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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루미 Jul 15. 2022

모두에게 괜찮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너에게

“불필요한 관계를 정리하고 소중한 사람에 집중하라.”

- 가오위안     


 2년 전, tvn의 예능 프로그램 중 <일로 만난 사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유재석이 중심으로 매 회 다른 게스트들이 나왔다. 한 회에서 게스트로 장성규가 나왔는데 그 당시 장성규는 아나운서 프리랜서 선언을 하고 한창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장성규는 대중의 큰 사랑에 감사함과 불안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는 유재석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제가 원래도 생각이 많고 고민이 많아요.
프리 선언을 한지 얼마 안 돼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정말 겁이 많은 쫄보거든요.
형님 누가 저를 욕하면 그게 너무 무서워요.

 

 장성규의 말을 들은 유재석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근데 그걸 이겨내야 돼.” 장성규는 덧붙여 물었다. “그럼 형님께서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 답을 못 찾고, 힘들어하실 때가 있으셨어요?” 유재석은 장성규의 말에 공감하며 말했다. 


있지. 당연히.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야.     

 

 유재석의 말처럼 많은 사람들이 타인에게 욕과 비난을 듣는 것을 두려워한다. 내가 한 행동과 말로 누군가에게 비호감이 되지 않을까 불안감을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되도록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사람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 이 욕구를 채우기 위해 자신이 맺은 관계에 열과 성을 쏟는다. 이렇게 주변 관계에 일일이 다 신경을 쓰고 모두에게 잘하면 그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을 수 있을까? 단도진입적으로 이야기하면 그 누구도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다. 만인의 사랑을 받을 수는 있어도 그 많은 사람들이 전부 나를 좋아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 성격, 성향, 가치관 또한 다르다. 예를 들어 친구와 TV를 본다고 가정해 보자. 서로 같은 장면을 봐도 그 장면을 통해 느끼는 점이 다르다. 다시 친구끼리 같은 책을 읽는다고 가정해 보자. 서로 책에 대해 쓴 감상평이 다르다. 책에서 받는 인상이 다르다.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이하 검블유)>라는 드라마에서 나온 대사가 있다.     

 옳은 건 뭐고 틀린 건 뭘까. 나한테 옳다고 저 사람한테도 옳을까.
나한테 틀리다고 저 사람한테도 틀릴까.
한 가지는 기억하자.
나도 누군가에겐 개새끼 일 수 있다.  

  

 <검블유>에서 나온 대사처럼 내가 옳다고 생각한 행동이 남을 위한다고 행한 모습들이 누군가는 거북하게 느껴질 수 있다. 나의 말과 행동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럼 내가 어떡해야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행동해야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행동을 할 수 있을까?’ 혹시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가? 이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당장 집어치워라. 생각을 멈춰라.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데에는 꼭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신도 이러한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처음 만난 사람의 인상, 소위 말해 첫인상이 별로여서 친해지고 싶지 않은 경험, 나와 다르게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며 “쟤는 진짜 왜 저래?”와 같은 말을 내뱉어낸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인상이 호감형이 아닌 것이, 나와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누군가를 싫어하는 합리적인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이유로 사람은 사람을 싫어한다. 심지어 느낌이 별로라고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는 사건과 명확한 이유보다는 ‘그냥’이 대부분이다. 이래서 모든 사람과 잘 지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잘해줄 필요가 없다. 당신에게 좋은 사람에게만 좋은 사람이 되면 된다. 나는 당신이 당신을 존중하지 않고 무례한 사람에게 당신의 정성을 쏟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어떤 유형의 사람들을 멀리하는 게 좋을까? 

 자신의 성과가 아닌 지인의 업적을 자랑하는 사람, 남을 괴롭히는 사람, 내 자존감을 깎아 먹는 사람, 거짓말을 자주 하는 사람, 화를 많이 내는 사람 등 예시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에게 굳이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특히 나는 이런 많은 유형 중에서도 이중잣대를 가진 사람에게 당신의 시간을 쏟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엄격한 사람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오죽하면 이와 관련된 신조어들도 다양하게 생겨났다. ‘내로남불’, ‘아시타비’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내로남불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줄임말이다. 남은 비난하지만 자신에게는 너그러운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아시타비는 ‘나는 맞고 타인은 틀렸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판단할 때와 남을 판단할 때, 완전히 다른 이중 잣대를 적용한다.     

 

 회사를 다닐 때의 일이다. 처음 근무를 시작한 날, 나를 담당하는 직장 사수가 나에게 물었다. “상세페이지 만들어본 적 있어요?”라고. 나는 상세 페이지를 제작한 경험이 있었다. 사수에게 상세페이지를 만들 수 있다고 대답하였더니 자신이 이전에 만들었던 템플릿 파일을 보내주었다. “파일 하나 보냈어요. 파일 참고해서 상세페이지 만들어주세요.”라는 말과 함께 상품을 하나 쥐여 주었다.


 이 일은 출근하고 불과 5분 만의 일이었다. ‘어?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냥 만들라고? 원래 일을 이렇게 배우나?’ 당황스러웠지만 사수의 말대로 상세페이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수가 만들어놓은 상세페이지는 오타의 향연이었다.

 예를 들어 ‘만들어졌어요.’와 같은 말이 ‘미ㄴ들어졌어요.’로 적혀 있었다. 요즘 소비자의 특성상 상세페이지의 글을 잘 안 읽는다고 해도 오타가 난무하는 상세페이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오타를 내지 않기 위해 상품 설명글을 맞춤법 검사기로 확인하며 상세페이지를 제작하였다. 다 완성하고 사수에게 검토를 부탁했다. 사수는 나의 상세페이지를 보며 말했다.  

    

 “상품 설명이 좀 이상한 거 같은데요?”     

 

 내가 만든 상세페이지는 오타는 없었지만, 조사를 잘못 써서 문장이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수정을 요청받을 때 상사는 덧붙여 말하였다. “그런 디테일 잘 확인해 주셔야 돼요.”라고. 내가 틀린 부분이 있으니 사수의 조언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심 반발심이 들었다. ‘본인 작업물은? 자기 자신한테는 관대하네.’라는 마음이 들었다.


 이중잣대로 사람과 사물을 판단하는 사람은 많다. 사실 이중잣대는 사회 전반적으로 뿌리내리고 있다. 예를 들어 진영논리, 국수주의, 사대주의, 선민사상, 성차별 등 다방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람은 본래 비이성적이며 비합리적인 존재이므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자의적으로나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판단하게 된다. 어쩌면 이중잣대는 인간의 본성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반드시 이해해 줘야 할 의무는 없다. 이중잣대를 당연시하는 사람은 어떤 주장에서도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말에 모순이 많다.     

 

 우리는 살면서 모든 사람과 잘 지낼 수 없으며, 사랑받을 수 없다. 나는 당신이 모든 사람에게 괜찮은 사람이 되려 애쓰고 노력하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에 좋은 사람이 많듯 나쁜 사람도 무수히 많다. 당신에게 좋은 사람에게만 당신은 최선을 다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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