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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라이야기 Mar 04. 2022

정년 퇴직자의 편지 1

정년 퇴직자의 편지


 더운 날씨가 한풀 꺾이고 서늘한 바람이 밀려올 때였다. 현장에서 쉬고 있는데 어느 분이 나에게 다가와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적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나에게 왜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난 노동조합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에 운 좋게 3년 연속으로 수상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모양이다.


 황당한 일이었지만 어떤 이야기인지 들어보기로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분은 이번 연도에 정년퇴직하시는 분이다. 일하면서 느꼈던 감정이나 불만, 자부심, 명예 등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이런 이야기는 대의원이나 사무실에 가서 이야기해도 될 것을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나에게 글로써 적어 달라니……. 너무 황당했다. 그리고 타인의 개인사를 글로 쓴다는 것은 글 쓰는 입장에서 창피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단번에 정년퇴직자의 부탁을 거절했다.


D-100

 거리에 코스모스가 피어나고 바람이 서서히 차가 올 때쯤이었다. 난 쉬는 시간에 현장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어떤 분이 자기는 이제 100일 남았다며 히죽히죽 웃으며 나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것이었다. 이분은 올해 정년으로 퇴직할 분으로 이 영감이다.


 이 영감이 "회사를 나갈 날이 얼마 안 남았다."며 자랑하듯 이야기하자 옛날에 있었던 일처럼 느껴지는 데자뷔 현장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군대 시절 자대 배치받던 날 말년병장이 다가와 눈을 감으면 무엇이 보이냐고 물었다. 내가 ‘컴컴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다’고 하자 그게 ‘네 남은 군 생활이고 본인은 며칠 안 남았다.’며 좋아했던 것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번 상황은 틀리다. 이렇게 복지 좋고 일하기 좋은 우리 회사에서 얼마 안 남았다고 좋아하다니……. 저번에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는 옆에서 퇴직이 얼마 안 남았다며 안타까워하는 퇴직예정자 형님을 본 기억이 있다. 근데 이분은 오히려 퇴직이 백일 남았다며 이리 좋아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순간 난 이분의 감정이나 머릿속에 든 생각, 진심들, 즉 속마음을 알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 영감의 심리상태나 마음은 일반 정년 퇴직자들의 마음과 거의 같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부터 이 영감의 진짜 속마음을 알기 위해 관찰하기로 했다.


 ‘무슨 관찰이냐? 그냥 물어보면 되지!’라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예전에 이 영감과 다른 형님이 무슨 이유인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말싸움하는 것을 보았다. 어찌나 괴팍스러워 보이는지, 물어보면 한 소리 들을 것 같았다. 또 소문에 한 성깔 한다는 이야기도 있어 섣불리 물어보지 못하고 주위에서 관찰할 수밖에 없다.



D-95

 이 영감이 95일 남았다며 좋아하면서 이젠 회사에서 먹는 끼니로 남은 일수를 계산하고 있다. 그러면서 현장에서 남이 읽은 신문과 집에서 들고 온 신문을 보며 어느 부위를 가위로 잘라 모으는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이 영감 등 뒤로 가서 몰래 엿보려고 하면 게 눈 감추듯 주머니 속에 집어넣어, 도저히 확인할 수가 없다.


 우리 반은 폐지를 모은다. 불우이웃 돕기 등 좋은 일을 하시는 타 공장의 어느 분을 돕기 위해  샵 옆에 빈 박스를 놓아두는 것이다거기에 못 쓰는 신문이나 폐지를 모아 두고 있다. 이 영감이 그곳에 신문을 버리는 것을 보았다. 거기를 살펴보면 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 시간대에 그 박스를 살펴보니 이 영감이 스크랩하고 버려둔 신문지가 있었다. 관찰해보니 사회면에서 잘라져 나갔다는 단서 말고는 그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첫 면에 목록이나 순서가 적혀 있으므로 그 첫 면을 찾으면 되지만 폐지가 너무 막무가내로 썩여 있어 찾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감은 신문의 무슨 내용을 스크랩하며 모으는 것일까?



D-93

 이 감은 일솜씨가 좋아서 용접, 취부, 곡직까지 할 줄 알았다. 그래서 현장에 남은 후배에게 곡직 기술을 인수인계해주고 있었다.

 곡직이란, 조선소에서 많이 쓰는 기술로 용접 열에 의해서 휘어진 철판 등을 열로써 원래 모습으로 펴는 작업인데 그 후배 형님이 일솜씨가 서툰지 헤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어찌 된 일인지 한 성깔 한다고 소문난 이 영감은 “이런, 똥강아지 녀석!”하며 농담도 하시고 친절하게 잘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곧바로 한걸음 물러서서 인상 찌푸리는 이 영감의 모습이 내 눈에 포착되었다.


 아무래도 마지막까지 후배들과 친하게 지내며 좋은 이미지로 남고 싶은 모양이다.


D-88

 오늘은 이 영감이 남은 날을 본인이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으로 계산해서 "몇 시간만 일하면 정년퇴직"이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너무 실망해서 이 영감과 말도 나누기 싫다.


