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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다시 살아내는 중

쉼과 선택 사이, 나를 지켜내기 위한 시간

by 지화


마음은 아직 어디에도 닿지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돈도 없었고, 너무 오래 멈춰 있었으니까.
처음부터 오래 머물 생각은 아니었다.
잠깐만 있다가, 다시 나가려 했다.
그런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돈이 필요했다.
당장 큰돈은 아니어도, 숨통을 틔워줄 만큼은.
전주로 다시 나가려면 준비가 필요했고,
그 준비를 하려면 일단 뭘 좀 벌어야 했다.
시골 일자리 지원센터에 들렀다.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뻔했다.
고졸에, 자격증도 없고,
편의점이랑 마트, 식당 아르바이트 경력이 전부였다.
그때 마침 고속도로 휴게소 매장에서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간단한 간식을 조리해 파는 오픈형 매장이었고,
위생검사가 많아서 청소가 거의 주 업무라고 했다.
시골이라 그런지 사람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았다.
면접 본 날, 바로 출근 날짜가 정해졌다.
몇 주 뒤부터 일하기로 했다.

그날 밤, 마음이 조금 느슨해졌다.
이제 뭐라도 시작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 날, 독감에 걸렸다.
타이밍이 기막힐 정도였다.

거의 한 달 가까이 앓았다.
몸은 축 처졌고, 마음도 같이 가라앉았다.
움직이기 전보다 더 깊이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자꾸만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정신 좀 차리자.
서른이나 먹고 뭐 하는 거냐.
동생들은 자기 삶을 살고 있는데,
나는 지금까지 뭘 해온 건가.
그런 생각들로 머리가 꽉 찼다.

아프고, 자고, 다시 아프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며칠씩 흘러가던 중,
몸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음도 아주 조금,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뭔가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더는 이렇게 있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
그렇게 다시,
뭐라도 해보기로 했다.

이른 새벽, 고속도로 휴게소로 향했다.



휴게소 매장에서의 일은 녹록지 않았다.
함께 일하던 60대 남자 직원은 거의 손을 놓고 있었고,
나는 매장을 혼자 책임지다시피 했다.
청소며 조리며 정산까지,
그 모든 걸 혼자 감당해야 했다.

관리자들은 나를 믿었다.
나는 그 신뢰 때문에, 또 책임감 때문에
하루하루를 버텼다.


결국 갈등은 곪아서 터졌고
60대 남자 직원은 매장을 그만뒀다.
그 자리에 새로 들어온 건 60대 아주머니였다.
편의점에서 함께 일했던 여사님의 친구라고 했다.
나는 천천히 업무를 알려드렸고,
60대 여자 직원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수술을 해서 다리도 아프고 힘들지만,
친구가 꿀알바라 해서 퇴직하고 마침 심심해서 나왔는데.
이런 일일 줄은 몰랐네. 그래도 약속했으니 해야지."

나는 빠르게 포기했다. 앞서 일했던 60대 남자와 마찬가지였다. 결국 다시 매장은 내 몫이었고, 관리자들은 점점 나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사님들이 나를 곱지 않게 보기 시작했다. 편애받는다고 생각했는지, 여우짓 한다며 나를 고립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왕따가 되었고, 장기간 일할 계획이었지만 결국 1년 만에 그만두기로 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새로 들어온 신입 관리자님의 언행이었다. 고객 응대 중 발생한 문제로 인해 내가 수치심을 느꼈고, 나는 이 일을 더는 이어갈 수 없었다. 관리자들 중 한 분은 기꺼이 증인이 되어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시골 동네에서 문제를 키우고 싶지 않아 조용히 떠났다.

다시 일자리 지원센터를 찾았다. 이번에는 사무직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했지만, 돌아온 말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 한계를 다시 확인했고, 동시에 또 다른 방향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마침 일자리 센터를 통해 22대 국회의원 선거 공정선거지원단 계약직 모집 공고를 추천받았다.

