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는 것도, 그만두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회복의 끝자락에서, 나는 다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몸과 마음이 한 번에 무너졌던 시간들을 지나오고 나니, 어느새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 계절이 지나기 전, 나는 짐을 꾸려 광주로 향했다.
광주로 가기로 마음먹은 건 꽤 오래전부터였다. 모든 게 낯선 곳보다는, 그래도 아는 얼굴이 있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광주에는 예전부터 수시로 연락하며 지냈던, 여동생 같은 후배가 살고 있었다. 그 친구는 종종 내게 말했다. "언니, 여기 와서 잠깐 쉬었다가, 언니 하고 싶은 거 하면 되잖아."
그 말은 단순한 제안이었지만, 내겐 방향이 되어주었다. 장사를 준비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고, 젊은 사람들이 많은 도시라는 점도 긍정적으로 느껴졌다. 오픈을 도와주겠다는 친구의 말에 용기를 얻었고, 낯선 곳보다 익숙한 도시에서 다시 살아보고 싶었다.
지쳐 있었지만, 피하기보다 다시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나는 광주로 향했다.
광주에서의 첫 일은 마트 야간 아르바이트였다. 장사를 준비하는 동안 수입이 필요했기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고, 내가 당장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건 역시 서비스직이었다. 하루하루 같은 일상이 반복됐다. 계산대에 서서 스캐너를 찍고, 상품을 정리하고, 청소하고, 짧은 말들에 웃으며 대답하고, 퇴근 후엔 혼자 밥을 먹으며 그날을 정리했다. 몸은 금방 익숙해졌지만, 마음은 그리 따라주지 않았다. 늘 막막했고, 다시는 무너지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나는 매일 버티듯 하루를 살았다.
내가 제대로 다시 살아낼 수 있을지, 그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일상을 붙잡고 있던 어느 날, 코로나19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광주에 내려온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도시는 빠르게 조용해졌고, 내가 일하던 매장도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그 무렵, 단골손님과의 사소한 갈등이 있었고, 사장은 그것을 핑계 삼아 나를 내보냈다. 나는 잘못한 게 없었기에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입장을 전했지만,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날로 해고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장사를 준비하는 단계에서 코로나19가 심각해졌고 결국 시작조차 못 하게 되었다. 취업이라도 해야 했지만 고졸 출신에 자격증도 없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상황이라 써주는 곳도 없었다.
그래서 다시 가족이 있는 시골로 내려가게 되었다. 숨을 고르려던 선택이었지만, 내려가고 나서도 마음 편히 쉴 수는 없었다. 치과 치료와 교정 등 갚아야 할 돈도 많았고, 곧바로 생계를 위한 일을 시작해야 했다.
처음에는 동네 잡화점에서 잠깐 일했고, 이후에는 동네 마트에서 정식 직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여자 실장님은 애정 표현이라며 등을 때리고, 어깨를 퍽퍽 쳤다. 손님들 앞에서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나는 민망하고 억울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여자 과장님께 그간 겪었던 일을 하나하나 설명드렸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래봤자 바뀌는 건 없어.” 그 말에 다시 작아졌다. 현실은 늘,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쪽이었다. 나는 결국 그만두었다.
제대로 싸우고 싶었지만, 나는 곧 떠날 이방인이었고 여기는 부모님이 살아가는 터전이었다. 시골은 소문이 빠르고, 특히 젊은 사람은 더 조심해야 하는 위치였다. 괜히 문제를 키웠다간 가족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었다.
그런 곳에서 나는 ‘맞는 말’을 해도 틀린 사람이 되었고, 조용히 사는 것이 모두의 평화인 양 받아들여야 했다. 나는 결국, 쉼을 다 고르기도 전에 시골에서도 오래 머무를 수 없다는 걸 느꼈다. 일도, 사람도, 감정도, 나를 오래 붙잡아주지 않았다. 머무는 것보다 떠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광주로 향했다. 익숙한 거리, 아는 얼굴 몇 명, 완전히 낯설지는 않은 곳. 이번에는 정말, 무언가를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하루가 멀다 하게 이력서를 제출하고 면접을 봤다.
