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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늦게 핀 마음, 그래도 피어난

끝이 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 쓰는 글

by 지화


2025년 6월,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시골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다.


1993년생. 시간이 참 많이 흘렀다. 누군가 나에게 “아직 젊잖아”라고 말할 때마다, 그 말이 위로처럼 들리진 않았다. 어릴 적부터 내게 삶은 늘 무거웠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아빠는 쉼 없이 일한다. 항상 돈이 부족하다고 말하면서도, 뭐든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엄마는 여전히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다.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고, 병원 외에는 외출도 어렵다. 약으로 허기를 채우고,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한다. 치매 초기 증상까지 나타났지만, 가족들은 그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엄마는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나는 엄마의 친딸이지만, 오래전부터 엄마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엄마의 죽음을 바라고 있다는 이 마음이 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내 진심이다.


막냇동생과는 종종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눈다. 가끔은 웃기도 한다.


하지만 둘째 동생은 여전히 나를 싫어한다. 지금도 싸울 때가 있고, 한때는 다리에 피멍이 들고 손을 베인 적도 있다. 예전에는 그 관계를 어떻게든 회복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 거리감 자체를 받아들이고 있다. 애초에 서로가 기대하지 않게 된 것이다.


나는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 속을 걷고 있다.


축구가 좋아서 선수가 되고 싶었던 첫 번째 꿈은 둘째 동생과의 갈등 속에서 멈춰 섰다.


학창 시절 요리사가 되고 싶었던 두 번째 꿈은 경제적인 현실 앞에서 끝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꿈들을 향한 마음은 늘 간절했지만, 현실은 단 한 걸음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공부를 시작했다. 이게 세 번째 꿈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한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그 마라톤에서 어디쯤 와 있는 걸까.


첫 번째 꿈은 가족이라는 장벽에 막혔고, 두 번째 꿈은 사회와 돈 앞에서 꺾였다.


이제 막 시작한 세 번째 꿈, 4년의 학업만큼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나 자신을 위해 끝까지 마무리하고 싶다.


살아오면서 늘 무언가를 선택하고, 포기하고, 다시 선택하고, 또 포기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진짜 간절하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너무 잔인한 말이다.


나는 늘 내 자리에서 치열했다. 매일을 살아내는 데 전력을 다했고, 단지 결과가 없었을 뿐이다.


지금 서른을 넘긴 나는 사회가 말하는 그 어떤 기준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직장도 없고, 돈도 없다. 대학교를 졸업하지 않았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 연애도 안 하고, 오래된 친구도 없다. 특출 난 외모도, 타고난 재능도 없다.


가족은 아프고, 나는 지쳐 있다. 감정은 오락가락하고, 몸은 예민하고, 세상과 닿는 방식은 서툴기만 하다.


정상이라는 이름 앞에 나는 단 하나도 내세울 것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다. 오늘 하루를 겨우겨우 버티고, 내일은 또 어떻게든 살아낼 준비를 한다.


누군가는 이런 삶을 실패라 말하겠지만, 나는 그저 내가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왔을 뿐이다.


죽으려 했던 날도 있었다. 바닥까지 내려가 자존심도 자존감도 모두 잃은 시절, 그저 시간에 끌려가듯 살아낸 날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시간 속에서도 사람들을 만났고, 그 만남 속에서 울고 웃고 무너지고 견디며, 나는 나로서 존재해 왔다.


내 인생의 끝이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그 끝이 오기 전에는 말하고 싶었다.


나는 힘들었다고. 살고 싶었다고. 좋아했었고, 미안했고, 고마웠다고. 그리고 사랑했다고.


이건 유서가 아니다. 이제야 겨우 솔직하게 꺼낼 수 있게 된, 한 사람의 고백이다.


1993년생.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오늘도 묵묵히 살아내고 있는 나의 이야기다.


살아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의 연속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겪고, 감당하지 못할 감정들을 버티며 여기까지 왔다.


잘하고 싶은 마음과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뒤섞였고, 그 와중에도 ‘괜찮은 척’은 계속해야 했다.


스무 살엔 서른이 멀게 느껴졌는데, 서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고, 뭐가 옳았는지도, 내가 뭘 놓친 건지도 잘 모르겠다.


단 하나 확실한 건, 나는 지금까지 진심으로 살아냈다는 것.


이 삶이 별거 아니어도,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결과가 없어도, 나 자신에게만은 부끄럽지 않게 살아오려고 했다는 것.


나아지겠다는 말보다, 그럼에도 살아 있겠다는 말이 지금 내게는 더 솔직하다.


그리고 아주 늦었지만, 그 모든 시간을 지나 지금, 드디어 내 마음이 피기 시작했다.


늦게 핀 마음. 그래도 분명히 피어난, 나라는 사람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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