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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엄마에 대하여, 끝내 말하지 못한 것들

싫어하면서도, 같이 살고 있다

by 지화


2025년 7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엄마가 하루빨리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왔다. 누군가에게 꺼내놓기 어려운 말이지만, 나는 감정을 감추지 않기로 했다. 엄마는, 내가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나는 장애인 부모님의 첫째 딸이다. 엄마는 지체장애인이다. 걸을 수는 있었지만 걸음걸이가 절뚝거렸고, 적어도 내가 학창 시절을 보내던 시점까지는 어색하긴 해도 걸을 수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 우리는 서울의 반지하 집에서 살았다. 엄마는 자주 김밥을 싸주었다. 장사를 하려던 게 아니라, 그저 우리를 위해 집에서 서툰 솜씨로 만들어 준 거였다. 일하느라 바빴던 아빠를 대신해 엄마는 우리 손을 잡고 지하철도 타고, 버스도 타고, 거리를 걸었다. 그 시절의 엄마는 절뚝거리긴 했지만 다정했고, 적어도 밖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시골로 이사 온 뒤로 엄마는 변했다. 어느 날부터는 외출을 하지 않았고, “살기 힘들다”, “내가 살아서 뭐 하냐”, “그만하고 싶다” 같은 말을 반복했다. 울면서 주방에서 쓰는 식칼을 목에 들이댄 적도 있었다. “이제는 끝내고 싶다”, “정말 그만 살고 싶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 장면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남동생들은 아마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 시절 집안은 늘 소란스러웠다. 아빠는 술을 많이 마셨고, 물건을 자주 던졌고, 나도 동생들도 사춘기였기에 매일 같이 싸움이 이어졌다. 누구 하나 피를 봐야 끝날 것 같은 싸움. 고함과 울음, 부서지는 소리만 가득했다.

나는 그런 부모님이 창피했다. 밖에서는 엄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빠 이야기만 하다 보니 사람들은 내가 엄마가 없는 줄 알았다. 엄마 존재가 드러나면, “전업주부인데 집안일은 잘 못하신다. 곱게 자라서 그렇다”라고 얼버무렸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덮었고, 이제는 진실을 말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스무 살이 되어 집을 나왔다. 그리고 십 년 가까이 타지에서 떠돌며 살았다. 도시와 시골을 오가며, 어쩔 수 없이 내려왔다가 다시 나가기를 반복했다.

그 사이 부모님은 늙었다. 아빠는 한 번 쓰러져 병원 치료를 받고 가까스로 회복했다. 엄마는 휠체어 없이는 외출이 불가능해졌다. 예전의 어색한 걸음걸이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의 엄마는 하루 대부분을 누워 지낸다. 가끔 허공을 보며 “살기 힘들다”는 말을 반복한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대소변 실수도 잦아졌다. 나는 치매 초기 증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병원에 가자고 하면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저 “불쌍하다”라는 말만 했다.

무엇보다 가족은 엄마의 상태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둘째 동생은 오히려 엄마가 더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엄마의 외출은 병원에 다녀오는 1~2회가 전부이고, 가끔 아빠가 농사 핑계를 대며 데리고 나가는 날이 전부다.

지금도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아빠 이야기만 한다. 엄마가 없는 줄 아는 사람도 많다. 거짓말을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진실을 꺼내기가 더 어려워졌다.

엄마가 떠나도 나는 아마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을 것이다. 조용히 장례를 치르고 사람을 부르지 않을 것 같다. 자다가 조용히 숨이 멎는다면, 그것을 호상이라 여기며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진심으로 바란다. 아빠가 아직 건강하실 때, 엄마가 먼저 세상을 떠났으면 한다. 그 바람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지만, 지금의 나는 그 마음밖에 없다.

아침마다 엄마가 누워 있는 모습을 확인한다. 숨을 쉬고 있는지, 깨어 있는지 슬쩍 본다.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어느새 습관이 됐다.

좋아서 그런 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는 아무 감정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뿐이다.

이제 그만하겠다고 하면 붙잡지 않을 것이고, 계속 이어가겠다고 해도 말리진 않겠다. 그 정도의 거리에서, 나는 오늘도 같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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