계지도 방 책상 위에 노트북과 온갖 수험서를 쌓아놓았다. 그들 모녀는 각자의 방을 독차지했다. 둘째는 아기가 깨어있으면 신데렐라 방으로 쪼르르 달려갔고, 아이가 잠들면 '그립다.' 하면서도 세계지도 방으로 후딱 들어갔다. 아이 방에 있는 벽지 속 신데렐라는 둘째의 바지런한 움직임을 타고 세계 곳곳을 누비는 듯했다. 


 점점 헐렁했던 공간에 아기 에너지가 들어찼다. 앞 베란다에는 방금 세탁한 아기 옷에서 비릿한 젖 냄새가 났다. 아기는 끝도 없이 새로운 표정을 만들어 냈지만 내 공간을 갈구하던 마음은 자꾸 쪼그라졌다. 하릴없이 노트북을 켜놓고 투덕투덕 자판을 두들기던 시간도 줄었다. 노트북을 들고 주방과 거실을 배회하다 다시 가방에 쟁여 두는 날이 늘었다. 마음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침실 방은 노트북 작업이 불편했다. 화장대와 2인용 안락의자가 있지만 글쓰기에는 높이가 맞지 않았다. 이게 얼마만의 기회인데, 둘째에게 방을 하나 내놓으라고 할까? 물론 안된다. 둘째는 어쩌다 엄마가 되었지만, 아직도 꿈을 꾸는 이십 대다. 원하는 직장을 잡았지만, 생각만큼 열정이 솟지 않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고민하고 있다. 열심히 살려고 발버둥 치는 딸에게 없는 것도 잡아 줘야 할 판에 당분간 나의 욕망은 잠재우리라.  


 그러고 보니 둘째는 지금까지 자기만의 방이 없었다. 어릴 때는 언니와 어른이 되어서는 기숙사 룸메이트, 결혼 후에는 남편과 방을 나눴다. 큰 애와 막내와 비교하면 우리와 함께한 시간도 짧았다. 가족관계에‘총량의 법칙’이 존재한다면 둘째 기준은 ‘방의 소유’가 아닐까. 여태 가져보지 못한 자기 방을 분신까지 동원함으로써 비로소 공정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긴 낮잠을 자던 아기가 소리를 낸다. 공부방에 있던 둘째가 부리나케 나온다. 하루에도 몇 번씩 두 방을 오가는 둘째의 몸짓은 겨드랑이에 날개라도 달렸는지 참 사뿐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