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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폭력 앞에서, 침묵하지 않기로 했다

편의점 진상, 협박, 그리고 법 앞에서 내가 싸운 이야기

by 지화


전주의 마지막 편의점 근무는 집 바로 옆에 있는 매장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나는 쉬고 있는 상태였고, 어느 날 도시락을 사러 그 편의점에 들렀다. 전자레인지에 도시락을 데우고 있을 때, 여자 사장님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처음 보는 손님인데, 여기 뒤에 아파트 이사 왔어요?"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생각보다 길어졌고, 사장님은 내 눈빛이 반짝거린다고, 대화도 재미있게 잘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마침 야간 근무자가 필요하다며 나에게 일을 제안했고, 나는 주거지역 안에 위치한 편의점이라서 안전하겠다는 생각에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2017년 여름, 나는 GS25에서의 근무를 시작했다.

매장은 꽤 큰 규모였고, 손님들도 많았다. 알고 보니 내가 예전에 일했던 편의점 손님들 중 일부가 이곳에도 오고 있었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좋은 기억만 있었던 건 아니다. 진상 손님들이 너무 많았다. 욕설, 모욕, 고성은 기본이었고, 각목이나 벽돌을 들고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달에 10번 이상 파출소에 신고했을 정도로, 이곳은 우범 지역에 가까운 곳이었다.


경찰도 지쳐 보였다. 특히 나이 많은 경찰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 긴급 상황 아니면 누르지 마세요. 학생분, 지금 다쳤어요? 피나요? 긴급벨은 정말 위급한 상황에만 누르는 거예요. 사장님한테 설명 못 들으셨어요?”


그 말을 들었을 땐,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가장 악질적이던 손님은 99년생 남자였다.

2018년 2월, 나는 그를 모욕죄로 신고했다.

서류에는 구약식 처분이 나왔고, 그 정도면 정신 차릴 줄 알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는 계속 매장에 찾아왔고, 나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단골손님이던 젊은 남자분이 증인으로 나서 도와줬고, 그 덕분에 나는 그 사건을 겨우 넘길 수 있었다.


이때 나는 그만해야겠다. 마음을 먹었지만

이미 무기력에 지배당한 상황이었다. 머릿속에서 이 나이에 아무것도 없는 나를 받아주는 곳이 있을까? 차라리 죽는 게 모두에게 이익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이 나를 계속 쫓아오는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기 여사장님은 다른 동네로 점포를 오픈 준비 중이었고 나에게도 "같이 가자"라고 제안을 해주셨다. 나도 그저 몸이 움직였을 뿐이었다.


일하는 내내 그 여사장님은 말투며 태도에서 돈이 많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줬지만, 급여는 늘 최저시급보다 낮았고 주휴수당도 없었다.


나는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고통 속에서 점점 지쳐갔다.


몇 년을 일한 끝에, 그 해 겨울 나는 퇴직 의사를 전달하면서 조심스럽게 퇴직금을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엔 챙겨주겠다는 말이 돌아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말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없다", "다음에 줄게" 같은 말만 반복됐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료를 하나둘 준비했고,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고용노동부 절차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2020년 1월, 나는 전주지청에 임금체불 관련 민원을 정식으로 접수했다.


나 혼자 준비한 게 아니었다. 단골이었던 여성 손님이 많은 걸 도와줬다. 본인도 과거에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절차나 서류 준비를 꼼꼼히 챙겨줬다.


원래는 삼자대면 없는 조사로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담당자의 착오로 대면 조사가 잡혔다. 나는 사장님이 협박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친구에게 동행을 부탁했고, 실제로도 사장님은 날 보자마자 "너 같은 애가 어떻게 이럴 수 있냐", "죽여버릴 거야"라는 말을 쏟아냈다. 자신을 조폭 출신이라고 늘 말하던 남자 점장은 나를 협박했고, 나는 그날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끝까지 버텼고, 결국 내가 이겼다.

그 일 이후, 나는 ‘노동법’이라는 세계를 처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내가 겪은 일이 단순한 불운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겐 작은 사건일지 몰라도, 내게는 그 모든 경험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말한다는 것'의 무게를 느꼈고, 침묵 대신 기록을 택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무서웠고, 지쳤고, 이해받지 못할 거란 생각도 들었지만, 그 모든 시간을 견디고 나니 확실하게 남은 게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당연한 듯 참기만 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또 하나의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전주에서의 마지막 겨울.

나를 좀 더 나답게 만들어준, 전주의 마지막 편의점에서의 시간이었다.

회복의 끝자락에서, 또다시 무언가를 바꿔야 할 시기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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