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에세이를 쓰게 되었는가
지구별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처음 소외감을 느낀게 언제였나 되짚자면 텔레비전이 영 재밌지 않아졌을 때였다. 화면 속의 남자 연예인은 자신이 하마터면 동성애자와 엮일 뻔했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소위 "썰"을 풀고 있었고 우스꽝스러운 CG와 함께 색색의 자막이 달렸다. 어린 나는 그게 왜 웃긴 건지 몰라 별로 웃고 싶지 않았는데 방청객의 녹음된 웃음소리가 깔렸다. 남들이 웃을 때 따라 웃어야 된단 점이 곤혹스러웠다. 그래서 예능을 끊었다. 시간이 아주 많아졌다. 대신 책, 영화, 드라마를 닥치는대로 봤다. 미드나 일드도 가리지 않았다. 국적이 어떻든 대개 줄거리는 비슷했다. 아무래도 세계평화는 그리 멀리 있지 않고 스크린 속에 있었던 모양이다. 남주는 여주를 괴롭히고, 최악의 인연을 쌓고, 혼자만 감정을 쌓아가다, 싫다는 여주를 몰아붙여 키스를 하고 로맨틱한 음악이 깔린다. 그쯤에서 정주행을 관뒀다. 드라마도 끊으니 볼 게 없어졌다. 나중에서야 그 드라마가 시청률 1위였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럴만도 하다. 다들 그 이야기였으니.
내가 들어온 이야기 중 칭찬 아닌 칭찬이 있는데, 다른건 다 봐줄만한데 대중성이 없단 것이다.
대중성이란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이 메이저한 감성이며 사람들은 어떤 것에서 공감과 재미를 얻는가?
요컨대 나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뿔 달린 말을 찾기야 쉽다.
[긴급] 유니콘 깅깅이를 찾습니다.
이마에 뿔이 달렸으며 색깔은 예쁜 초코우유 색. 사례금 NN만원.
010 XXXX XXXX.
그런데 대중성이란 생김새부터 모르겠으니 도저히 감이 안 온다. 아니, 나이를 먹어온만큼 학습했으니 사실 요즘 시대에 뭐가 먹히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기야 하다. 그럼 나는 대중이 아닌가 싶을뿐. 공급과 수요가 쪽수 싸움이라면 조금이라도 악지를 기력이 있을 때 목소리를 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케이크의 단면만 봐도 무엇으로 이뤄졌는지 금방 알아챌 수 있는데, 나라는 인간의 기저에 깔린 우울이 들킬까 두렵긴 하다. 들키고 자시고 하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왔나 싶지만서도? 예전엔 지금보다도 훨씬 더 우울했다. 사람 구실을 하는 미래를 그리기 좀처럼 어려웠다. 내가 하자품처럼 느껴졌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모두 내가 잘못된 인간이라서, 뭐 그런 삽질을 했다. 성장기에 좋은 어른들을 못 만난 편이었는데, 다들 입을 모아 하던 이야기를 종합하자면 너 그러면 안돼, 폐 끼치지 마라, 뭐가 혼자 그렇게 불편하고 유별나, 너 그러면 사회생활 못 한다, 식이었다. 내 기억으론 그때쯤 첫 만화를 그렸다. 화자는 내가 아닌 남이었지만 내가 사물을 어떻게 느끼는지, 세상의 어떤 부분이 싫고 어떤 부분이 눈물나도록 좋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표현할 수 있었다. 투박해도 나쁘지 않았다. 만화에 재미를 붙인 계기였다.
Sting - Englishman In New York 이란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다.
oh, I'm an alien, I'm a legal alien
오, 나는 외계인, 나는 합법적인 외계인
Be yourself no matter what they say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상관말고 자신이 되세요
자신이 되란 말에는 불투명도 50의 (그런데 이제 남들 눈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라는 말이 생략되어있다.
합법적인 외계인은 그냥 적당히 벌어먹으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싶다.
큰 것, 많은 것까진 안 바란다고 겸손 떨자니 요즘 시대엔 아무래도 이마저 큰 소망인가보다.
구글에 증상을 검색하지 말라지만, 지금같은 정보화 시대에서야 어딘가 좀 다르거나 아프다 싶어도 혹시 이런 사례가 있나 검색해 볼 수라도 있지, 아주 옛날엔 감기 몸살만 걸려도 죽을병인가 싶어 힘들었을테다. 기침을 한다는 이유로 어라, 저 놈은 좀 이상한 놈으로 격리되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단일종이라고 한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아종의 싹이 빼빼말라 한 종류만 남았단 뜻이다. 지구별에는 인구 수가 이렇게나 많은데 타인의 성질 또한 자신과 똑같은 한 종류일 거라고 은연중에 믿는 경향이 있어 좀 징그럽다. 악의없는 폭력은 바로 그 곳에서 나온다. 텔레비전의 웃음소리처럼. 녹음한 소리를 틀었을 뿐인데 따라 웃어야하는, 그 공허한 웃음처럼.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자신과 닮은 경우를 보는 것만으로도 안심을 얻는다. 그것을 동지애라 부르기엔 어쩐지 좀 대단해야 할 것 같고 낯간지러우니 그냥 멸종 방지 헛발질이라고 하자.
에세이를 써봐야겠단 생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의식의 흐름을 정리하는 것은 제법 재밌는 취미고, 생각도 걱정도 넘치는 인간이기에 가끔 적어보려한다. 변변찮은 글이지만 어딘가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합법적 외계인들에게 심심한 위로가 되길 바란다. 친애하는 이방인 친구에게 블루투스 하이파이브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