그리고 그중에는 카페 아르바이트도 있었다.
면접 내내 분위기가 좋았고 나도 간절했다.
끝내 합격했다는 소식에 심장이 뛰었다.
‘나도 할 수 있구나.’ 그게 너무 오래간만의 감정이었다.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매장 구조,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업무, 하루에도 수십 명을 상대해야 하는 서비스. 열심히 했지만, 서툴렀고, 부족했다.
처음엔 초보여도 괜찮다고 했다. 조금씩 배우면 된다고, 천천히 해도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해볼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버텼다. 하지만 사장님의 말은 바뀌었다.
"생각했던 이미지랑 달라요. 하루 이틀이면 능숙해질 줄 알았어요." 그 말이 전부였다.
사장의 말은 내 해고 통보와 맞물려 있었다. 그 매장의 매니저와 포스 담당 아르바이트생은 사장님과 개인적으로도 오래된 사이라고 했다. 유독 두 사람에게만 따뜻하고 집착하듯 대하던 사장의 태도는, 나에 대한 기대가 식었다는 말과 동시에 느껴졌다. 나는 그 관계 속에 끼어들 수 없었고, 결국 조용히 밀려났다. 처음부터 내가 설 자리는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해고 연락을 받은 그날, 집에 와서 부랴부랴 구직 사이트를 뒤졌다. 마침 근처 동네 마트에서 계산원 구인 공고가 올라온 걸 보고 바로 연락드렸다. 전화로 면접 약속을 잡았고, 그날 바로 매장에 찾아갔다.
면접이라기보단 바로 실전 투입이었다. 사장님이 30분 정도 포스기를 사용하는 법과 상품 바코드 위치를 알려주시더니, “내일 출근 시간은 오전 9시예요.” 그 말과 함께 나는 계산대에 서게 됐다. 그날 처음으로 일한 시간은 3시간 정도였다. 짧은 교육, 짧은 시간. 그걸로 바로 다음 날부터 정식 출근이었다.
다시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반말, 시비, 마스크로 인한 다툼들. 싸우고, 사과하고, 경찰까지 부르기도 했다. 함께 일하던 직원이 손님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했고, 나도 경찰서를 오갔다.
가장 씁쓸했던 건 사장님 부부의 반응이었다. “동네 장사인데 왜 그렇게 일을 키워?” 그들은 조용히 넘기는 걸 미덕이라 여겼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조용히 넘긴다고 해서 상처가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라는 걸. 나는 분명히 말할 줄 알게 되었고, 그 말들이 부메랑처럼 돌아올 때마다 다시 무너졌다.
그렇게 견디고 버티던 끝에, 나는 마침내 결심했다. 광주를 떠나기로.
2021년, 서른을 맞은 그 해 나는 모든 걸 정리하고 다시 전주로 이사했다.
전주는 오랫동안 살아온 곳이었다. 나쁜 기억도 많았지만, 좋은 인연과 시간들이 더 강하게 남아 있었다. 두려움도 있었지만, 결국 나는 그 기억들을 다시 마주하기로 했다.
다시 전주로 돌아온 나는 이삿짐을 풀고 가족을 보러 잠깐 시골에 내려갔다가, 어쩌다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대로 현재 글을 쓰고 이 시점까지 눌러앉게 되었다.
그곳에서도 여전히 쉴 틈은 없었다. 다시 가족과 한집에서 살게 됐다. 떠났던 집. 벗어나고 싶었던 집. 돌고 돌아, 다시 여기였다.
그리고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내게 너무 중요했던 ‘인간관계’라는 것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게 되었다. 누군가와 억지로 친해지려 하지 않았고, 떠나가는 이들을 붙잡지도 않았다.
누군가의 시선과 인정이 전부 같던 시절은 지났다.
지금은 내 안의 기준으로 삶을 판단하게 되었다. 불필요한 말에 상처받지 않고,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삶.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다. 지금은 나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된 시간 속에서, 다시 내 호흡을 가다듬는 중이다.
이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시간이다. 지금은,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의 조용한 숨 고르기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