보잘것없는 이력서를 내며 "제가 될까요?"라고 묻자 팀장님은 "도전해 보자"라고 말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짧은 계약직이었지만, 그 일은 처음으로 사회 안에서 내가 작게나마 움직이고 있다는 감각을 주었다. 선거가 끝난 뒤 회식 자리에서 반장님이 말했다. "구직급여받을 수 있어요." 나는 처음 듣는 말이었고, 바로 고용노동부에 전화해 확인했다. 조건은 충족되었지만, 문제는 전 직장인 휴게소 측의 이직확인서였다. 신입 관리자님은 처음엔 발급을 꺼렸고, 같은 말만 반복했다. 나는 고용노동부에서 들은 내용을 그대로 전달했고, 그제야 본사에 확인해 이직확인서를 발급해 주었다.



그렇게 내 생애 첫 구직급여를 받게 됐다. 돈 걱정 없이 쉼을 누릴 수 있었고, 한글·엑셀·파워포인트 교육도 들으며 자격증을 취득했다. 처음으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고민할 수 있었다.

구직급여가 종료된 후, 나는 지역 축제장에서 3일간 환경 정비 아르바이트를 했고, 이후 소스 제조공장에서 한 달간 일했다. 단순했지만 손에 익자 일하는 맛이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랫동안 바라던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식품 제조업체였고, 육아휴직 대체 사무보조였다. 주변에서는 사무보조 업무는 서류 작업보다는 허드렛일이 많다고 했고, 욕도 몇 배는 더 듣는다고 했다.

출근을 하고 막상 현실을 마주하니 생각보다 더 참혹했다. 내 인생에서 처음 해보는 사무실 일이었고,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런데 컴퓨터로 처리하는 입출고 프로그램 입력, 서류 정리는 두 시간이면 마무리가 됐고, 그 이외의 시간에는 청소, 식사 준비까지 다양한 일을 해야 했다. 바쁠 땐 생산라인에 투입되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바쁜 시기가 다가오자 회사에서 아르바이트생들을 많이 채용했고, 사무실에서도 여러 명이 함께 근무하게 됐다. 그 안에서는 갈등도 많았다. 누군가는 싸우고, 누군가는 울고, 나는 싸우기도 울기도 싫어서 그저 조용히 웃으며 버텼다.

결국 몇 개월을 그렇게 지나고, 바쁜 시기가 끝나자마자 조용히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 경험을 하며, 나는 문득 지난 시간들이 떠올랐다. 무례한 사람 앞에서도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던 현실이 안타까웠고,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사회라는 구조 속에서 갓 성인이 된 미성숙한 아이가 달콤한 유혹에 빠져 밑바닥을 겪게 되는 세계가 무섭기도 했다.

하고 싶은 것들을 해보기 위해 가장 먼저 선택한 건 서비스업이었다. 그렇게 10년 넘게 일하면서 수많은 부당함과 감정노동의 경험들이 쌓였다. 그 속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법이라는 체계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임금체불(퇴직금) 문제로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넣었던 일, 이번에는 구직급여를 받기 위해 이직확인서를 받아야 했던 일까지. 이런 경험들이 겹쳐지며 나는 사회와 노동이라는 말에도 관심이 생기게 됐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나를 증명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그런 존재, 만질 수 있는 종이 같은 게 한 장도 없었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될 때마다 작아지고 있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무기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첫 번째로 선택한 게 학업이었다. 고졸은 자격증 선택지도 한계가 있었다.

1993년생, 주변에서는 현실적인 이유로 사회복지사, 영양사, 간호사 등을 추천했지만 나는 또 한 번 평범하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

2025년, 나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1학년으로 입학했다.



어린 시절부터 늘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해온 나는 이번에도 주변에서 말리는 길을 선택한 셈이었다. 조금은 후회도 있었지만, 결국 나는 그렇게 결정했다. 사람들은 “현실성 없는 선택”이라고 말했지만, 내게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의 시작이었다.

글을 쓰는 지금도 여전히 공부 중이고, 일도 하고 있다. 어느 것도 뚜렷하게 끝난 건 없지만, 나는 여전히 삶을 살아내는 중이다. 무언가를 증명하려 애쓰기보단, 나를 더 이해해 보려는 시간.

그 시간들은 나에게 '두 번째 자립'이 아니라, 어쩌면 처음으로 나를 지켜내기 위한 과정이었다.

지금도 나는 법을 공부하며, 노무사를 할지 공무직을 할지 여전히 방향을 찾아가고 있다.
그래도 분명한 건, 그전과는 달리
나는 지금, 나를 지키기 위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시간들이 지나고 나서야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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