 휴식시간에 회사의 수주량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영감이 거기다 대고 ‘이젠 나랑 상관없다.’며 히죽거리는 것이었다.


 회사의 녹을 먹고사는 사람이 어찌 저런 말을 할까? 거의 평생을 일한 회사에서 이제 얼마 안 남았다고후배나 회사가 어찌 되었든 상관없다는 저 말이 나를 정말 실망하게 만들었다.


 이 영감과 같이 퇴직이 얼마 안 남은 사람들의 속마음은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본인 퇴직 후에 회사나 현장에는 별 관심 없고 남은 시간 안 다치고 시간만 대충 때우다 나가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인 모양이다. 관찰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좀 더 인내심을 가지고 관찰하기로 결심했다. 아직 이 영감 이하는 의문스러운 행동들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D-87

 아침 조회시간에 ‘완성품을 생산하는데 납기일이 다가와 서둘러야 된다.’며 반장이 2주간만 야간에 용접할 사람을 모집한다고 했다. 이 영감이 손을 들기에 나도 모르게 손을 들고 말았다.


그리하여 나와 이 영감이 2주간만 야간에 일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나의 호기심이 이 영감과 같이 작업할 기회를 노려 손들게 만든 것이라 생각 든다.


 야간작업 첫 번째날, 난 이 영감과 작업하므로 써 정년퇴직하는 이 영감의 심리상태나 속마음을 잘 알 수 있을 거라 확신이 들었고 쉬는 시간에 많은 질문들을 함으로써 그것들을 깨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밤이 되어서 작업하려니 잠도 오고 시차 적응도 되질 않는다. 또한 새벽 3시가 되니 눈꺼풀도 천근만근이고 용접비드도 눈에 잘 들어오질 않는다.


 야간작업하면서 느낀 건데 우리 회사에 쥐가 많은지 그때 알았다. 한 번은 일하는데 지나가던 쥐와 눈이 마주쳤다. 근데 이 쥐가 여기서 이 시간에 뭘 하냐는 듯 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꿈쩍하질 않고 있다. 그래서 용접 스파크를 내니 그때서야 도망갔다.


야간작업 넷째 날인데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하지만 예상외로 이 영감이 나에게 호의적으로 다가왔다. "힘들지 않으냐?" 물어도 봐주고 힘내라며 격려도 해주었다. 일하다가 막히는 작업도 서슴없이 가르쳐주었다.


 점심시간이 아닌 새벽 12시에서 1시간 동안 야식 먹는 시간에 이 영감이 빵도 나누어 주고 좋은 말도 해주었다.

용접은 제빵과 같다. 먹기 좋은 빵이 잘 팔리듯 용접도 비드가 예뻐야 한다. 제빵사가 본인의 가족이 먹는다는 생각으로 책임감을 가지고 위생적으로 빵을 만들 듯이 용접사도 내가 만든 완성품을 우리 가족이 사용한다는 생각으로 책임감을 가지고 만들어야 한다. 또한 여러 자기 재료를 가지고 구워서, 향기 나는 맛있는 빵을 만들어내는 제빵과 여러 가지 쇠를 가지고 취부 하여 흄이 피어오르는 용접을 통해 아름다운 완성품을 만들어내는 우리는 너무 닮아있다.


 용접사로서의 책임감과 자부심을 이야기해주었다. 그 순간 이 영감이 달라 보였다.


 그리고 이 영감이 나에게 내가 가진 자격증에 대해 물어보기에 나열해서 이야기해주었다. 그러자 내가 가진 굴삭기 운전기능자격에 관심을 보이며 작업복에서 그동안 신문지에서 스크랩한 신문종이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귀농이나 귀촌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귀농해서 고추나 효소로 성공한 사람이나 귀촌해서 자기 힘으로 땅을 파서 집을 지은 이야기들도 적혀있었다. 이 영감은 퇴직하면 고향으로 가 집을 직접 지어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현재 새로운 도전에 대한 설렘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반반이라고 했다.


 아침이 밝아오고 집에 갈 시간이 다가오자 난 이 영감에게 피곤하지 않으시냐?라고 물어보았다.


- 평소 점심시간에 쳐자빠 자니깐 힘도 없고 그렇지! 정상적으로 낮 근무로 돌아갔을 때는 점심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해라. 신체단련을 하든지, 자기 계발을 하든지 해라.


이 영감이 내게 호통을 쳤다. 하지만 왠지 기분이 좋았다. 쇠를 다루는 사람답게 말은 쇠의 표면처럼 거칠고 차가웠지만 그 쇠를 녹일 수 있는 뜨거움,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은 이 영감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D-63

 2주간의 야간작업으로 인해 나에게 부정적이었던 이 영감의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많이 바뀌었다. 또한 그런 감정들로 인해 많이 친해졌다. 일하고 있으면 수고한다고 말도 해주시고 월급명세서가 나오는 날이면 명세서 나왔다고 알려주시고 누가 음료수라도 돌리면 음료수 먹으라고 말도 해주었다. 업무적으로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허물없이 가르쳐주시고, 그로 인해 고마움을 많이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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